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화

시골집의 첫 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4화. 시골집의 첫 밤

늦은 밤, 시골집에는 오랜 세월을 견딘 집만이 품을 수 있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늦도록 마루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도시에서의 일, 어린 시절 이야기, 그가 자라던 여수의 옛 풍경까지—
묘하게 셋 모두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워지자 우리는 각자의 이부자리로 향했다.
오래된 방에는 두 개의 이불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고
나는 언니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언니는 평소보다 훨씬 빨리 잠들었다.
아마 여행의 설렘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모양이었다.
그의 밝은 말투에 오랜만에 크게 웃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엔 희미한 달빛이 번지고,
창밖에서는 대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어딘가 규칙적으로 두근거리는 이 감정 때문에
한 시간 넘게 뒤척이고 말았다.

결국 나는 조용히 이불을 젖히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런데—
화장실 문을 닫고 나오자
바로 옆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둑한 공간에서
그가 조용히 서 있었다.

“아직… 안 자요?”
그가 낮게 물었다.
밤의 정적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응… 잠이 잘 안 와서.”
나는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내 손등을 살짝 스쳤다.
마치 허락을 기다리는 듯한, 정말 작은 접촉이었다.

“잠 안 오면… 잠깐 산책할래요?”
달빛이 비치는 그의 옆모습은
낮보다 훨씬 조용하고 솔직해 보였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잠이 안 와.”

그의 손이 내 손을 아주 가볍게 잡았다.
그냥 이끌기 위한 동작이었는지,
아니면… 밤이라는 시간을 의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 속에 풀냄새가 더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멀리서는 개 짖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 흐르고,
마을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둘이 걷기 시작하자
발밑에서 잔 돌들이 작은 소리를 냈다.

그는 나를 향해 살짝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 시간에 여기 걸어본 적… 거의 없어요.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같이 걸어보고 싶었어요.”

나는 순간,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떨렸다.
방 안에서 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을 텐데
나는 지금…
이 고요한 밤길을 그와 함께 걷고 있었다.

여수의 밤공기 속에서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5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7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