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숙아 어떠냐

프롤로그 1화 정숙시점

프롤로그

처음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모른 체 웃고 있는 젊은 남자와 수줍게 고개를 숙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나의 부모였고, 지금보다 더 낯설고 어렸으며,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잘 몰랐던 시절이었겠지요.


부모님은 세 번 만난 끝에 결혼하셨다고 합니다.

그 모든 건 어른들끼리의 약속으로 정해졌고, 둘은 100일 뒤 혼례를 올렸습니다.

서로를 잘 몰랐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던 때였지만, 조심스레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나중에 왔다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용히 웃기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100일의 기록입니다.

정확한 사실도, 완전한 기억도 아닙니다.

다만 그 시절의 바람과 흙냄새, 말보다 마음이 앞서던 사람들의 사랑을 닮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이건 부모님의 이야기이자,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사랑이라는 오래된 약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화. 정숙아, 어떠냐

정숙 시점

“정숙아, 이리 와 봐라.”

뒤꼍에 나가던 나는 아버지의 부름에 고무신을 끌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헌 솜베개를 등받이 삼고 앉아 무릎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두고 계셨다.
햇살이 비껴드는 창문가, 그 아래 흑백사진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이 사람 좀 봐라.”

사진 속 남자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카메라를 향해 엷게 웃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곱상하게 생겼다’고 할까. 선한 눈매에,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인상이었다.

“누구세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옛날에 서울서 머물던 때 있지 않냐.
그때 큰 도움 받았던 친구가 있었어. 참 사람 좋은 친구였지.
며칠 전에 서울에 일 있어 올라갔다가, 그 친구가 자꾸 꿈에 나와서 찾아가 봤더니만… 벌써 세상 떠난 지 몇 해가 됐더구나.”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숨을 한 번 고르시더니 시선을 사진에 오래 머물렀다.

“그분이… 아버지한테 특별한 분이셨나 봐요.”

“그래. 참 정이 깊은 사람이었어.
내가 고생할 때 옆에 있어줬던 몇 안 되는 친구지.
그 사람하고 나하고, 젊었을 적에 그런 약속도 했었지.
자식 낳으면… 서로 사돈 맺자고.”

나는 얼떨떨한 채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말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저 옛 기억을 꺼내는 듯 흘러나왔다.

“그 아들이 바로 이 청년이다. 요즘 세상 같으면 참 반듯하다 할 만하지 않냐.”
“사진으로 봐선… 인상 참 좋으시네요.”
“서울에서 대학도 나왔다더라. 공무원 생활 한 지는 얼마 안 됐고.
무뚝뚝하긴 해도 성실하다더구나.”

말씀은 짧게 이어졌지만, 나는 그 끝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먼저 꺼내신 적은 드물었다.

“정숙아, 네 생각은 어떠냐.”

낮은 목소리로 건네신 마지막 한마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 본 적도 없는 사람. 사진 한 장, 이름도 생소한 남자.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그 친구의 그림자를 보고 있으니,
그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마당에선 닭이 날개를 푸드득이며 울타리 너머로 뛰었고,
부엌에선 어머니가 무쇠솥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내 대답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선 어머니의 입에서 ‘도련님’이란 말이 처음 흘러나왔다.

그게 바로, 1960년대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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