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달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희망의 후속자’
얼마 전, 제인 구달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상은 요란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이 오래도록 울린다. 인간보다 자연의 언어를 더 깊이 이해하던 한 사람이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치 숲 속의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쓰러진 듯한 묵직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연차 방문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제인 구달은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간의 오만과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알렸다. 특히 희망을 위한 젊은 세대의 연대와 실천을 끊임없이 호소해 왔다. 그녀는 생태학자 최재천과의 인연으로 여러 차례 우리나라를 찾기도 했다.
십여 년 전, 국내에서 열린 생태·환경 관련 행사에서 제인 구달과 만난 적이 있다. 최재천이 초대 원장으로 있던 국립생태원에서 ‘제인 구달 길’을 조성하며 그녀를 초청한 자리였다. 그 당시 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한 사람들은 그녀를 ‘구달 할머니’라는 친근한 말로 호칭했다.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던 그날, 회색빛 머리를 질끈 묶은 '구달 할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작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작은 거인’이라는 흔한 수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인 구달의 존재감은 숲 전체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보다 강렬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용하지만 단단했고, 선한 눈에서 비롯된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는 말보다 더 큰 메시지로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각인이 되어 있다.
행사 막바지에 그녀는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작은 손 안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단다.
이 말은 제인 구달의 삶을 관통하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나는 ‘길’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길은 누군가의 철학이 스며있는 삶의 궤적이자 이상으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통로이기도 하다. 제인 구달의 이름을 붙인 그 길 위에는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향한 희망의 발자국이 고요히 새겨져 있다.
제인 구달은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동물과 눈을 맞추며 자랐던 그녀는 훗날 탄자니아 곰비 스트림에서 침팬지를 연구하며 삶의 궤적을 바꾼다.
그녀의 연구는 과학계에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현대 과학의 오만한 신화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제인 구달에게서 비롯된 진짜 과학 혁명은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침팬지의 눈물, 포옹, 그리고 슬픔 속에서 그녀는 인간과 다른 생명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날 이후 제인 구달은 좁은 연구실을 떠나 자연과 사회, 그리고 사람들 곁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지식은 행동이 되었고, 그 행동은 곧 희망이 되었다.
제인 구달은 최재천에게 단순한 학계 선배의 위상을 넘어선 스승이자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한국을 방문한 제인 구달을 인터뷰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30년 가까이 이어졌고, 환경과 생태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공동의 목표 속에서 더욱 굳건해졌다.
최재천은 한 기고문에서 그녀를 ‘인간과 자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류의 스승’이라 표현했다. 특히 제인 구달이 침팬지에게 번호 대신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감정을 존중한 태도는 ‘인류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겼던 착각에서 깨어나게 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했다.
제인 구달은 청소년 환경운동 네트워크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을 통해 전 세계 아이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심어왔다. 최재천 또한 생명다양성재단을 이끌며 이 운동이 한국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있다.
최재천은 제인 구달을 추모하는 유튜브 영상에서 그녀를 ‘대체 불가능한 사람’, ‘살아있는 성인’이라 헌사했다. 이러한 찬사가 과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제인 구달이 지닌 ‘지적 겸손’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깊이 알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귀한 가르침 중 하나일 것이다.
희망은 행동에서 온다.
제인 구달의 말처럼 희망은 거창한 생각이나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실천에서 피어난다.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제인 구달이 남긴 발자국, ‘행동하는 희망’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습관이다.
제인 구달은 이제 아주 먼 곳으로 떠났지만, 국립생태원 생태교육관 뒤편의 야트마한 숲 속 ‘제인 구달 길’에는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과 무심한 새소리 속에서 그녀의 숨결이 함께한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나 또한 ‘희망의 후속자’가 되기를 조용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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