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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er Aug 08. 2020

내가 설 자리는 있을까?

영화 <지휘자를 위한 1분>

다큐멘터리 영화 <지휘자를 위한 1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뮤지컬 <엘리자벳>의 내용이 언급되지만,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




영화 <지휘자를 위한 1분>

우승할 경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될 기회를 얻는 지휘 경연.

전 세계에서 모여든 남녀노소 지휘자들.


설렘과 긴장감이 가득한 경연 지원자 대기실에서

대기하는 지원자들 앞으로 경연의 총감독이 나온다.

그리고 경연 시작을 선언한다.

이 경연에서 우승하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우승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훌륭하지 않은 지휘자란 것은 아닙니다.


각국에서 모인 지휘자들은 음악사, 음악 용어, 곡 해석 능력과 지휘 실력 등 다방면에 대해 엄격히 평가받는다.


경연이지만,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참가자들.

면접 같은 시험을 보고 나와서는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어떻게 대답했는지, 자신은 무엇을 틀렸는지 숨김없이 공유하기도 한다. 서로의 곡 해석 방식, 지휘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며 교류한다.


큰 강당을 채울 만큼  많던 사람들이

작은 버스 하나에 드문드문 앉을 정도로 줄어들고

본선 경연을 통해 수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더 줄어든다.


그들은 단지 "저 무대에 서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이라고 소망을 말한다.

곡 해석이 지휘자마다 달라, 같은 경연 곡이라도 느낌이 사뭇 다르다.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동료, 현실적인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서전을 읽어봤다.

그 작가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유명하길래.

사람들은 이 사람의 어떤 스타일에 끌리는가 하고.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 책에서 흥미롭고, 부러운 사고방식을 발견했다.


“소설가가 하나쯤 더 생겨도 소설 계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는 않아요.”


소설가들의 세계에서는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러나, 독자가 한 소설을 선택하면, 다른 소설을 읽을 시간이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경쟁을 하기는 한다'는 게 현실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루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경쟁을 해서 승자는 남고, 패자는 물러난다.

사실, 공연 오디션 자리가 아니라도 삶 속 어디에서나 그런 경쟁의 장이 열리고 있다.



배우, '여성인 내가 설 자리'에 대한 고민

미리 써두자면, 성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여자라는 성별이라서, 내가 배우를 꿈꿨던 때가 있어서. 그때 고민했던 '일자리'에 관한 생각을 공유해보려는 것이다.


자신이 관람했던 공연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그중에서 등장 여성과 남성 비율이 반반에 가깝거나 여성이 더 많이 등장하는 공연을 세어본다면 얼마나 될까?

연극과 뮤지컬을 꽤 많이 봤다는 사람들도 전체 관람 공연들 중 그 수를 세어본다면 아주 소수이지 않을까?

물론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공연 정말 많이 봤지만, 세어보니 조건에 맞는 공연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내가 공연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배우 지망생으로 만났던 사람들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일자리 수요로는 여성 비율이 더 크지만, 무대 위 배역남성 비율이 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다수의 대극장 공연이 주연 외엔 남성. 소극장 공연도 남성역할이 압도적으로 많다.


잘 알려진 작품들의 성비 구성이 그렇다 보니, 공연 동호회나 아카데미에서 돌고 도는 작품이 거의 고정적이다. 골고루 성비를 구성할 작품이 한정적이라 했던 작품을 수 번 반복해 올리거나, 원래 남성인 캐릭터를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키기도 한다.

이점 역시 경험이 있는 바, 남성이기에 살릴 수 있을 대사와 상황을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려야 할까 굉장히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무대에 서야만 돈을 벌 수 있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여성 배우들이 설 자리가 많아지기를 바랐다.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가는 좀 더 철학적인 문제이고, 나는 단지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을 바랐다.

‘일자리’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주인공이 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학시절, 친구와 새로 올라가는 뮤지컬 <엘리자벳>을 관람하러 가는 길에 나는 몹시 설렜다.

주인공이 여성 캐릭터 터니까,

적어도 그 사람 중심으로,

많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진행되겠지?

'일자리'에 관한 고민 해결의 예시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득했다.

하지만, 공연 관람 중 그리고 관람 후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제목도 엘리자벳, 주인공도 엘리자벳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이나 '루케니'만 뇌리에 박힌다.

하물며 대사 하나 없는 '죽음의 천사들'도 엘리자벳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게 된다.

아, 물론, 이들도 모두 남자 배역이었다. 아주 무거운 날개 장치를 드는 건장하고 멋진 남자 배우들.


그 공연을 본 뒤부터 생각의 방향성을 잡기 시작했다.

배우의 일자리 측면에서 봤을 때,

여자 주인공, 주체적인 여자 캐릭터의 등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유레카! 현실에서 찾아낸 사례들

뮤지컬 <엘리자벳>처럼, 기대감을 안고 갔다가 실망한 경우도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그리던’ 작품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굉장히 유행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 흥행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무대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던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먼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내가 관람했던 해에는 남성 창극 배우가 단 3명 등장했다.

전령과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트로이의 여인들과 헬레네, 메넬라오스
그렇다, 아름다운 여성 헬레네를 남자 배우가 연기한다. 위의 사진 속에서 정 가운데, 안겨있는 배우가 헬레네 역. 안고 있는 배우가 메넬라오스 역.
덧붙이자면, 위의 장면은 메넬라오스에게 안겨 있는 헬레네와 "저년이 화의 근원이다! 속지 말고 죽여라!"라며 분노하는 트로이의 여인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 배역 말고는 배역이 모두 여인들이다.

왕비, 카산드라, 헥토르의 아내와 자신의 조국과 가족들을 잃은 여인들.


커다란 대극장에 단출한 무대 구성 그리고 대형 뮤지컬에 비해서는 얼마 안 되는 수의 배우들이 공연을 이끌었지만, 무대에서부터 넘어오는 에너지가 굉장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주연 배우의 마이크에 문제가 생겨 완벽한 음향으로 관람한 공연이 아닌데도 '정말 훌륭했던 공연'이라고 기억에 남아 있다.


국립창극단은 창극을 시즌제로 운영하는 것 같아, 한 번 본 창극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해외에 초청까지 받았던 작품인 만큼,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다.


덧붙여서, 한 해동안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

그리고, 직접 관람한 게 아니지만 언론과 홍보를 통해 접하고 이색적 느낌에 감탄했던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물론 스카이캐슬의 경우, 주연 외에 비서 등의 조연, 자식 역할 등을 포함해서 본다면 '그다지 여성 배우들의 일자리와는 관련 없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 캐릭터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다.



응원합니다.

한 때 나와 함께 같은 고민과 꿈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여전히 공연산업의 길을 가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여성인 배우들이 설 자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그리고 바라본다.


어떤 역할이든지, 여배우들의 설자리도 충분한 작품을 보고 싶다.

누군가 그런 작품을 설계하고, 준비하고, 써 내려가고 있다면,

별것 없지만, 제 응원을 받아주세요! ^^



글감 이미지 출처

커버: picjumbo.com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영화 <지휘자를 위한 1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드라마 <스카이캐슬>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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