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가 흐르는 삶과 자연스레 콧물이 흐르는 삶
이즈음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 말 그대로 ‘환절기’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나 살갗에 닿는 바람의 온도 차이를 느낄 겨를도 없이 나의 가을과 겨울은 언제나 요란한 재채기와 함께 시작된다. 환절기마다 면역 반응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알레르기 체질인 탓이다.
내일 아침에는 기온이 10도 이상 떨어지며 초겨울 날씨가 되겠습니다.
어제저녁 티비에서 흘러나온 기상캐스터의 말을 떠올리며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재채기가 터져 나오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통에 새로운 계절의 첫 출근길이 너무나 번잡하다.
최근에는 봄과 가을이라는 예쁜 이름보다도 ‘간절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긴 여름과 겨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짧은 시간.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계절을 바꾸기라도 한 듯 하루아침에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며칠 전, 마을 입구 하천을 따라 걷다 보니 이미 많은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이번 주가 가을 단풍의 절정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여름과 겨울의 틈이 워낙 짧다 보니 노랗고 붉은 가을의 여운을 즐기는 일이 쉽지 않다. 계절은 이렇게 저만치 지나가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계절을 ‘느끼기’보다 ‘통보받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변화마저 오감에 앞서 뉴스와 알람으로 받아들이는 이즈음, 어쩐지 나의 삶도 자연의 리듬과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시간의 속도가 빠르게 다가올수록 마음의 속도 또한 덩달아 조급해진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라’는 옛 글귀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서점가에서는 ‘마흔에 읽는 노자’, ‘오십에 읽는 장자’와 같은 책들이 잘 팔리는 모양이다. 하루는 물론 한 달과 일 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문득 마흔이 되고 오십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잠시 멈춰 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보다.
나 대신 AI가 생각하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선택마저 예측해 주는 시대에도 정작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단순한 질문 앞에서 서성인다. '자연'스럽게 사는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노자와 장자로 상징되는 동양의 도가(道家) 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질서를 탐구하는 서양 고전과 달리, ‘조화’의 시선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삶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흔과 오십 언저리에 많은 사람들이 유독 노자와 장자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속도를 변주하며 다시 자연의 리듬을 되찾고 싶은 욕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노자는 ‘억지로 하지 말라[無爲]’고 강조한다. 무위(無爲)는 게으름이 아니라, 인위적 욕심을 내려놓고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自然] 두는 삶의 태도다.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조작하려 들수록 오히려 균형이 깨진다는 노자의 경고는 지나친 개입과 속도에 지친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현실적인 조언으로 다가온다.
장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물은 나와 하나다[萬物與我爲一]’라고 했다. 세상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마음 대신, 모든 존재와 함께 호흡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태도야 말로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다. 장자에게 진정한 자유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장자와 노자를 찾는 건 우연이 아닌 듯하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단순한 자연의 진리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더 가지는 법’보다 ‘덜 가지는 법’을, ‘빨리 사는 법’보다 ‘흐름에 맡기는 법’을 배우려는 역설적이고 반동적인 상황이 한편으로는 전혀 그러지 못한 우리의 삶을 반증하는 것 같아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듯, 삶에도 순환이 필요하다.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도 자연은 여전히 제시간에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군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조화에서 벗어나 조급하게 앞서가려 할 뿐이다.
노자와 장자는 우리에게 조화와 순응을 통해 자연의 속도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생태적 삶이란 거창한 윤리가 아니라 이처럼 우리 삶의 리듬을 자연에 맞추는 일이다.
계절은 뉴스와 날씨 앱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낙엽 냄새와 함께 찾아든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냄새가 달라지는 그 미세한 순간을 느낄 줄 아는 감각이야 말로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삶, 생태적인 삶을 회복하는 작은 원동력이 아닐까.
오늘 아침도 요란한 재채기와 함께 새로운 계절의 문턱을 건너며 생각한다.
‘인위가 아닌 도(道)가 흐르는 삶이란, 이렇듯 자연스레 콧물이 흐르는 삶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