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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바람이 파도와 맞닿는 순간

바다로 간 대나무 장대 이야기

by 인사이트뱅크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 앞 대나무숲은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나 이따금 새소리만 들리던 곳이다. 고요하던 그곳에 인기척이 있자, ‘혹시 작년에 보았던 그 노인이 또 왔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역시나 옅은 안개가 내려앉은 대숲 초입에서 구부정한 허리로 곧고 가는 대를 골라 자르고, 다시 가지를 쳐내며 대나무를 다듬는 노인의 모습이 작년 이맘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대숲 깊은 곳에서 규칙적인 리듬으로 낮게 울려 퍼지는 톱질 소리, 그리고 긴 대나무 줄기가 넘어가며 댓잎이 서로 요란하게 스치는 마찰음. 평소에 듣지 못하던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낯선 노인이 와 있었다. 동네 어르신은 아닌 것 같아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노인은 여기서 족히 50리가 넘는 바닷가 마을 이름을 대며 고깃배에 깃발을 매달 장대, 즉 어기대(漁旗臺)를 만들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이나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정성스레 대나무를 다듬었다. 열 대씩 가지런히 묶어 길 한편에 놓아두더니 마지막 날에는 젊은 사람 몇이 찾아와 트럭에 싣고 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어림잡아 보아도 족히 이삼백 개는 넘어 보였다.


언젠가 작은 포구를 지날 때 보았던 크고 작은 고깃배의 형형색색 깃발들.

붉고 푸르고 노란 빛이 바람에 펄럭이던 장면이 사진처럼 선명하다. 어선의 깃발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바다에 나서기 전에 놀리는 깃발은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기(豊漁旗)’이고, 조업을 마치고 항으로 돌아올 때 펄럭이는 깃발은 만선을 감사하는 ‘대어기(大漁旗)’라고 한다. 결국 대나무 장대는 ‘기원’과 ‘감사’의 두 마음을 떠받치는 기둥인 셈이다.

대나무의 생태를 찾아보니 날씨가 추운 계절, 특히 음력 11월에서 12월 사이가 가장 곧고 단단하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수분과 영양분이 줄어 해충의 피해가 적고, 건조 후에도 뒤틀림이 없다. 반대로 봄이나 여름에 베면 수액이 많아 조직이 부드러워 휘거나 썩기 쉽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나무는 잎이 마를 때 베고, 서리 내린 뒤 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노인이 굳이 추운 계절마다 먼 이곳까지 찾아와 대를 베는 이유는 이처럼 명확하다. 가장 혹독한 계절에 수확한 대나무만이 거센 바닷바람을 견딜 수 있기 때문다.

며칠 동안 이어진 노인의 손길 아래 가지를 털어낸 대들은 마치 가을 햇살을 머금은 푸른 기둥과도 같다. 그런데 곧은 직선과 마디가 반복되는 단정한 질서는 이 숲의 또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다.


사실 이 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부터 사시사철 청량한 느낌을 주는 이 대숲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맑은 날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물결도 아름답지만, 거센 바람이 부는 날 대숲 전체가 출렁이는 모습은 흡사 파도가 일렁이는 듯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어르신들은 이 숲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대나무의 기세가 너무나 드센 나머지 불과 몇 년 사이, 숲의 크기가 급속히 불어나며 밭과 담장을 넘어 아무 곳에나 죽순이 솟는 까닭이다. 약을 써도 퇴치가 어렵고, 잠시만 방심해도 손쓸 수 없을 만큼 번져버리는 통에 아예 밭농사를 포기하고 땅을 놀리는 집도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마당 경계까지 침범한 드센 대나무 뿌리를 캐내느라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다. 내가 대나무와 씨름할 때마다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그래봐야 소용없다.”며 한 마디씩 던지고 가셨지만, 장비까지 불러 요란하게 작업을 하고 땅속 깊이까지 석축을 묻은 뒤로는 마당 안에 대나무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렇듯 과한 ‘생명력’과 유연하면서도 쉽게 부러지지 않은 특유의 ‘회복력’은 어부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관상용 외에는 별다른 쓰임을 떠올릴 수 없던 집 앞의 대나무들이 50리 밖 바다마을의 누군가에게는 종교마냥 성스러운 기원과 감사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이 색다른 감상으로 다가온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의 기운과 바다의 역동적인 삶이 대나무 장대로 연결되는 사실 또한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추운 겨울, 가장 단단하게 제 몸을 응축시킨 이 대나무 장대들이 언제까지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바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기원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깃발을 휘날리는 고귀한 의식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집 앞의 대나무숲이 이제는 더 이상 고요하지 않게 다가온다. 이미 50리 밖, 먼바다에서 파도와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깃발이 펄럭이는 듯하다.


가을과 겨울, 추운 계절의 대나무는 생명이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봄을 기다리는 힘이 깃들어 있다. 가장 추운 시기에 가장 단단해지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생존 방식이며 삶의 리듬이다. 고요한 숲의 바람이 바다의 거센 파도와 맞닿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연의 모든 흐름은 결국 서로를 향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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