가을저녁(秋夕)

by 별빛단상

봄꽃은 화려하다. 여름 꽃은 장엄 하고 가을꽃은 온유하며 강건하다.

바람에 낙엽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였고, 누렇게 변색하는 이파리 사이에서 감이 주황색을 띄우는걸 보니

추석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다.

추석 사나흘을 앞선 즈음이면 작은 광이나 다락의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놋그릇을 꺼내, 마당에 멍석이나

가마니 같은 짚풀 등을 깔아 놓고 볏짚으로 잿물을 묻혀 제기등 놋그릇을 닦았다.


이번 추석은 길다.

긴 준비 과정도, 귀향길 가는 험난한 여정도 생략 되어진 것이, 일주일이나 되는 추석연휴기간이 길게

느껴진다.

부모님의 타계 후에는 장손인 내가 움직이는 장소가 곧 고향인지라, 복잡한 귀성행렬에 합류하는

불편함은 겪지 않아도 되었으나,

명절날에만 먹을 수 있던 다식, 매작과, 강정등 한과를 만들고, 색소의 대용으로 치자열매는 붉은색을

얻어내고, 쑥이나 백년초 가루등 외에도 천연의 재료에서 다양한 색을 내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고수의 필력은 원하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배추전 한 장에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명절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추석을 맞아 고향방문길에 나서거나, 멀리 여행을 떠나가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가까운 고궁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집은 추석전날 모여 음식을 준비한다. 음식 장만은 차례라는 본래 목적 외에 각자의 음식 취향에

곁들여서 먹고 싶은 음식 취향에 따라 요구조건이 늘어난다.

“엄마! 나는 육전이 먹고 싶은데 육전을 충분히 해주세요!”

“나는 밤을 속 넣은 송편!”

“나는 콩 넣은 송편!”저마다 늘어나는 요구 조건에 금년 추석은 손녀딸의 “동그랑땡을 호박 편으로 감싼

요리를 해주세요!”하는 메뉴가 하나 추가 되었다 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재료는 준비 해줄 터이니 각자 와서 만들어 먹어”

아내는 손녀딸에게는 조건 없이 해주마! 하는 대신, 딸들에게는 각자 먹고 싶은 것에

직접 손을 더할 것 을 명하였다.

아내는 명절이 끝나면 매번 명절증후근을 앓는 것처럼 하루 이틀 몸살치레를 하면서도

“금년에는 간단히 해야지!”하는 말뿐이고, 자녀들이 요구사항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늘 준비하는 음식은 줄지 않는다.


차례상을 등에 지고 휴양지를 찾는 사람들, 아예 차례상을 생략한 체 성묘 한번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구습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변화인데, 나는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켜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지켜야할 오랜 전통의 무게를 지탱하는 동력이 떨어지고, 세월의 흐름에 점점 중량감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며칠 전 고향방문길에 동행한 친구에게 “추석연휴에 별일 없으면 들려서 술 한잔하세!”하고 술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자극하다.

“연휴 첫날은 늦게 까지 잠이나 실컷 자고 둘째 날은 장을 보고 일요일 음식장만 해야지!” 일주일 몫의

플랜이 정해져있는 아내는 벌써부터 바쁘다.

그 틈새에서 나는 야채, 과일, 이것저것 음식 장만에 필요한 재료의 배달꾼을 자처하며, 작은 소반 위에

배추전한장과 동동주한잔을 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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