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흉내 내는 아들의 작은 소망
또 다른 토요일의 전날이다. 이번엔 카레 냄새로 시작할 주말을 준비한다. 금요일 저녁,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내일 가져갈 반찬거리가 없다. 그나마 양배추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없다.
어머니 댁에 빈손으로 갈 순 없었다. 급히 쿠팡을 열어 식재료를 주문했다.
“내일은 카레다.”
고기 대신 어묵을 넣는, 나만의 레시피. 돼지고기를 잘 드시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어묵을 잘게 썰어 넣는 것이 핵심이다. 고기를 골라내야 하는 틀니 낀 어머니에겐 어묵이 가장 부드러운 고기였다.
새벽, 눈을 떠보니 문 앞에 주문한 식재료가 조용히 도착해 있었다. 양파, 감자, 당근, 대파, 카레가루, 그리고 어묵. 불을 켜지 않은 부엌에서 조심스레 칼질을 시작했다. 불빛 대신 마음을 켰다. 어묵을 볶으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이건 사랑의 조미료다.”
어머니 댁에 도착하자 대문은 늘 그렇듯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도로 가장자리를 빗자루로 쓸고 계셨다.
“엄마 뭐 하세요?”
“쓰레기가 많아서. 청소 안 하면 어른들 다 넘어진다.”
이 동네엔 젊은 사람이 없다. 동네 청소도, 골목 정리도 이제는 어머니 같은 이들의 몫이다.
아침 식탁 위에 갓 만든 카레를 올리자 어머니는 한마디 던지셨다.
“밥이나 먹자.”
한 그릇을 뚝딱 비우셨다. “부드럽다”며 칭찬까지 곁들이셨다. 어묵을 넣은 카레라이스. 틀니에도 무리가 없고, 입맛에도 딱 좋단다. 오늘도 효자의 흉내는 성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고추밭에 약을 치고, 참깨순을 정리하고, 감자를 캤다. 시골일에는 끝이 없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상추와 부추를 수북이 챙기셨다.
“엄마, 오늘 또 시장 가세요?”
“그렇지. 내 자리 비우면 누가 앉을지 몰라.”
시골 장터 골목 옆 도로. 할머니들은 각자 키운 농작물을 늘어놓고 판다. 자리에는 고정석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다. 누가 먼저 앉았는지, 누가 원래 어디 앉는지. 이 작은 골목엔 은근한 규칙이 있다.
그런데 오늘,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 자리에 외숙모가 앉아 계셨다.
“또 내 옆에 와 앉았네. 사람 많은 쪽에 가면 더 잘 팔린다면서.”
외숙모는 부추 꾸러미를 재빠르게 펼치며 말했다.
“나 요즘 상추는 안 가져와. 젊은 사람들은 다 포장된 것만 사더라.”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상추 다발을 넓게 펼치셨다.
“그래도 우리는 손으로 뽑은 게 맛있다.”
시장은 은근한 경쟁의 장이다. 누가 더 많이 팔았는지, 누구 채소가 더 싱싱했는지.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외숙모의 부추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거 너무 질기다. 이건 못 먹겠네.”
외숙모는 발끈했다.
“아니야, 질긴 게 아니라 찰진 거야!”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으셨다.
“지 잘 팔리면 괜히 질투하거든.”
결국 두 분은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주고받았다.
“누가 더 많이 파는지 해 보자!”
“됐고! 나는 2천 원만 벌어도 한탕한 거다!”
땡볕 아래 지나가던 동네 분이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어머니는 한 입 베어 문 뒤 말씀하셨다.
“이 더위에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이제는 절대 안 나온다. 절대…”
하지만 손은 다시 부추 꾸러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외숙모는 “만 원 벌었어!” 하며 으쓱했고, 어머니는 “나는 오천 원인데, 그래도 많이 팔았네” 하셨다. 저녁 무렵, 파란 보행기에 남은 채소를 싣고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내가 만든 어묵 카레를 또 한 그릇 뚝딱 비우셨다.
오늘 카레는 부드럽더라. 먹을수록 맛이 난다.”
드라마 한 편을 보시다 리모컨도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 스르르 잠드셨다. 허리춤 지갑엔 오늘 번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 나는 오늘도 효자의 흉내를 냈고,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자랑할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나는 다시 아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