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시점
2화. 편지 한 장, 기차역 앞 풍경
편지는 연한 갈색 봉투에 담겨, 마루에 놓인 괴목 위에 조심스레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고이 펴서 내게 내밀며 말없이 미소를 지으셨고, 아버지는 잠깐. 헛기침을 하시곤 마당으로 나가셨다.
“정숙 아가씨께.
먼저 글을 드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버님께서 오래전 저의 부친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하여,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이 글을 씁니다.”
글씨는 단정했고, 맞춤법도 바르며, 과하지 않은 표현 속에 조심스러운 마음이 배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쓰는 편지지만, 어느 문장 하나 급하거나 가벼운 흔적은 없었다.
“조만간 직접 인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이라 긴장되지만, 아버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조심스레 찾아뵙겠습니다.”
짧고 예의 바른 문장이 끝나자, 나는 종이를 조심히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편지를 읽는 내내 어머니는 내 눈치를 살피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날 저녁 유난히 수염을 정성스레 밀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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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읍내 기차역 앞에선 먼지를 흩날리며 한 대의 열차가 도착했다.
낡은 역사는 붉은 벽돌로 되어 있었고, 역 이름이 선명한 나무 간판 아래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혹시… 김 병식 선생님 되십니까?”
아버지는 짙은 색 양복 상의 위에 바람막이 겸 옷자락을 덧입고, 손엔 오래된 가죽 가방을 들고 계셨다.
그 목소리에 돌아본 아버지 앞에 선 남자는, 사진보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긴장한 듯 서툴게 웃으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예. 맞습니다. 자네가 윤호인가?”
“예. 정윤호입니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잠깐 묵은 듯한 눈길을 주고받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서울 생활은 어떤가. 일은 할 만하고?”
“예.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기차역 앞에서 읍내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엔 이발소, 시계방, 그리고 다방 하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이내 다방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며 자리를 잡았다.
다방 안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가 조용히 깔려 있었다.
“정숙이 편지, 잘 읽었네.”
“예. 제 글이 혹여 불편하시진 않으셨는지…”
“글씨가 반듯하더군. 인사성도 밝고.”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잠시 탁자 위 유리잔을 매만지며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 집은 시골이라 조촐하지.
자네가 원하면, 한번 들르게.”
“예. 선생님, 꼭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그날 두 사람은 찻잔 하나에 이야기를 반쯤 담고, 남은 건 서로의 침묵 속에서 채웠다.
기차역 앞의 여름 햇살은 아직 눈부셨고, 작은 인연이 조심스럽게 실마리를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