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오는 날 종묘에서 만나는 옛 이야기들 -
죽은 이들을 위한 궁궐, 종묘에 가다.
조선의 으뜸 되는 궁궐인 경복궁은 광화문 앞 넓은 월대에서 시작한다. 2층의 광화문을 지나, 중심인 근정전까지 높아지는 건물에 맞춰 시선은 점점 올라간다. 그 시대, 그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다. 이렇듯 살아있는 임금이 사는 궁궐은 드러내고 보여줌으로써 그 위엄을 드러냈다.
종묘는 큰 길에 면해 있으면서도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길에서 조금 더 들어간 숲 속에 있다. 숲은 아직도 울창해, 바로 앞에서 봐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 시대, 가장 번화했을 도성 안에서 수백 년 보존된 숲이다. 이렇듯 죽은 임금이 사는 궁궐 종묘는, 가리고 밀어냄으로써 그 위엄을 갖추고 신비로움을 더했다.
죽었다 살아난 장마로 인해 며칠간 비가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부 지역은 폭우로 인해 그 피해가 큰 모양이다. 적어도 수십 년 이상, 자연재해와 무관한 동네에 살면서도 이런 비가 내리면 무서워진다. 몸속에서 샘솟는 본능적인 공포감이다. 새벽녘 굵은 빗줄기 소리와 함께 '쾅' 하는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더 이상 잘 수 없었다.
날이 밝자 빗소리가 잠잠해졌다. 하지만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는 계속될 모양이다. 이미 깨어버린 토요일 아침이다. 갑자기 종묘에 가고 싶어졌다. 정전 회랑 긴 처마 밑에서 쏟아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곳이라면 공포심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무서워하긴 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 비, 별똥별을 좋아한다.
집을 나선 지 40여 분 만에 종묘 앞에 도착했다. 바로 들지 않고 맞은편 세운상가 쪽으로 건너갔다. 차가운 캔커피를 마시며 조금은 들뜬 마음을 식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건너편으로 서울 시내답지 않은 울창한 숲이 보인다. 입구인 종묘 외대문은 살짝 틀어진 진입로 덕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드러내지 않는 곳이다.
새 나라를 연,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한다. 자신이 머물 궁을 만들며, 동시에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종묘는 살아있는 임금의 죽은 선조를 모시는 곳이다. 나무로 만든 신주에 선조의 혼을 실어, 그 후손의 안녕을 비는 곳이다. 산 임금의 궁궐보다 어쩌면 더 엄중한 곳일 수도 있다. 궁궐에선 그래도 현실의 삶이 있지만, 종묘에는 그런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배제했다. 그리고 의식(儀式)만을 남겼다.
지도로 보면, 경복궁 뒤 북악산과 연결된 왼쪽 산줄기 끝, 그 기운이 가장 응집된 곳에 종묘가 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보면 바깥쪽에 해당하나, 한양의 동쪽 경계인 낙산까지 두고 보면, 또 다른 한양의 중심지였다. 종묘의 자리여야 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태조의 아들 태종은 그 산줄기 한쪽 어깨에 기대어 창덕궁을 세웠다. 이젠 종묘에 든, 아버지 태조를 그렇게라도 해서 매일 보고 싶어한 것 같다.
경내 동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망묘루에 이른다. 종묘로 행차한 임금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연못과 숲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작은 누각까지 올렸다. 하지만, 실제 임금이 머문 적은 그리 없다고 했다. 제사를 지내러 온 왕이 잠시라도 마음을 풀어버리는 것은 이미 교조화된 유교 국가 조선에선 칭찬받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 임금의 자리는 그리 한가로운 자리가 아니었다.
종묘의 건축과 공간배치가 내게 들려주는 것들.
단 한 곳, 망묘루를 제외하고 종묘의 모든 전각은 단순하고, 엄격하며, 장중하고, 직선적이다. 오로지 역대 임금과 그 시대만을 상기하도록 유도한다. 대부분의 장식적 요소들은 쓰이지 않았다. 그 기법의 단순함이 극단에 달해, 어느 하나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듯 보인다. 나무와 나무들은 단단하게 맞물려 있고, 지붕 위 기와 역시 한 치 흐트러짐이 없다.
망묘루가 포함된 향대청의 긴 벽을 지나서 만나는 건물은 재궁으로, 정전의 바로 동쪽 바깥이다. 제사를 위해 정전에 들기 직전, 임금과 세자가 몸가짐을 바로하며 기다리던 곳이다. 임금은 제관이 이끌어야만 정전의 동쪽 문으로 들어 그 선조들을 뵐 수 있었다. 임금이라 해도 이곳에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할 뿐이었다.
길은 재궁 앞에서 크게 꺾여 정전의 남문과 그 옆의 영녕전으로 연결된다. 우선 영녕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영녕전엔 태조의 4대조와 함께, 정전에 남지 못한 11명의 왕(추존 포함)과 황태자 1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높고 넓은 2층의 월대 위에, 총 16칸의 신실(신주를 모신 방)로 구성된 건물을 올렸다. 태조의 4대조를 가운데 4칸에 모시고, 지붕을 좌우보다 높게 올렸다. 대부분의 구조와 배치는 정전과 거의 동일하나 디테일에서 조금씩은 다르다. 우선 규모 자체가 작고, 정전에 있는 칠사당과 같은 요소가 없다. 충분히 의도한 바일 것이고, 딱 의도한 만큼의 느낌을 받는다.
비가 잠시 멈췄다. 월대를 끝에서 끝까지 걸어본다. 주로 화강암으로 보이는 넓은 박석들이 깔려있다. 다듬지 않은 듯 다듬어진 그 박석들로 인해 발걸음은 저절로 신중해진다. 하지만 모가 나진 않아, 걷는 이를 곤혹스럽게 하진 않는다. 시골집 마당을 걷듯, 한가로이 거니니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비가 다시 내린다.
이제 정전으로 갈 시간이다.
태조를 포함, 총 19명 왕의 신주가 모셔진 정전 건물의 끝에서 끝까지는100미터가 넘는다. 처음부터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역사가 더해지며 좌우가 넓어졌다. 처음 종묘를 세울 때 현 임금 기준 4대조까지 모셨으나, 불천위(4대가 넘었지만 정전에 계속 모시는 것)가 생기면서 증축에 증축을 더한 결과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서 있고, 지금 나는 그 완성체를 보고 있다.
영녕전과 달리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지붕선이 마치 지평선처럼 뻗어있다. 월대 정면에 서니, 시선을 좌우로 돌려야 보기 편하다. 정전 아래 계단으로 이어진 검은색 신도로 인해 이미지는 집중과 확산을 반복하고, 고르게 혹은 어지러이 깔린 월대의 박석 또한 일정한 질서를 갖춰 집중과 확산을 이끈다. 산자의 마음은 정전으로 당기고, 죽은 자의 보살핌은 세상으로 퍼지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했다. 천지간에 밝혀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그 시대, 명부에 있을 조상의 혼에 현실을 기원하는 것을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종묘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요소가 월대 위에 깔린 박석이었다. 조금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덩어리로 바닥을 조성했는데, 정전과 가까운 곳과 월대 중심부의 박석은 사각형으로, 박석과 박석 사이를 좁혀 정연하게 배치했다. 반면 월대의 앞으로 갈수록, 좌우로 퍼질수록 박석의 모양은 다양해지고 그 간격도 조금은 넓게 해,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느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비가 올 때 정전과 가까운 곳과 월대의 중심부에서는 물을 빠르게 흐르게 함으로써 배수에 용이하게 하되, 가장자리에서는 그 속도를 줄여 월대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원래 불천위는 그 덕이 높고 공이 많은 왕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천위로 모신 왕 중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질 인물도 있다. 모셔질 당시의 정치 지형도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파의 이익에 얽힌 왕을 불천위로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 순종, 고종, 철종, 헌종, 문조(효명세자)는 이제 더 이상 들어설 왕이 없기에 영원히 정전에 남게 되었다. 지금의 제사는 조선 왕가의 후손인 전주 이씨 문중을 중심으로 거행하고 있다.
비가 다시 거세어졌다. 내리는 비 속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월대는 충분히 넓었고, 계단은 정연했으며, 열주를 이룬 기둥은 그 하나하나가 수백 년의 세월을 이고도 남았다. 목재를 감싸는 주칠 빛은 강렬했고, 지붕을 덮은 기와의 검은색은 심연처럼 깊었다. 건물 자체도 굵은 기둥과 경사도 높은 지붕이 어우러져 크고 육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위압감이 들지 않는다. 엄중함과 장중함은 충분했고, 마치 종묘제례악을 형상화해 놓은 듯한 운율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리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내가 너무 이런 모습에 익숙한 탓일까? 아니다. 종묘 같은 건축물이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일까?
2층 월대 위 정전은 충분히 위압적일 정도로 높다. 하지만, 그 앞의 드넓은 월대가 그 위압감을 의도적으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보는 시야가 편해진다. 또 옆으로 긴 배치는 건물의 높이가 갖는 상승감을 상쇄시킨다.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덕분에 화려함에서 느껴지는 피곤함을 처음부터 없게 했다. 주변 울창한 숲이 드리운 어둠은 긴 회랑으로 차단하고, 하늘은 열어두었다. 덕분에 마치 새가 둥지에 든 듯, 안락함까지 느끼게 한다. 임금은 정전에 들 때 넉넉한 조상의 품에 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조상의 품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처마 밑에서 쏟아지는 비를 본다. 정전 지붕에도 비가 쏟아지고, 월대에 내리는 빗방울은 바닥에 닿아 다시 튀어 오르며 춤을 춘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화면엔 세로줄이 가득하나 마음은 깊은 향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씨들 속의 왕 씨. 공민왕신당이 던지는 질문
실은 종묘에 들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다. 공민왕을 기리는 신당(공민왕신당)은 입구에서 가까운 곳, 임금의 망중한을 위한 건물인 망묘루 바로 옆에 붙어있다. 사방 한 칸씩의 작은 건물은 맞배지붕을 얹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망묘루에 딸린 부속건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 안 정면으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그림이 걸려 있고, 왼쪽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는 그림이 걸려 있다.
혼란스러웠다. 조선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역성혁명의 왕조다. 이성계는 왕이 된 후,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 인물이다. 공민왕의 아들과 손자를 왕씨가 아닌 신씨로 바꾸면서까지 왕이 된 그였다. 그런 왕조에서, 더구나 선조 제사를 위한 종묘 한켠에 공민왕을 위한 사당을 두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종묘를 세울 때 어디선가 공민왕의 그림이 날아와, 바로 그곳에 세웠다는 것이 공민왕신당이다.
그것뿐, 실제 그 연원과 관련한 어떤 질문에도 답은 없다.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신당은 서 있다.
이성계는 전조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평생을 공민왕과 백성을 위해 전쟁터를 누빈 영웅이었다. 공민왕 시절 그는 왕과 왕조의 충신이었다. 현실 권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으나, 마음 한쪽에는 역신으로서의 번민과 죄스러움 또한 있었을지 모른다. 공민왕신당은 그가 가진 속죄의 마음을 대변한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종묘에 둘 일인가 하는 의문은 어쩔 수 없다.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조선 왕조는 공민왕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첫 임금이 고려 왕가에 저지른 죄악이 너무 커서, 혹 그 귀신들에게 화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대대로 전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런 귀신들에게 공민왕을 인질로 잡아두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 왕조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애정과 미움과 증오와 찬탄을 오고 가긴 하지만, 이성계가 왕씨들에게 한 일 그 자체는 그닥 유쾌하지 않다. 역사상에는 정말이지 수많은 명멸이 오고가지만, 그 하나하나에 따라 마음이 달리 쓰여지는 것은 아직 내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시간 남짓 발걸음을 끝으로 다시 산 자들의 세계로 돌아왔다. 종묘 앞 금천 너머 큰길에는 사람과 차들이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고, 비는 어느덧 잦아들었다. 다음 주에 해야할 일들이 시간차로 스쳐간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좀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