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하얀 우주복 위에 눈이 두텁게 쌓인다. 나는 이미 하얀 행성의 일원이 된 기분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차츰 잠잠해진다. 믿기지 않지만 그 투명한 물질 위에 덕지덕지 붙은 눈의 형태를 보아서는 놀라우리만치 인간과 비슷한 모양이다. 적어도 머리의 모양과 어깨를 잇는 선은 확실하다.
이 세상에 생명체가 있는 다른 행성이 존재한다는 건가.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하며 이미 가진 것을 홀대하는 점박이들의 말이 옳을 리가 없다. 그런데 과연 저것을 생명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거리를 유지한다. 물체가 서서히 멀어진다. 내게 위협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내가 저것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 글쎄, 나도 저것도 지금 살아있기는 한 걸까. 지금 여기는 꿈속이 아닐까. 마치 내가 죽은 것만 같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광경을 지켜본다. 눈만 끔뻑거리며 멀어지는 그것을 본다. 혹시 내가 죽을 때가 다 돼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닐까. 나의 시각마저 의심스럽다. 사방이 흰 곳에서 나의 시각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그 물질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옆으로만 이동한다.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본다. 어디로 보나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더 이상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눈발을 뚫고 이동한다. 눈이 쌓일수록 사람의 형태가 온전히 드러난다. 글자 그대로 눈사람이라는 단어에 가장 알맞은 모습이다. 그는 설경 속으로 들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려는 듯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이러다가 눈사람을 놓치고 말겠다.
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그를 뒤쫓는다. 한참 따라가다 보니, 마치 눈사람이 내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 꼴 같아 어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딜 가나 희디흰 이 행성을 아무리 누벼봤자 제자리와 다름없는데, 그런 불평을 늘어놓다가 문득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드는 저항을 느낀다. 홀린 듯 눈사람을 쫓다보니 생명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나는 허리춤에 생명줄을 만지작거리며 멀어지는 눈사람을 바라본다. 망설임 없이 생명줄을 해제한다. 팽팽했던 생명줄이 느즈러지더니 눈밭 위로 떨어진다. 눈 속에 파묻힌다. 순간 내게 얽매여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순백의 자유가 깃든다.
수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헤엄치듯 걸었습니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춥습니다. 관절마다 추위가 서린 듯 움직임이 둔합니다. 벌써 기진맥진합니다. 더는 못 가겠습니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그 검은 물체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막의 형태가 처음과 다릅니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는 제 마음과 같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저를 따라오는 흑색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저를 따라오는 것일까요. 모두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이제는 묻지 않겠습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은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저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 그 과업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미뤄온 명제의 증명을 시작하듯 용기를 내어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걸어온 방향으로 발을 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딛을수록 몸을 옭아매던 액체의 점성은 묽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득했던 액체들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금세 머리에서 턱으로, 턱에서 가슴, 허리, 발목으로 수위가 낮아집니다. 제 몸은 여전히 흠뻑 젖어 있습니다.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훔칩니다. 이제 좀 살겠습니다. 검은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 밖으로 드러난 검은 부위가 색을 띠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앞에 바짝 서서 눈으로만 여기저기를 훑어봅니다. 머리카락, 이마, 얼굴이 보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자마자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뀝니다. 지금의 나, 나를 닮은 나, 젊은 날의 나. 그의 얼굴은 시간을 초월한 듯합니다.
그를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얼굴이 스치다가 강력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더 이상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자 얼굴의 형태가 하나로 고정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산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닿을 수 있는 걸까요. 설마 여기가 그 별인가요.
성은이 별. 우리가 약속한 그 별.
딸아이의 귀여운 얼굴입니다. 어떻게 딸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성은아. 성은이 맞구나. 내 딸. 엄마야, 엄마 못 알아보겠니. 엄마라니까. 몇 번이나 소리칩니다. 성은이는 저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어요.
울지 마. 엄마가 여기 있잖아. 그렇지. 사랑한다. 엄마가 사랑해.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성은이는 갑자기 무엇이라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입이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미안해. 하나도 안 들려. 갑자기 성은이는 울면서 제 입을 노려봅니다. 성은이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저는 최대한 입모양을 또박또박 발음합니다.
진영
눈사람은 문득 이동을 멈추더니 나에게로 다가온다. 갑자기 눈이 뚝 그쳤다. 그의 몸에 쌓였던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가 굼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머리라고 생각될 부분을 쓸어 넘긴다. 눈이 후드득 떨어져 나간다. 그 속에서 느닷없이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발을 떼지 못한다.
이건 꿈일 거야, 꿈. 아니면, 환상. 그것도 아니면 정신착란.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라니. 정신 똑바로 차려, 김진영. 인간일 리가 없잖아. 사람의 형태를 한 외계의 그 무엇인 걸까.
사이가 하나도 매어지지 않는 비약적인 판단에 나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가 온다. 내게 다가온다고. 어떻게 해야 하지. 그에게 꼼짝 없이 사로잡히고 말겠어. 내 앞에 바짝 선 눈의 사람은 나를 내려다본다. 실타래처럼 복잡한 그의 얼굴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엿본다. 그의 면목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나와 닮은 사람. 하지만 나보다 더 늙었다. 그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낯이 익다. 흠칫 놀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속에서 뜨겁고 검질긴 무언가가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아 목과 쇄골 주변을 내치듯 문지른다. 우주복이 답답하기만 하다. 읽을 수 없던 눈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왜 이래 갑자기. 왜 우는 거야. 나도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다. 곧 설움이 터져 나와 눈물을 쏟아낸다. 우리가 갑자기 왜 울고 있는 거야.
그의 입이 움직인다. 절박한 얼굴로 내게 뭐라고 말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되지도 않는 독순을 시도한다. 눈물을 거듭 닦아내어 입모양을 확인한다.
엄. 마.
내가 읽은 단어를 의심하며 다시 관찰한다.
엄마야, 엄마. 엄마. 몇 번이고 그 단어를 확인한 후에야 확신을 가진다. 고작 짧은 한 단어이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만 같은 그 말,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그 말, 그럼에도 단번에 내 속을 뒤흔드는 그 말. 그 단어를 내가 믿고 싶기 때문인지, 그가 나를 빼닮았기 때문인지, 아니, 내가 그를 빼닮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만약, 아주 만약 엄마를 마주한다면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 없을지. 아주 쉬운 문제였다. 눈사람의 얼굴을 더 뜯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엄마였다. 내게는 없던 그 엄마였다.
그래, 나 진영이야. 엄마 딸 진영이. 어렸을 적에 그렇게 불러도, 돌계단에서 떨어져 목 놓아 외쳐도,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원망해도 나를 한 번도 찾지 않았잖아.
나는 이제 죽을 거야. 여기서 죽으려고 했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어. 이 세상에 내가 갈 곳이 아무데도 없으니까 그렇잖아. 나한테는 엄마가 없어서 그런 거잖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냐고. 근데 왜 여기로 나를 만나러 왔어. 설마 나를 기다린 거야. 거짓말하지 마. 나를 버렸잖아.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입술에 집중한다.
사. 랑. 해. 엄. 마. 가. 사. 랑. 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하늘을 보며 목 놓아 운다. 슬픔에 잠겨 꺼내기 힘든 목소리 때문에 답답하다. 몸속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것을 단번에 쏟아내듯 울음을 터뜨려 외친다.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단 말이야.
눈사람은 나를 감싸 안는다. 나는 그 품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는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이토록 따뜻한 곳이 있었어. 나는 그 속으로 파고든다. 온몸에 충만한 기운이 스민다. 물밀 듯이 잠이 쏟아진다. 의식이 하얗게 멀어진다. 나는 중얼거린다.
엄마, 이제 제가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없다고요. 설마 여기도 사라지는 건가요. 이제 저는 어디로 가면 좋죠……
수현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만하는 성은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찢어질 듯합니다. 떨어진 살조각을 줍듯 바닥에 쓰러진 성은이를 얼른 감싸 안습니다. 몸이 얼음장 같습니다. 제 가슴과 팔이 에이듯 아파옵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엄마 어디 안 가. 여기 있을 거야. 엄마가 있을 곳은 성은이 곁이야. 내가 어딜 가겠어.
차가웠던 성은이의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돕니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안 춥지. 안 춥고말고. 엄마는 하나도 추위를 타지 않잖아. 계속 이렇게 엄마랑 있자.
성은이는 제 품에 파고듭니다. 저는 딸아이의 어깨를 토닥입니다. 상체를 갸웃갸웃 움직이며 딸애를 달래봅니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의지합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체온으로 덥힙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가늠할 수 없이 긴 시간이 성은이를 안은 채로 지난 듯합니다. 글쎄요. 지금 시간이 흐르고 있기는 하나요.
주변을 둘러봅니다. 세상이 일순간 정지한 듯합니다. 하얀 눈송이 같은 것이 공중에 박힌 듯 아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하나가 마치 별 같습니다. 그 장관을 지켜보며 성은이를 고쳐 안습니다. 옆구리 안쪽에서 차고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배와 가슴을 지나 목으로 올라옵니다. 저는 떨리는 숨을 내쉽니다. 입과 코로 살얼음이 쏟아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 높이 사라져갑니다.
공중에 멈춰있던 하얀 알갱이들이 떨어집니다. 눈처럼 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새하얗게 가리려는 듯 펑펑 쏟아집니다. 밤이 찾아온 것 같아요. 순식간에 주변이 어스레합니다. 다리에서 저린 감각이 올라옵니다.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주변으로 물이 스밉니다. 발목에서 단숨에 가슴으로, 곧바로 턱까지 차오릅니다. 입과 코를 덮습니다. 숨쉬기가 힘듭니다. 숨이 막힙니다. 한계입니다. 저는 성은이를 품에 꼭 안고 물속으로 잠수하듯 몸을 숙입니다. 훨씬 더 편안합니다. 원활한 호흡, 흐릿한 시야, 따뜻한 수온. 몸과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는 듯합니다.
우리의 연결도 서서히 풀립니다. 함께 물속에 둥둥 떠 있습니다. 성은이와 저는 점차 멀어지고 이제는 겨우 손만 잡고 있습니다. 딸애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몸에도 힘이 없는 듯합니다. 저는 다시 성은이를 끌어안습니다.
성은아, 괜찮니. 눈을 떠봐.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변은 점차 어두워집니다. 어둠 속에 유일한 빛. 성은이 뒤쪽 멀리서 무언가가 환히 발광합니다. 서둘러 성은이를 이끌고 물속을 걸어가듯 헤엄칩니다. 빛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기다란 흰 끈이 물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성은이의 얼굴을 밝게 비춥니다. 딸애가 천천히 눈을 뜹니다. 지친 얼굴로 웃어 보입니다. 그리고는 손을 가로로 젓습니다. 제게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엄마가 돼서 또 울 수는 없겠지요. 이럴 때 보면 저보다 아이가 더 어른 같습니다. 저는 울음을 꾹 참고 성은이를 따라 미소를 짓습니다. 딸애는 천천히 제 손을 놓고 빛 끈을 쥔 채로 아래로, 어두운 저 아래로 헤엄쳐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에 끝까지 성은이를 눈으로 좇으며 인사합니다. 딸아이를 따라 저 밑까지 이어진 밝은 끈이 물결에 살랑살랑 흔들립니다.
잘 가, 성은아.
삽시간에 칠흑 같은 암흑이 저를 삼킵니다. 주변이 깜깜합니다. 제 위상은 무엇인가요. 어둠 속에서 눈을 굴려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색찬란한 빛의 방울이 사방에서 무수하게 피어나 흔들리더니 이내 자취를 감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