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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라이벌과의 여름, 그리고 10분의 이유

효자흉내 내는 아들의 작은소망

by 수미소


​또 다른 토요일의 전날이다. 이번에는 무엇을 해갈까. 늘 그렇듯, 나는 생각부터 한다. 여름이 다가왔다. 오늘은 폭염주의보까지 내려졌다.


햇빛이 작정한 듯 쏟아지는 날이면, 시골집은 도시보다 더 빠르게 달아오른다.


​매주 토요일이면 나는 시골로 간다. 하지만 고추밭에 약을 쳐야 하는 날은 평소보다 이른 연락이 먼저 도착한다.


​“얘야, 고추 이파리가 말라비틀어졌다. 우야꼬? 약을 좀 쳐야 될 텐데…”


​나는 익숙하게 대답한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갈게요.”


​그 대답 한마디에, 다음 날 하루가 결정된다.


​새벽, 잠이 덜 깬 몸으로 물 한 잔을 넘긴다

씻을 새도 없이 옷을 주워 입고 차에 올라탄다. 도시에서 어머니 집까지는 1시간. 동생 집은 불과 5분 거리지만, 어머니는 동생을 부르지 않으신다.

​“동생은 회사 다니잖아. 더운데 밖에서 일한다고 힘들 거 아이가…”

​그 말 속엔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과 말하지 않는 미안함이 함께 담겨 있다. 고추밭에 약을 뿌리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나는 그 10분을 위해 매번 달려간다.

​새벽 6시도 되기 전, 어머니는 이미 텃밭에 나가 계신다. 굽은 허리로 잡초를 뽑고 계시는 그 모습이 항상 나를 먼저 맞는다. 약을 치고, 어머니가 드실 반찬 몇 가지를 식탁에 차려두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얹어 놓는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향한다.

​뒷걸음치며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들리는 목소리.

​“야! 야! 밥 묵었나?”

​나는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뭐 좀 넣고 믹서기에 갈아서 마시고 왔어요.”

​사실, 밥도 못 먹고 씻지도 못한 채 달려왔지만 어머니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

​예전엔 달랐다.

​“밥 먹고 가라” 하시며 냉동실에서 고등어를 꺼내 굽고, 된장찌개를 후다닥 끓여 내시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굽은 허리가 싱크대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신다. 그릇을 씻고, 양파를 까고, 파를 썰고, 장독대에서 된장을 푸던 일상은 이제 어머니께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시골에 갈 때마다 같은 말을 되뇐다.

​“뭐 좀 갈아먹고 왔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넌 올 때마다 도대체 뭘 갈아먹고 오노? 집에 갈아먹을 게 그리 많나? 허허…”

​그 말 끝에 작은 한숨이 따라왔다.

​“내가 허리가 아파가… 이제 아무것도 못하겠다…”

​약을 뿌리던 중, 산책 나온 외숙모가 골목 어귀로 걸어오신다.

​“아이고, 너는 부지런도 하다. 새벽부터 와서 약도 치고~”

​외숙모는 유유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어머니는 그 뒷모습을 향해 작은 한숨을 내쉰다.

​“너희 외숙모는 아직 힘이 넘친다. 나는 젊을 때 일을 너무 해가지고… 골병이 다 들었다.”

​과수원, 논, 고추밭, 복숭아, 포도, 배까지. 어머니는 평생을 땅과 싸우며 살아오셨다. 나는 안다.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일하던 그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그 기억들이 어머니가 나를 더 자주 부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거리보다, 늘 곁에 있었던 의지의 연장. 약을 마친 뒤, 나는 다시 출근길에 오른다.

​어머니는 보행기에 상추와 부추를 싣고 ‘골목 시장’으로 향하신다. 그곳에서 외숙모와의 조용한 라이벌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누가 먼저 팔았는지, 누가 더 많이 벌었는지, 누구 앞 그늘이 더 시원했는지. 그날 저녁, 기분이 달라지는 건 팔린 양보다 서로의 눈치를 얼마나 덜 봤느냐일지도 모른다.


나는 바란다. 오늘 그 골목 시장에는 시원한 그늘 하나가 드리워지기를. 나는 오늘도 효자의 흉내를 냈고,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자랑할 준비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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