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마저 익산에서 무왕의 꿈을 쫓는 여행기 -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
길 위에서 잊혀진 왕국의 꿈과 넉넉한 들판의 옛이야기를 만납니다.
저무는 해를 등지고 달리는 길 끝에서,
가을은 특유의 쓸쓸하고도 우아한 빛으로 나를 물들입니다.
대왕의 꿈, 금마저로 가는 길
국도 1호선은 익산을 가로질렀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나, 지금은 느린 길이다. 그래도 국도만을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에게는 여전히 가장 빠른 길이다. 백제 무왕, 서동의 땅이었던 금마저 익산으로 가는 길은, 전륜왕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처럼 멀리서 아득했고, 나는 그 꿈을 좇아 천천히 달렸다.
천오백 년을 버텨온 돌, 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산 아래, 722번 지방도로변 옛 절터에는 백제 석탑 한 기가 남아 있다. 신라, 후백제, 고려, 조선왕조를 거치며 폐허가 된 그 너른 터를 홀로 지켜왔을 탑이다. 무왕의 모든 꿈이 땅 속으로 사라져 갔어도, 탑은 지금껏 살아내었다. 대왕의 꿈을, 자로 잰 듯 짜 맞춰 쌓아 올린 돌로써 또렷이 증명해 내었다. 무려 천오백 년이 넘은 세월이었다.
근 20 년에 걸친 정비복원을 끝내고 2018년 일반에 공개된 후 처음 찾는 길이다. 늘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보기가 참 어려운 것이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절터 주변은 옛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점심으로 점찍어 둔 청국장 파는 집은 흔적이 없었다. 도로와 주차장은 넓게 확장돼 있었고, 내 기억은 그만큼 작아져 있었다. 사라진 식당은 아쉬웠으나,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는 의미이니 잘 된 일이다.
국립익산박물관을 먼저 둘러본 뒤, 탑을 친견하러 잰걸음을 옮겼다. 이미 훼손된 곳과 온전히 복원된 곳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비쳤다. 안타까움과 함께 왠지 모를 억울함이 솟아났다. 우리 역사에 수없이 반복된 그런 장면들이 중첩돼 떠오른다. 외세의 침탈은 빈번했고,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모질게 대한 세월도 길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고, 또 이렇게라도 살려내 준 사람들이, 그리고 이렇게 찾아와 나보다 더 아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그들을 방해하기 싫어, 조용히 탑을 돌며 천 년이 넘은 세상의 기원(祈願)에 내 작은 조각 하나를 더했다.
무엇이라 표현하면 좋을까. 탑을 보는 마음속에 켜켜이 감정이 밀려온다. 쌓인 돌 하나하나에 천 오백 년 전, 무쇠로 돌을 쪼는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는 듯하다. 지금도 손을 대면 그때의 쩌렁쩌렁한 정소리가 느껴질 듯하다. 어떻게 이리 만들 생각을 했을까. 무엇으로 저리 쌓을 수 있었을까. 권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재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부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어도 이렇게까지는 힘들었을 것 같다. 무왕은 바로 그 무한함을 얻고자 돌로 부처를 쌓았고,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이라는 꿈을 이루려 했을 것이다. 비록 그 꿈은 이제 절과 함께 묻혀있으나, 그 흔적은 오늘도 이렇게 남아 있다.
왕궁일까, 절터일까? 대왕이 품은 꿈의 길을 걷다.
언제 다시 볼까 하여 몇 번인가를 뒤돌아 본다. 탑의 시간은 길어도 내 시간은 짧아,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시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갑자기 길 왼편으로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눈앞의 낮고 긴 언덕은 곡선으로 부드럽게 흘렀고, 산뜻한 초록 풀밭이 그 부드러움을 타 넘고 있었다. 초록은 연하고 진한 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마치 스위스의 여름 풍경 한 장면을 그대로 떼어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옛 왕궁의 후원 영역임을 곧 짐작했으나, 생각지 못한 싱그러운 광경에 잠시 속도를 늦추며 달렸다. 우선은 인근 제석사지를 가야 하기에 멈출 수는 없었다. 눈의 망막에서 머릿속으로 파란색 전기 신호가 퍼지는 듯했다.
제석사지는 왕궁리사지 바로 지근에 있다. 옛 왕궁에서도 이곳이 보이고, 이곳에서도 옛 왕궁이 보인다. 절터의 모습은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동쪽으로 좀 더 발굴되어, 정비 영역이 넓어진 것 같았다. 장대석 등 한데 모아둔 출토 유물의 모습에서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괴되지 않는 이상, 자연적인 풍화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돌들은 제 용처를 다하고도 저리 남았다. 앞으로 다시 천 년이 흘러도 남아 있을 것이고, 그 누군가는 또 이렇게 바라볼 것이다.
제석사는 백제 당시, 꽤나 비중 있는 사찰이었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탑과 불사리에 관한 기록이 옆 나라 일본에 남은 오래된 책(관세음응험기)에도 적혀있다. 무왕 시절, 사라졌던 제석사의 불사리가 대왕의 기원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고, 프로파간다였을 것이다. 그만큼 무왕은 절실했고, 민중은 부처님에게 의지했다. 그가 천도하고자 했던 금마저 익산은, 대왕의 꿈을 이루어 줄 무대이자, 그의 고향이었다.
인근 폐자재 매립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소조상 파편들은 아직도 그 섬세함과 입체감을 잃지 않고 있다. 단언할 순 없으나, 절 터 중앙의 목탑 내부를 장엄하던 조각상들이었을 것이다. 일본 호류지에 방문했을 때 오중탑 안에 장엄된 다채로운 모습의 소조상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워낙 인상 깊었기에, 그 연원이 어디일지 궁금했었다. 파편을 본 뒤, 제석사의 소조상이 바로 그 원형이 아닐까 하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호류지 오중탑은 백제의 손길이 강하게 닿은 건축물이다. 내 추측이 아주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너른 터 위에 목탑과 금당, 강당을 일렬로 두고 둘레에 회랑을 둔 전형적인 백제양식이다. 지금은 옛 자리에 높은 둔덕을 놓아 당시 건물 배치를 짐작케 하고 있다. 잔디는 맑은 햇빛을 받아 따뜻하게 빛나고, 드문드문 서 있는 키다리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저녁 빛에 한가로이 쉬는 중년의 농부가 떠올랐다. 나도 그들을 닮아 오래도록 푸를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제 왕궁리사지로 간다.
스위스 풍경을 닮은 왕궁리사지 후원 영역 중심은 공방과 대규모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오늘날과 유사한 정화장치가 구비된 곳이었다고 하고, 인간 생활의 오래된 흔적까지 남아 있다고 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것들을 통해 그간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왕궁도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고, 내 사진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절터의 얼굴은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고려의 것인지는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왕궁리사지에는 무척이나 많은 역사의 층위가 깔려 있다. 왕궁이었기에 왕궁리라 했고, 그 위에 또 절이 있고 불탑이 있어 왕궁리사지라 했다. 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의 그 중간 어디 매인 듯하다. 절 터 높은 곳에서 고고하고, 짜인 부재는 단단했다. 올라간 모습은 육중하면서 부드러웠다. 절터는 본디 무왕의 궁성이었고, 의자왕 때나 그 이후 절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자왕 때라면 백제의 탑일 터이다. 그 후라면 아직 무왕의 꿈을 기억하던, 바로 이 땅 위에 뿌리 박혀 살던 아무개 씨들의 집단 염원이었을 것이다.
석탑 뒤로 왕궁의 일부로서 조성된 계단식 건물지와 초석들이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언덕 위로는 후원 영역을 감고 도는 세모꼴 도랑까지 복원했다. 비싸게 수입했을 괴이한 모양의 조경석도 제자리를 찾아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고대 궁궐과 후원의 모습을 이리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은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안다. 신라 천 년 궁궐지인 월성 유적도 이에 미치지는 못한다. 미륵사와 궁궐, 제석사로 이어지는 삼각 동선상의 그것들은 당대 최고 기술의 집약체였다. 미륵사의 규모, 세 개의 별원이 병립하고 있는 독창적인 가람배치와 선구적인 석탑의 건축, 왕궁의 정연한 계획성과 후원의 경영, 제석사의 정통성과 믿음의 고취로 무왕은 그 꿈을 만백성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이 가자고 했을 것이다. 제석사지에서 바라본 왕궁리사지의 옆모습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으나, 이미 시간은 멀리 흐르고 있었다. 그의 익산으로의 공식 천도를 보여주는 역사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미완의 꿈, 그리고 그를 품고 있는 땅 익산
당초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은 왕궁리사지 서북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밝은 눈이면 서로 그 언저리가 보일 거리다. 그중 한 기는 발굴된 인골의 분석을 통해 무왕 당신의 무덤임을 확정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규모나 들어간 공력을 볼 때 대왕급의 무덤임은 확실하다 했다.
왕릉의 조성은 살아생전부터 시작하는 것이 고대의 풍습이었다. 무왕은 익산 경영을 시작할 때부터 그의 무덤 자리를 정해뒀을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사비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금마저 익산, 바로 이 땅 위에 미륵의 용화세계를 실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세월에 흩어지고 도굴되어 사라진 수많은 무덤 속 인물들에 비해, 그는 인골로까지 남아서 그 의지를 전하고 있다.
이미 해 질 녘이 가까워 빛은 누그러지고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차 한 대 세워진 좁은 주차장이 쓸쓸한데, 일가족인 듯 한 무리가 서로를 찍어주며 소요하고 있었다. 분명 주변 온도는 그렇지 않았으나 자못 한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지는 해와 함께, 그의 꿈을 내 나름대로 끌어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당대 현실 정치가 어떻게 펼쳐지고 어떻게 파국을 맞았는지 역사는 침묵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이리 생생히 살아 있는 증거에도 그 전말을 온전히 알긴 어렵다. 그의 좌절이 인간에 의한 것이었는지, 시대에 의한 것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떻게 사람이 한평생 꿈을 꾸며, 어떻게 그 꿈을 이루려 노력해 갔던 것인지 새삼 그려볼 뿐이다.
여기서 평생을 지낸들 대왕의 꿈이 이 땅 위에 다시 펼쳐질 일이야 없건만, 이대로 떠나기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일정을 변경해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한다. 도심의 불빛이 가끔 창문을 넘었고, 나는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두근거림에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무왕이 세상을 뜬 지 19년 후 백제는 사비에서 망했고, 아들인 의자왕은 당나라 북망산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