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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회색 그림자, 비둘기의 운명

도시 비둘기의 생태학

by 인사이트뱅크

참새가 사라진 공간의 비둘기

어린 시절에는 동네 어디서나 참새 소리가 흔하게 들렸다. 전봇대 위에서, 마당 한편에서 ‘짹짹’ 소리 내며 모여 있던 참새들은 우리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자리를 비둘기가 대신하고 있다. 공원 의자와 아파트 베란다 난간은 물론 소란스러운 도심 한복판 인도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비둘기들은 우리 주변의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작은 존재들의 조용한 자리바꿈이 도시 생태계의 변화와 맞물려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참새가 잘 보이지 않는 데에는 분명 과학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거듭 진행되며 도시 근교의 농지가 사라지고, 제초제와 살충제 사용이 늘면서 참새가 의존하던 먹이가 줄어든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일 것이다. 반면 비둘기는 날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와 공원 벤치 아래 흘린 과자 부스러기, 편의점 주변의 라면 찌꺼기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과 가까워진 만큼 먹이도, 서식지도 넉넉하다. 자연의 공간을 대신하는 인공의 환경에 잘 적응한 비둘기는 이렇듯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도시의 ‘회색 비둘기’와 시골의 ‘멧비둘기’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서식지’를 옮기고 보니 도시의 회색 비둘기와 생김새나 울음소리가 비슷한 멧비둘기가 흔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둘은 외형도, 성격도,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도시의 비둘기는 지하철역 천장이나 다리 아래, 거리의 간판을 둥지처럼 이용하고, 사람 발치까지 다가오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회색빛 깃털에 묻어 있는 도시의 흔적들이 마치 생존의 무늬처럼 보인다. 반면 시골의 멧비둘기는 몸집이 날렵하고 깃털의 무늬가 또렷하며 울음소리도 한층 깊고 서정적이다. 숲과 논밭 사이를 오가며 나무 열매와 벌레들을 먹이로 하고, 작은 인기척에도 놀라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가른다.

두 새는 아주 먼 조상이 같지만, 애초에 줄기가 다른 종이라고 한다. 도시 비둘기(집비둘기, Columba livia)는 야생의 바위 절벽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바위비둘기’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졌다가 다시 야생화된 존재다. 시골 멧비둘기의 정확한 학명은 ‘흰점멧비둘기(Streptopelia orientalis). 우리말 이름은 비슷하지만 아예 혈통이 다른 두 새는 그래서 울음소리도, 경계심도, 집 짓는 방식도 모두 다른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도시 비둘기(왼쪽)와 멧비둘기(오른쪽)


평화의 상징과 불청객 사이

비둘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평화’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한 데에는 오랜 이야기가 있다. 고대 신화에서 풍요와 사랑을 품고 등장하던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온 순간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흰 비둘기가 국제적 평화운동의 얼굴이 되었고, 그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의 회색 비둘기들은 이러한 상징이 무색할 정도다.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온 비둘기들이 고요한 평화를 헤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불청객 취급을 하기도 한다. 현재는 환경부가 지정한 대표적인 유해야생동물 신세로 전락했다. 과밀한 서식 탓에 비롯된 배설물 문제는 신종 도시 공해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먹이를 주는 사람과 이를 꺼리는 사람 사이의 작은 갈등도 수없이 반복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은 다름 아닌 비둘기의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본능’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둘기의 뛰어난 적응력 탓이다.

애초에 비둘기의 유전자 속에는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 적응 방식을 재빨리 바꾸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도시라는 낯선 공간에서도 예외 없이 발휘된다. 고층 건물의 외벽과 육교 아래의 구조물, 교각 사이의 크고 작은 공간들은 어느새 그들의 쉼터가 되고 은신처가 된다. 바위 절벽에 의지해 살던 조상의 습성이 현대의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풍경을 자신에게 맞는 서식지로 다시 해석하는 능력은 비둘기만의 생존 언어이자 그들이 도시를 새롭게 읽어내며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회색 그림자’가 맞이할 운명

결국 비둘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도시라는 삶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인간을 위해 설계된 인공 환경 속에서도 인간만큼이나 능숙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비둘기의 모습을 보면, 새삼 생명의 힘과 유연함에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도시 비둘기가 인간의 구조물을 자신의 서식지로 바꾸고, 새로운 먹이 활동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도시가 얼마나 복잡한 생태계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인간 역시 그 생태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도시 비둘기의 존재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도시의 모습은 어제보다 조금 더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비둘기를 자신의 삶을 침범하는 회색 그림자로만 받아들이는 시선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도시 생태계에서 그들의 흔적이 희미해지거나 아예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생태계란 특정 생명만이 살아남도록 설계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는 거대한 관계망이다. 우리가 비둘기에게서 보는 태도와 시선은 결국 인간이 도시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싶은지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주 오랫동안 뛰어난 적응력을 선보이며 인간과 공존해 온 비둘기가 앞으로 맞이할 운명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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