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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래희망은 목수입니다

인스턴트 가구와 곰팡이가 들려주는 생태 이야기

by 인사이트뱅크

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장래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게 다소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 내가 꿈꾸는 삶은 온전히 목수로 살아가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시작하며 취미로 목공 일을 붙잡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시골에 집을 짓고 살게 되면 누구나 어지간한 기술을 가진 초보 목수가 되기 마련이다. 도시에서는 으레 남의 손을 빌어 해결할 일들도 사람이 귀한 시골에서는 직접 해결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집 안 이곳저곳을 손보거나, 책장이며 다락 계단장 같은 크고 작은 가재도구를 만들던 손기술이 늘면서 점점 나무의 감촉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목공에 필요한 공구들도 하나둘 사 모으며 그렇게 나는 조용히 목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한동안은 주말마다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의 공방을 찾아 소목 장인에게 사사하며, 전통 가구를 만드는 전문적이고 섬세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목공에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집을 짓는 큰 나무를 다루는 대목과 가구나 소품을 주로 다루는 소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소목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1908년에 상량한 고택을 구입해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혼자서 집을 고쳐 짓는 ‘큰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120년 된 낡은 공간에 새 숨결을 불어넣던 시간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자, ‘겸직’이기는 하지만, 비로소 목수로 살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장마철 곰팡이가 말해주는 목재의 진실

은퇴 후 ‘전업 목수’를 꿈꾸며, 현재 ‘겸직 목수’로 살다 보니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가구를 대하는 느낌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고택의 기둥이며 들보, 서까래를 바라볼 때마다 사색에 빠지기도 한다. 촘촘한 나뭇결 사이사이마다 지나온 세월만큼의 깊은 서사가 숨 쉬는 듯하다. 무엇보다 이 목재들이 120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며칠 전 창고 문을 열어보니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악취의 근원을 찾아 여기저기 살펴보니 범인은 바로 잡동사니들의 수납 용도로 넣어둔 헌 책장이었다,

창고 공간에 노출된 기둥과 서까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유독 책장에만 하얗게 곰팡이가 앉았다. 여름철 장마가 지나면 집 안에 종종 곰팡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신발장이나 싱크대, 책장 등이 유독 곰팡이에 취약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MDF 소재로 만든 소위 ‘인스턴트 가구’라는 점이다.

MDF(Medium Density Fiberboard)는 잘게 분쇄한 목재 섬유에 접착제를 섞어 고온과 고압으로 눌러 만든 판재다. 마치 잡다한 부위의 분쇄육으로 햄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덕분에 비교적 가격도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판재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 겉에는 보통 나뭇결 무늬를 비롯해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필름을 붙이지만, 판재 자체에는 미세한 기공이 많아 습기를 빨아들이고, 한 번 들어온 수분은 잘 빠져나가지 않는 특성이 있다. 더구나 접착제 속 합성수지는 곰팡이의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윤기와 단단함을 더한 고재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인스턴트 가구 전성기

이즈음의 가구는 재료의 특성보다는 감각적인 디자인과 편리성, 가격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인 듯하다.

외국에서 들어온 마트형 생필품 매장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구 브랜드들은 대부분 MDF를 소재로 제품을 만들고 유통한다. 혼수로 장만한 가구를 몇 십 년 동안 쓰거나, 대물림하는 경우를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날의 가구는 어느 순간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생활재가 되었다. 마치 즉석식품처럼 빠르게 조립하고 해체할 수 있으며, 유행을 좇아 쉽게 바꿀 수 있는 소모품이 된 것이다. 인스턴트 가구는 중고로 유통이 되기도 하지만 재활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난 고재의 쓰임

고택을 손보며 생겨난 목재 부산물들은 나에게 또 다른 목공 재료가 되었다. 집의 구조를 고치며 빼낸 들보는 툇마루의 튼튼한 다리가 되었고, 먼지 쌓인 채 창고에 처박혀 있던 낡은 밥상은 부서진 부재들을 하나씩 다듬어 다시 끼워 맞춘 뒤 여러 차례 옻칠까지 하자 근사한 밥상으로 되살아났다. 단돈 몇 만 원으로 매끈한 새 제품을 들이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낡은 나무가 다시 숨을 얻어 되살아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손길을 보태는 일은 목공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다.


자연의 선물과 오래된 것의 가치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다. 목재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정의한 ‘생태계 서비스’의 대표적인 사례다. 의식주와 관련하여 삶의 뼈대를 이루는 거의 모든 것들은 사실 자연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생태계 서비스를 '자연이 주는 선물'이라고도 한다.

예전에 세대를 넘어 대물림하던 손때 묻은 가구의 흔적은 사람과 시간이 함께 빚은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래될수록 가치가 쌓이고, 손때가 묻을수록 더 깊은 결이 새겨진다.

그러나 인스턴트 가구에서는 시간의 깊이를 찾을 수가 없다. 속도와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쓰레기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인스턴트 가구는 우리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낡고 오래된 것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일은 자연이 주는 선물의 가치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투박하지만 오래된 밥상 위에 차려놓은 한 끼가 더욱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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