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도, 경상북도 상주를 여행하다 -
상주 땅을 바라보며, 난 설레기 시작하다.
위성사진을 보고 있으면, 상주 땅의 진가는 여실하다. 경상북도 서북쪽 모서리에 있으면서, 길은 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진다. 낙동강을 따라서는 저 아래 바다까지 닿는다. 평야라 부를 정도로 넓은 땅이나, 사방은 산으로 막혀 바깥바람이 함부로 들지 못한다. 퇴적평야의 기름진 흙과 함께 분지지형 특유의 매서운 겨울은 병충해를 예방하고, 뜨거운 여름의 태양은 곡식을 여물게 한다. 농사와 살림에 더없이 좋은 땅이다.
오늘 난 상주로 가고 있다.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장호원을 지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길 옆으로는 표정 없는 무채색 건물 천지다. 도회지를 따라 난 길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갑작스럽게 풍경이 변한다. 충주를 넘어 괴산과 보은을 거치는 길은 이전과 달랐다. 아주 짧은 구간을 제외하곤 온통 푸른 빛이다. 뜨거운 여름을 버텨낸 나무와 이파리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초록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스치는 바람에 청량감이 더하니, 달리는 내내 한가롭지 않았다.
길 위에서는 이렇게 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내 가슴은 조용히 설레어 간다.
대원군의 서릿발에도 살아남은 옥동서원, 그리고 황희
조선 초기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1363~1452)는 세종대왕의 이상을 현실에서 풀어낸 인물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향년 89세인 것도 놀랍지만, 그 3년 전까지 현직에 있었단 사실이 더욱 놀랍다. 거듭된 사직 주청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상적인 유교 군주였고, 그 세종이 보기에 황희 역시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을 도와 평생을 나라에 바친 인물이었다.
충북 보은을 지나 서남쪽 방향에서 상주로 들어갔다. 그 길 옆에 우연히 마주친 옥동서원은 황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앞으로는 너른 들을, 뒤로는 야트막한 구릉을 병풍처럼 거느린 곳에 자리했다.
중문 개념의 2층짜리 청월루를 고개 숙여 통과하니 작은 마당이 나온다. 마당을 사이로 정면 축대 위로 강당인 온휘당이 보였다. 정면 다섯 칸으로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가운데 세 칸은 강학 공간으로, 좌우 한 칸씩은 거주 공간이다. 칸 수는 적지 않으나, 다정함을 잃지 않는 스케일이다. 단청 없이 고색 그대로인 나무 부재들도 서로 어울려 조화로우니, 보는 내내 맘이 푸근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수백 년 된 건축물이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어딘지 시골 외갓집 대청마루 같은 곳에 걸터앉았다. 마당과 누마루, 그 너머 먼 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보통의 서원(향교도 동일하다)이라면 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가 이곳엔 없다. 기숙사가 없다는 의미다. 선현을 기리는 제사와 후학 교육이라는 서원의 기능 중 전자에만 충실한 구성이다. 이 지역 유림들의 집합소 역할에 치중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향촌에 대한 통제와 기득권 강화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이런 흐름은, 그들 선학들이 그토록 비난하던 고려 말 불교 사원의 폐단을 닮아갔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기득권 세력의 향촌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해 버렸다.
건너편 청월루로 발길을 옮겼다. 출입 금지 표시가 없어, 마루까지 올라본다. 병산서원 앞 깎아지른 절벽이나 도산서원 앞 넉넉한 낙동강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산 그림자 아래까지 이어진 논과 밭의 풍경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라보는 이가 기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바싹 말라 마치 혈관까지 보이는 듯한 기둥에 손바닥을 대고 얼러본다. 강렬한 햇빛에 달궈져 역시 뜨거울 법도 한데, 그냥 따뜻하고 부담스럽지 않다. 마루 바닥 역시 딱딱한 나무의 감촉일진대, 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듯한 푹신함이 느껴진다. 긴 세월 동안을 살아온 이들과 함께 있는 듯한 착각에 나도 길게 앉아 있었다.
이곳 언저리에는 포도농사를 많이 짓는 모양이다. 다시 오른 오토바이를 향해 덤비는 바람 끝에 시큰달큰한 포도향이 느껴진다.
보물이 많은 절 노음산 남장사, 하지만.
보은에서 연결된 25번 국도가 거의 상주에 닿았다. 길 왼편으로 노음산이 솟아 있고, 그 기슭에 남장사가 있었다. 진입로가 생각보다 거칠고 경사도가 급하다. 오토바이를 끌고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여행길에도 절 하나쯤은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멈추지 않고 오른다. 주변 환경에 대응하느라 신경은 곤두서고 몸의 근육들이 경직됐다. 겨우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울 수 있었다.
몇 층인지 모를 화려한 공포를 이고 있는 보광전에서, 이곳이 예사로운 절은 아님을 직감하게 한다. 산속 절집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전각들이 배치돼 있다. 보광전 앞 야자수는 이국적인 정취마저 불러일으켰다. 이 절에는 철제 비로자나불, 관음전 목각탱, 영산회 괘불, 감로왕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목조관음보살좌상까지 총 6개의 국가지정 보물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점심을 넘긴 폭염은 제 세상 만난 듯했고, 숲은 나무들이 뿜어내는 습기로 가득했다. 목에서 얼굴까지 드러난 맨살을 향해 날파리까지 극성으로 달려들었다. 맑은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그 많다는 보물을 단 하나도 제대로 친견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절이 이렇게 불친절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는 길에 내가 무슨 나쁜 업이라도 지었나 하는 푸념이 흘렀다. 그래도 다시 와 볼 핑계가 생겼으니 나쁘지 않았다.
태평성대경상감영공원에서 느끼는 우리네 옛 모습들
산을 벗어난 오토바이는 곧 상주 시내로 들어섰다. 가는 길목마다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빙 두른 산 아래까지는 멀었다. 그 사이엔 작은 언덕조차 없으니, 보는 시야가 밝아진다. 산들은 그 치맛자락 끝에서 연초록 들판을 진초록 숲으로 칼 같이 잘라내고 있었다.
이래저래 나라 하나는 거뜬히 세우고도 남을 곳이다. 그래서인지 경상도의 '상'은 상주의 '상'이다. 조선시대, 상주는 꽤 오랫동안 경상도 전체를 관장하는 감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 상주 시내에는 그 모습을 재현한 '태평성대 경상감영' 복원 단지가 있다. 최대한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했다고 하니, 조선시대 관청 분위기가 궁금한 사람에게는 좋은 장소가 될 것 같다. 다만, 지금의 자리는 옛 감영터가 아니다. 원래 감영은 상주읍성 안쪽에 있는 지금의 왕산역사공원에 있었다. 읍성 또한 1912년 일제에 의해 모두 헐렸다.
전(傳)사벌왕릉에 얽힌 견훤과 상주땅
지금의 지형이 옛날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그 지형을 배경으로 일찍부터 이곳에는 작은 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삼한시대라 불리는 그때, 진한의 소국이었다는 사벌국이 그렇다. 그러나 그 위치가 문제였다. 만약 백제나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하면 신라는 목줄을 잡히게 되는 셈이었다. 신라는 사벌국에 그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을 것이다. 사벌국 또한 이를 견제해야 했기에 백제와 손을 잡기에 이른다. 허나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신라는 즉시 군사작전을 개시하여 사벌국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정말 질긴가 보다. 대를 이어 전해진 기억은 수백 년 뒤 되살아난다.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박언창이란 신라 왕족이, 그 기억에 덧대어 스스로 사벌국왕을 칭하게 된다. 물론 그 역사는 한순간이었고, 그와 같이 사람들의 기억에 기대어 백제를 다시 일으킨 견훤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박언창의 무덤이 전(傳)사벌왕릉이란 이름으로 상주에 남아 있다.
박언창의 후손인 성산 박 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길가의 무덤은 한숨 죽은 햇살을 받아 따스하게 빛났다. 그런데 바로 옆의 화달리 삼층석탑을 보니, 원래 이곳이 절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무덤이 먼저 있었다면, 굳이 당시 신앙의 정점인 절을 무덤 바로 옆에 세웠을 리 없다. 오히려 절이 폐허가 된 후에 무덤이 들어선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탑이 하대 신라 양식인 것을 감안하면, 무덤 역시 그 이후에 조성되었을 터, 결국 이곳은 고대의 사벌국 왕릉이 아닐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후삼국 쟁투과정에서도 상주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백제, 고려, 신라 세 나라의 들어선 모양새가 삼국시대와 다르지 않았기에 상주는 여전히 중요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백제 견훤의 출신지였으며, 그 아버지 아자개가 그 땅의 지배자였다. 견훤은 신라와 한반도 중북부를 동시에 노릴 수 있는 상주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아자개는 끝내 아들 손을 잡지 않았다. 종국엔 왕건에게 그 땅을 들어 귀부해 버리기까지 했다. 팽팽하던 백제-고려 사이의 균형은 깨졌고, 자기 아들에게도 배신당한 견훤은 자기가 이룩한 나라를 스스로 망하게 했다.
살기 좋은 땅의 비극. 전(傳)고령가야태조왕릉
여름 해가 긴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더위에 지친 몸은 이제 멈추길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남은 해가 못내 아쉬워 한 곳만 더를 외쳤다. 다행히 오토바이는 지치지 않은 것 같았다.
전(傳)고령가야태조왕릉은 상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함창읍 증촌리에 있다. 상주 시내에서도 한참을 북쪽으로 가다 문경과 맞닿은 곳이다. 이곳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 6국 중 하나인 고령가야가 있었다는 문헌기록은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가야 본거지와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 물론 낙동강 수계를 통해 가야 지역 중심부와 연결은 가능하나, 그것뿐이다. 문헌의 기록 역시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 최근의 지배적 견해이다. 다만, 왕과 왕비릉이 수려한 고분의 형태를 띠고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옛이야기 모두를 가볍게 볼 수 없도록 만든다.
전략적 요충지라는 말이 있다. 그곳을 선점한 세력이 지리적, 정치적으로 아주 유리한 위치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상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고대를 통해 계속됐다.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농사짓기 참 좋았을 이곳이나, 스스로 서지 못하고 남에게 뺏긴 순간부터 삶은 참 힘들어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어떤 재난도 전쟁도 피할 이상향을 '십승지'라 하며 사람들은 갈구했다. 그 십승지 중 어느 곳도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아직도 들판은 넉넉했다. 저 멀리 고갯마루가 보였다. 저곳을 넘으면 상주 땅을 벗어나게 된다. 오늘 하루 역시 참으로 넉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