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 오토바이를 타고 간 강화도 여행 이야기 -

by 도시백수

고려, 조선 두 왕조와 강화도


고려와 조선은 중국식 묘호 체계를 따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왕조에는 같은 묘호를 가진 왕들이 제법 있다. 고려에도 고종이 있었고, 조선에도 고종이 있었다. 고려 고종 왕휘는 평생을 최 씨 무가에 눌려 왕노릇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종국엔 무가를 물리치고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고려라는 국체는 보존하였다. 조선의 고종 이형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덕에 전제군주로서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러나 종국엔 조선을 제국주의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조선이라는 국체를 그 아들대에서 영원히 잃게 하였다. 두 왕의 능호는 한자까지 똑같은 홍릉(洪陵)이다. 정확하게는 조선 고종의 홍릉은 그의 능호가 아니라 왕비 명성황후의 능호다. 나라가 망한 터라 능호를 받을 수 없었다.

KakaoTalk_20230904_090330469.jpg?type=w773 [강화, 고려 고종이 잠든 홍릉.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과 그 이름이 같다.]

다행히 강화도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중랑천변 길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난 길을 가다 동작대교를 통해 남쪽 길로 바꿨다. 강서와 김포의 도심을 지나 강화대교를 통해 섬에 이른다. 물론, 오토바이를 타고 도심을 통과하는 것은 수많은 신호등과 차량 덕분에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여름의 해는 강렬했으나, 이른 시간인지라 강화에 들어서도 아직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 멀지 않은 이 길을 결국 오지 못했다. 청군이 파주에 이르던 그날 숭례문을 나와 강화로 가려했던 그는, 청군이 너무 가까이 있음에 그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을 되돌려 이번엔 동대문 근처 수구문으로 재차 도성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송파 나루를 거쳐 광주 남한산성에 들었다.


그가 이 길을 오지 못했던 것이 조선백성에게는 천행이었을지 모른다. 청군은 남한산성에 이끌려 충청, 전라, 경상 삼도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왕이 강화로 들어가 기약 없는 항전을 했다면, 조선은 대몽항쟁기처럼 저 남쪽 해남까지 청군에게 짓밟혔을 것이다. 삼남이 보존됨으로 아들과 손주 대에 조선은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려와 조선은 북방 이민족의 폭발적인 무력 투사력을 잘 알고 대비하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족 요나라, 여진족 금나라의 침략을 받고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조선 역시 국초 4군 6진의 개척과 정기적인 정별로 200여 년간 여진족을 제어해 왔었다. 하지만, 국초의 역동적 시간이 흐르고 고려는 무신정권의 혼란기에,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겪은 후, 각각 몽골과 후금이라는 북방 이민족의 강력한 침략을 받기에 이른다.


두 이민족 모두 말만 탈 줄 알아서, 해전에는 약하리라는 인식이 있었는지, 고려와 조선 왕조는 모두 강화도를 매력적인 피난처로 여긴 듯하다. 강화도는 몽고 침략 시 강도(江都)로 개발됐고, 방어를 위한 여러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져 나라의 명줄이 끊어질 때까지도 소홀히 취급되진 않았다. 그 흔적 중의 한 곳인 강화산성에는 동서남북 대문이 아직 남아 있다. 산성은 두 왕조가 연이어 쌓고 넓혔다. 첫 목적지인 교동도와 가장 가까운 서문(첨화루)에 잠시 들렀다. 성벽의 돌이 틈새 없이 이어져 단단했다. 신작로 길로 끊긴 건너편엔 돌로 된 아치형 수구도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날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강화도를 잠시 관통해 교동도로 이어진 다리를 건넌다.

KakaoTalk_20230904_090109168.jpg?type=w773 [강화산성 서문과, 내 오토바이 로얄앤필드 메테오 350]


교동향교 대성전 아래로는 영험하다는 약수가 흐른다.


교동도는 연산군이 위리안치당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반정으로 궐에서 쫓겨난 그는 이곳에서 몇 달 버티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어질고 어질었다던 중전을 찾으며 그는 죽었다. 중전이 어질었던 것을 알고, 그렇게 그리워한 이라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광인(狂人)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태종으로 시작해 세조를 거쳐 이어진 절대권력을, 그것도 왕과 중전 사이에 태어난 적장자로서 이어받았다. 조선 역사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정 후 왕권은 신권을 넘기가 무척 어려워졌고, 조선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그런 교동도에 우리 역사상 처음 세워졌다는(안내판 설명) 향교가 있다. 교동향교다. 그러나 교동라는 이름이 원래 향교에서 온 이름이다. 향교가 먼저다. 연원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올라간다.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자와 주자상을 가져와 봉안한 곳이라고 한다. 가파른 언덕을 경영해 건물을 올리고 배치했다. 개성의 만월대처럼 지형의 높낮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 건축의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akaoTalk_20230904_090158856.jpg?type=w773 [교동향교 대성전 앞마당]


향교의 명륜당엔 마당이 없었다. 동재와 서재는 일반 살림집처럼 생겼는데, 향교 건물과 배치가 정형화되기 이전의 모습인 것 같아 반갑고 친근하다. 돌담 밖으로는 만병통치약 수준의 약수가 졸졸 흐른다. 대성전 지하에서 용출하고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한 노파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물을 받고 있었다.

KakaoTalk_20230904_090223747.jpg?type=w773 [교동향교 명륜당. 지형 탓에 마당이 아주 좁고 동재와 서재는 살림집처럼 생겼다.]


교동섬에서 강화섬을 이어주는 다리 저쪽 먼 곳이 북녘인 것 같다. 달리는 와중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산이 무척 높아 보인다. 저 산줄기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재령산맥이라는 곳일까. 저곳 황해도에는 8각 13층 석탑으로 유명한 보현사가 있다는데, 가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예전에는 그런 날이 오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제는 내 생전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고려 고종의 홍릉과 또 다른 왕릉들


고려 23대 국왕 고종이 묻혀있는 강화 홍릉으로 오르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무거운 오토바이를 끌고 겨우겨우 길을 따라 올랐다. 이런 줄 알았으면 절대 이리 오르지 않았다. 풀숲만 우거진 야영장 부근에 겨우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한참을 가파른 경사를 또 올라야 했다.


고려 왕릉은 처음이다. 고분고총의 여성스러운 부드러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조선 왕릉의 엄정한 격식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성이 느껴진다. 봉분의 곡선은 같으나, 경사지의 축대나 석물은 거칠다. 마치 고려시대 석불이나 민불을 보는 것 같다.


그리워했으나 죽어서도 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의 삶이 느껴졌다. 아무리 시대 상황이 그러했다 한들 재위 46년의 왕이 누워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봉분이 있는 가장 윗단에 서는 순간, 만천하는 발 밑이었다.

KakaoTalk_20230904_090347786.jpg?type=w773 [강화, 고려 고종의 홍릉. 제왕의 무덤답게, 천하를 아래로 두고 있다.]


고종은 아버지가 강종(22대 국왕)이고 어머니가 원덕태후 유 씨였다. 어머니 원덕태후 유 씨의 무덤 역시 강화도에 있다. 곤릉이라 했다. 근처까지는 갔으나, 능을 보지도 못했고 오르는 들머리도 찾지 못했다.


19대 국왕 명종이 폐위되고 왕위에 오른 신종(20대 국왕)의 아들이 희종(21대 국왕)이었다.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강화와 교동을 전전하다 교동에서 죽었고, 강화에 묻혔다. 그의 능은 석릉이다. 석릉으로 이어진 산길 초입까지는 어찌어찌 갔으나 1.2km를 더 가야 하는 오솔길에 수풀이 우거져 있다.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이에 비해 가릉은 찾아가기도 편했고, 주변정리도 잘 돼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바로 위 능내리 석실고분이 볼 만했다.


고려 24대 국왕 원종은 몽골과의 강화교섭으로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을 때의 왕이다. 그의 비로서, 어린 나이에 돌아간 이가 순경태후로, 가릉은 그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원종 다음 대 충렬왕의 모후였다. 원 모양새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입구가 드러난 석실 위에 전혀 균형이 맞지 않은 봉분을 생뚱맞게 얹어 놓은 형상이다. 고려의 능은 아무리 봐도 개성이 넘치는 것 같다. 물론, 이제 겨우 두 번째 목격하는 고려의 능이나, 정말 심상찮다.

KakaoTalk_20230904_090447224.jpg?type=w773 [강화 가릉.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에 비해 가릉 바로 위쪽에 위치한 능내리 석실분의 모양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고분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지에 4~5단의 계단을 형성하고 각 단 마다 특징 있는 건축물을 배치했을 것이다.가장 윗 단에 난간석을 두른 봉분이 있다. 그리고 그 봉분 뒤 좌우로 석수 한 쌍이 놓여 있다. 강화에 있는 고려 고분 중에 가장 원형이 잘 갖춰져 남아 있는 것 같다. 누구의 무덤인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혹자는 지금의 가릉은 폐위된 희종의 비 성평왕후의 능이며, 능내리 석실분이 원래의 가릉이라 하기도 한다. 다만, 강화의 다른 능들보다 훨씬 능다운 점을 고려한다면, 혹 무가의 최정점이었던 최우의 무덤은 아니었을까하는 호기심 어린 추측을 해 본다. 가릉의 주인 순경태후는 최우의 외손녀였다.

KakaoTalk_20230904_090509098.jpg?type=w773 [강화 능내리 석실분. 완성도가 뛰어난 고분으로 최고 권력자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상상했다.]


거대한 침묵의 흐느낌이 묻어나는 곳, 광성보


도착하기 전엔 알지 못했는데, 예약한 숙소가 광성보 유적지 옆에 있었다. 광성보는 신미, 병인양요의 현장이다. 두 전화로 인한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은 감히 말하지 못할 정도이다. 광성돈대를 지나 당시 스러져 간 이름 없는 우리네 군관들의 무덤으로 발 길을 옮겼다. 날은 이미 지고 사위는 점점 더 깜깜해 갔으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는 천지개벽하듯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끊임없는 증폭음을 내며 요란했다. 아우성이라 생각하는 것조차 죄스럽다.

KakaoTalk_20230904_090611496.jpg?type=w773 [광성보 무명용사의 묘. 수많은 죽음이 몇 개의 봉분으로 정리된 모습에서 역사의 비애를 느낀다.]


길은 바다를 끼고 해안을 따라 좀 더 깊은 곳, 손돌목 돈대까지 이어진다.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였다. 특히 손돌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서 미군 측에서는 백키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 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 안내판

KakaoTalk_20230904_090636354.jpg?type=w773 [손돌목 돈대와 강화해협. 가장 치열했을 전투의 현장, 그곳에서 무거운 밤의 침묵을 견디고 있다.]


돈대 안으로 들어가 여장 하나하나, 총안 하나하나를 손으로 쓸었다. 복받쳐 오르는 그 무엇인가에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숙소에서는 밤새 창밖 풀벌레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나는 이 땅을 여행하는 것이 그리도 좋다. 하지만 오늘처럼 늘 무언가 가슴 한켠이 조이듯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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