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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왜 또 왔노

효자 흉네 내는 아들의 작은고백

by 수미소


​오늘도 효자 흉내를 내기 위해 새벽에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뭘 해갈까. 다른 주말처럼 이것저것 생각해 본다. 시골에 홀로 계시는 85세 어머니. 보행기 없이 걷기도 힘드신데, 밭일만큼은 여전히 놓지 않으신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시계는 새벽 다섯 시. 다른 사람들에겐 이른 시간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벌써 늦은 시간이다.

​세수를 하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향한다. 자고 있는 아내가 깰까 봐 발소리를 낮춘다. 오늘 어머니께 가져갈 반찬은 양배추쌈, 단호박죽, 순두부 달걀찜, 그리고 양념 고기. 전날 밤 미리 준비한 반찬통을 다시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국물이 샐까 봐 테이프를 꾹꾹 눌러 붙인다.

​차에 오르자마자 내비게이션은 늘 가는 길을 안내한다. 지금은 바쁜 출근길도, 어디 놀러 가는 길도 아니다. ‘엄마 댁’. 주소를 누르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고 있는 길이다. 시골로 향하는 길은 조용하다. 논밭 사이로 낮게 안개가 깔려 있고, 차 안에는 내 숨소리만 가득하다. 도착하면 대문은 어김없이 반쯤 열려 있다.

​“엄마!”

내가 부르면, 어머니는 고추밭 쪽에서 고개를 드신다. 햇볕을 피하려 눌러쓴 모자 밑으로 땀이 맺혀 있고, 등은 지난주보다 더 구부정해 보인다.

​“또 밭일이에요, 엄마. 아침도 안 드시고…”

“니 온다고 해서 문만 열어두고 나왔다.”

​짧은 말이지만, 그 한마디에 담긴 반가움과 기다림은 언제 들어도 가슴을 찌른다.

​결혼하고 처음 시골집에 왔던 날. 어머니는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아가, 밭에 가서 오이 두 개만 따오너라.”

​하지만 도시에서만 자란 아내는 오이를 어떻게 따는지 몰랐다. 결국 한참 후, 줄기 하나를 들고 돌아와 말했다.

​“이 오이… 뭔가 이상하게 생겼어요.”

​그건 오이가 아니라 마늘이었다. 어머니는 그날 배꼽을 잡고 웃으셨다.

​“얘야, 오이는 땅속에 박혀 있는 게 아니고, 줄기에서 따는 거란다~”

​그날 이후로 아내는 오이를 보면 바로 알아본다. 조용히 골라 담는 모습에, 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신다.

​“이제 오이를 땅에서 캐서 가져오진 않으니 됐다.”

​밭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내가 가져온 반찬통을 열어 보신다. 대개는 말없이 옆으로 밀어두신다.

​“이건 동생 줘. 걔 입맛에 맞을 거야.”

​나는 매주 정성껏 준비하지만, 어머니의 입맛을 맞추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점심 식탁엔 어머니가 손수 끓인 된장찌개와 시래깃국, 고등어조림이 올라온다.

​“이걸 다 언제 하셨어요. 허리도 아프시다면서.”

“밥 안 먹고 어찌 살겠노.”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서 보낸 시간이 느껴진다. 식사 중, 어머니는 내 그릇에 반찬을 계속 덜어주신다.

​“너는 너무 마르다. 회사 일 힘드냐?”

“괜찮아요. 그냥 요즘 좀 피곤한 정도예요.”

“피곤해도 밥은 먹어야지.”

​그 한마디가 어쩐지 울컥하게 만든다. 요즘 나는 힘들었다. 잠도 부족했고, 출근도 버거웠고, 25년 다니던 회사의 폐업… 이후의 미래는 여전히 흐릿하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아신 걸까.

​고추 자루와 반찬 가방을 트렁크에 실으면, 어머니는 늘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이건 너 가져가고, 저건 걔 주고. 오이 좀 많이 캐가라.”

​사랑은 정확히 나눌 수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엄마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신다. 돌아오는 차 안. 고추의 매운 향과 반찬 가방에서 스며 나온 된장 냄새가 가득하다. 나는 오늘도 효자를 흉내 냈고, 엄마는 오늘도 자식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나는 다시 아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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