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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17. 2024

31. 하얀 행성과 검은 명상

진영




저 별이 나의 끝인가. 반짝이는 나의 별.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행성보다도 하얗게 빛이 난다. 처음 보는 별이지만 예전부터 알고 있던 곳에 다다른 느낌이다. 고향이라 말한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표현이려나. 점으로만 보였던 나의 별이 커질수록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온몸 여기저기가 간질거린다. 생소한 감흥을 일으키는 하얀 별은 나의 마지막 자리가 분명하다.


탐사한 행성들을 이어 만든 별자리에 정점을 찍을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별은 나의 마지막 탐사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겠지. 동시에 나는 사라지고 잠시 동안 세상에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가 결국 사망자 수에 하나를 보태게 될 것이다. 


이제 끝이다. 끝에 도달했다. 



그 문턱에 서 있는 나는 벌써부터 후련하기까지 하다. 아주 높은 산 정상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는 기분,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포근한 기분, 모든 것을 내 발 아래 둔 기분, 주변 행성들의 빛이 나의 도착을 독려하는 기분이다. 


내가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목격하고 경험했나. 


갈림길에 서서 고민한 시간들, 때마다 나를 인도했던 우연들, 원하지 않던 나의 결정들, 그 지점들을 따르다 보니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높이 올라온 만큼 내려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다. 이제는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쉬고 싶다. 나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아주 멀리 왔고, 마침내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나의 탐사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이 생각난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자. 아니, 내가 젖을 먹기는 했을까. 내가 갓난아기일 때 그런 힘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상관없다. 살기 위해 무언가를 먹기는 했겠지. 그걸 먹던 힘까지 짜내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점박이들에게 패배를 선사하자. 그들이 지우고만 싶은 실패의 숫자 하나가 되자. 그것이면 나의 최후로 충분히 족하겠다.   







수현




주변이 회색빛으로 희붐하게 어른댑니다. 수신을 제대로 받지 못한 TV화면처럼 징그럽게 흔들리더니, 이내 그보다 더 미세한 그물망처럼 시야 곳곳이 흑백의 선으로 교차됩니다. 마치 점으로만 공간이 구성된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을 지속하려는 마음도 벗어나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례로 감각에 집중하며 호흡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침잠의 상태가 나를 차분히 이끌어 갑니다. 색상과 채도 없이 오직 명도의 변화만 있던 무수한 흑백의 점들이 색깔을 띠기 시작합니다. 검은색,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흰색, 다양한 색들이 모자이크의 조각처럼 조합됩니다. 눈앞을 화려하게 수놓습니다. 


갑자기 가운데로 검은색 아지랑이가 길게 피어오릅니다. 찬란했던 색의 조각들이 하나씩 검게 물들어갑니다. 검정에 압도되어 색이 남아 있는 부분은 희박합니다. 적색과 청색, 황색과 백색의 배치가 시시각각 바뀔 뿐 거의 어디서나 검습니다. 아주 작은 점들로 변합니다. 마치 어렸을 적에 보았던 그 장면과 비슷합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눈알을 지그시 누르면 끝없이 펼쳐지던 그 미지의 공간 같습니다. 



제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요. 사실은 정지해 있으면서 제가 착각하고 있는 걸까요. 상관없습니다. 보이는 그대로, 나를 이끄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주 짙은 검은색의 구멍이 보입니다. 그 주위로 흐릿하지만 빛과 크기가 서로 다른 색점들이 점멸하고 있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 너머에 분명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안으로 진입하고픈 충동과 욕망을 느낍니다. 동시에 슬픔이 찾아듭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옵니다.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바람이 지나듯 그 감정이 저를 지나가도록 내버려둡니다. 주위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제 몸은 아주 천천히 암흑의 동공으로 향합니다. 


빠른 열차를 탄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멀미가 납니다.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합니다. 귀와 코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먹먹합니다. 호흡,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심해와 같이 어둡고 깊은 곳으로 한량없이 가라앉는 듯합니다. 







진영




세상이 새하얗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나는 설경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위도 아래도 모두 하얗다. 땅과 하늘의 경계선을 겨우 가늠할 수 있다. 이 행성의 모든 곳에서 눈이 내리는 듯하다. 


거칠 것이 없는 이 행성 위에는 오직 우주탐사선 하나만이 기준이 된다. 탐사선의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로 구분된다. 그마저도 잠시, 눈발은 세차게 날려 선체를 하얗게 뒤덮는다. 마치 낯선 방문자를 행성의 일부로 삼키려는 듯이.


탐사선도 새로운 행성을 탐색할 준비를 한다. 행성의 지형 이미지 변환과 위험 요소를 확인하는 동안 나도 서둘러 직접 탐사를 시작한다. 행성 위에 모든 지점이 모두 같은 지점인 듯하다. 어디에서 탐사를 시작하고 끝맺든 상관이 없겠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걷는다. 



중력은 지구와 비슷하다. 발목 높이까지 눈이 쌓여 걷기가 불편하다. 얼마 걷지 않고 자리를 잡아 탐사 도구를 꺼낸다. 이미 사방에 널린 눈을 먼저 채취한다. 자세를 낮추자 눈에 담기는 정경이 특별해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모르게 깊고 편안한 숨을 내쉰다. 이 행성이 꽤나 마음에 든다. 죽기 좋은 행성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만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충동적으로 눈밭에 누워보기까지 한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 때문에 누운 채로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여기서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동안 죽음만을 생각했지, 죽은 후에 일을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 말하는 죽은 후에 반드시 도착하는 그곳이 이 행성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글쎄, 죽어서도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가기는 싫다. 죽은 사람들은 결국 하늘나라로 가는 걸까. 그런데 하늘이 어디지. 어떤 행성의 하늘일까. 결국 우주로 가는 걸까. 그럼 다시 여기로 나올 텐데. 여기도 우주니까. 그럼 나는 여기 남는 건가.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이는 행성이라면 시체를 찾기도 쉽지는 않겠다. 아주 마음에 드는 행성이다……. 헛생각은 그만하고 이제 일을 어서 마무리해야겠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는 까무러치게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엉덩이와 발을 움직여 뒷걸음질치다가 얼른 몸을 세워 뒤로 달아난다.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저 앞에 무언가가 가만히 눈을 맞고 있다. 만약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부연 윤곽을 따라 눈이 쌓이고 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일까. 혹시 내가 이미 죽은 건가. 자살한 기억이 없는데 벌써 나는 죽었나.


지금 여기는 어디지.







수현




위치와 상태를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모르는 외딴 곳에 있는 기분입니다. 위상수학자라고 해서 모든 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수학에서는 연산할 원소가 있고, 각 원소 간의 관계를 파헤칠 제 지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끝에 원소들이 이루는 구조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곳은 제가 다룰 대상도 없고, 그렇기에 관계도 알 수 없습니다. 제 지식은 무용지물입니다. 저는 아무 준비 없이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주변은 캄캄합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녕 나의 마음속인가요. 제 안에 있나요. 저도 모르게 제 안에서 형성된 것일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 자신과 주변을 감각하고 관찰하는 것뿐입니다.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지만 아마 저는 차가운 물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허우적대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동을 체념하고 유영하듯 몸을 맡깁니다. 몸 곳곳에서 물결이 느껴집니다. 머리와 목을 타고, 어깨와 팔을 스칩니다. 등과 가슴을 돌아 하체로 미끄러지듯 향합니다. 아릴 정도로 시린 흐름이 온몸을 반복해서 휘감습니다. 추위에 몸이 떨려 오지만 감각의 변화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차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만치 여명이 깃들 듯 밝아오더니 주변이 환해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발치에 커다란 물풍선 같은 검은 수막이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손을 뻗어 표면을 어루만집니다. 부드럽지만 얼음처럼 아주 차갑습니다.


단번에 알았습니다. 저를 이토록 맹목적으로 이끈 동기,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의 근원, 내가 종국에 만나야할 그것은 이 괴상한 물체였습니다. 양손으로 검은 물체를 쓰다듬습니다. 슬픈 감정도, 무조건적인 충동도 사라집니다. 제가 이것에 닿기를 원했나 봅니다. 순두부의 표면처럼 연한 감촉을 탐닉하듯 즐깁니다.



갑자기 사방에서 물의 흐름이 급변하더니 제 몸 이곳저곳으로 휘몰아쳐 들어옵니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끈덕지게 검은 물체를 부여잡습니다. 사정없이 흔들리자 검은 수막은 더 차갑고 딱딱하게 변합니다. 손이 얼어붙을 것만 같습니다. 흠칫 놀라 손을 떼자 금세 급류가 잠잠해집니다. 저는 다시 팔다리를 휘저어 중심을 잡습니다.


검은 물체는 갑자기 제게서 도망가듯 뒤로 이동하다가 우뚝 섭니다.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날 듯 꿈틀거리는 검은 외형이 흉측합니다. 섬뜩하게 무서운 생각이 들이칩니다. 그것이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습니다. 저는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헤엄칩니다. 진득한 액체 속에 있는 것처럼 거동이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를 보나 어스레한 빛만이 감도는 수중입니다.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갑니다.






32. 위치와 상태 _ 수현&진영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마음의 위상 1부 보러가기 (01 - 30화)
마음의 위상 2부 보러가기 (31 -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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