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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19. 2024

33. 마지막 회기

진영 (1)






“네, 요즘은 잠도 잘 자요.”


나는 박연경 상담사의 깊은 눈동자를 멋쩍게 바라보며 말을 붙인다.


“눈밭 한가운데 서 있는 꿈도 안 꾸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꿈도 그 이후로는 꾼 적이 없어요.”


“그렇군요. 지금 기분은 어때요? 오늘이 마지막 회기인데.”


“아주 좋아요. 다시 우주로 나가도 좋을 만큼.”



“생각이 바뀌었나요? 다시 우주로 나갈 생각이에요?”


“아니요. 그만큼 좋아졌다는 뜻이었어요. 탐사가 아니라 훈련 때문에 내일모레 잠깐 나갔다 와야 하거든요. 이제는 확실하게 알아요. 우주비행사 일은 저랑 안 맞아요.”


“그럼, 앞으로도……?”


그는 내게 다음 말을 넘기려는 듯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린다.


“네, 계속 사관학교에 남을 생각이에요. 생각보다 저랑 잘 맞더라고요.”


“애들 괴롭히는 거에 재미 들린 건 아니고요?”


박 상담사는 짓궂게 웃는다. 나도 어색하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얼른 말을 잇는다.


“농담인 거 알죠? 그동안 옆에서 봐도 좋아 보였어요. 크게 불안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면 다행인데요. 다만 제가 불안한 상태인지 아닌지 혼자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나마 옆에서 선생님이 말씀해주셔야 알 수 있는데, 이제부터는 큰일이네요.”


“아니에요. 진영 씨는 이미 잘하고 있는 걸요. 그리고 적당한 불안은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도움이 되죠. 이제는 혼자서 더 멀리 가 봐요. 그럴 때가 됐어요. 혹시나 중간에 힘들면 잠깐 여기 들르면 돼요. 저는 항상 여기 있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박 상담사의 표정은 정감이 가득하다. 나와 비슷하게 시원섭섭한 모양이다.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박 상담사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박 비행사님이든 박 상담사님이든 둘 다요. 저 혼자서는 힘들었을 거예요.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잖아요.”


“이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없다고 생각해요. 외딴 행성의 눈밭에서 어머니를 만났든, 그 품에서 깊은 잠에 빠졌든, 해제한 생명줄이 다시 연결되어 있었든, 모두 다 말이 돼요.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회피할 뿐이죠.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모든 이야기의 증거는, 진영 씨에요. 진영 씨가 그 일을 겪고 죽지 않고 살았다는 거요. 그러니까 살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


그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입을 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갑자기 긴급 수색 요청이 떨어졌을 때요. 제가 탔던 구조선뿐만 아니라, 제 탐사선 때문에 따라오던 정비선도 모두 진영 씨를 구하려고 전속력으로 움직인 걸요. 만약 진영 씨가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해서 생각도 하기 싫어요.”




평소와 다르게 박연경 상담사의 말수가 많다. 상담이라기보다는 가벼운 담소에 가까웠지만 싫지 않다.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가 아니라 오랜 친구 같다 랄까. 지난 회기까지 느껴졌던 거리감도 사라진 느낌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저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당장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만약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냥 죽고 싶었어요, 제 손으로 삶의 연속성을 끝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요. 제가 그 행성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게,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보고 그 품을 겪었다는 게 매순간 죽지 않을 이유가 돼요. 알고 보니 선생님도 탐사 일을 하실 때 비슷한 일을 겪으셨다고 해서 힘이 많이 됐어요.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많은 부분을 도려내고 말았고요. 징계로 어쩔 수 없이 지구에 남은 후에 이쪽 공부와 상담을 병행하면서 조금씩 회복했어요. 그 행성에서 보았던 사람이 누군지도 알았고요.”


“누구였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건 비밀로 할래요. 이해해줄 수 있죠? 누구나 그런 부분 하나씩은 있잖아요.”


“그럼 그게 진짜였다고 생각하세요?”


“진영 씨는 그게 다 가짜였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잠시 고민한다. 박 상담사는 나의 얼굴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는 진짜 같고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보다는 가짜 같아요.”


“강력한 직감 뒤에는 언제나 의심이 뒤따르지만, 의심으로 시작한 일에는 강력한 확신이 설 수도 있죠. 대상은 달라도 우리 모두가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저도 똑같았어요. 계속 해서 제 기억을 의심했거든요. 정말로 제가 죽은 사람을 만난 게 맞는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어요. 다시 우주로 나가기로 결정했을 때,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예전의 일처럼 죽은 남편을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어요."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말을 잇는다.



"그런데 다시 그 행성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요. 제 기억을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원래는 있지도 않은 과거의 순간을 혼자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같아서 혼란스럽고 허무하더라고요. 줄곧 그런 상태로 우주를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진영 씨를 만난 거예요. 이번 일이 제게도 큰 영향을 끼쳤어요. 예전보다 더 자신 있게 찾지 않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속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알았으니까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고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착각과 현실인 거예요. 이제는 직접 보지 않아도 알아요. 어디선가 남편이 잘 살고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는 행복한 남편의 얼굴을 더 많이 생각하려고요. 그것도 진짜니까요.”


나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만남의 순간을 기억해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오히려 하얀 행성이 내 마음속에 가득 자리한 듯, 든든한 기분이 든다.


“사실 그 행성에서 겪은 일보다 지금 제 상태가 더 거짓 같아요. 제가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에요. 마음이 편해진 것도 같고, 기운이 없는 것도 같아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


“괜찮아요. 중요한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진영 씨라는 거죠. 스스로 어딘가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김진영인 거예요.”


“이런 상태가 좀 어색해요.”


“혹시 싫은가요?”


“아니요. 싫지는 않아요. 좀 얼떨떨하다고 해야 할까요. 제 자신이 좀 낯설고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저도 천천히 적응 중이에요.”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음, 혹시 진영 씨는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우주비행사를 만나 본 적이 있나요?”


“만나보기는 했죠.”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모두 지구와 사람들에게 다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요. 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부분으로 많이 힘들어하죠. 귀환한 우주비행사 중의 일부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요. 탐사를 끝내고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믿지 못하고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해요.”


박연경 상담사는 말을 고르다가 원래 목소리보다 힘주어 말했다.


“허구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주에서의 기억들이 직접 목격한 것인지, 꿈속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단지 상상에 불과한 건지 스스로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거죠.”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우주에 나갔다 온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는 기분에 막막히 사로잡혔다. 박 상담사는 나를 다시 이 자리로 불러오려는 듯 금세 말을 이었다.


“당연히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몸을 숨기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해요. 하지만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과 기억을 공유하고, 상식적인 세상에 있는 덕분에 문제될 정도로 왜곡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죠. 그런데 홀로 우주로 나간 비행사들의 경우는 달라요. 언제나 홀로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가잖아요. 우리가 이전보다 우주를 많이 알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주에 비하면 아직 먼지 크기도 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우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우주비행사들은 기억을 건강하게 지탱해줄 것이 전무한 상태로 우주에 있다가 지구로 돌아오는 거예요. 충분히 혼란스러울 수 있죠. 이상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죠.”


“지금 와서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저도 그런 것 아닐까요?”


“네,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 저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자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든,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든, 기억을 철썩 같이 믿든, 끝까지 의심하든, 어느 쪽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느 누구도 진실을 확인할 수 없고요. 때때로 탐사 보고서를 조회해서 내담자의 기억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죠. 내담자가 진실로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부분의 기억을 오해하고 있는지 영영 알 수가 없어요. 아마 우주만 알겠죠. 하지만 침묵할 테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진영 씨의 과정과 비슷해요. 물론 학파마다 접근이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좁혀져요. 일어난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실재이든 착각이든 그 경험에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저도 그 과정 중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진영 씨처럼 아주 서서히 드러나요. 표상과 연결고리들이요. 과거의 사건과 이미지들, 간절히 바라던 대상들, 잊고만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긴밀하게 관계를 맺기 시작하죠. 내담자와 그런 지점들을 발견하고 이어나가는 일은 제게 정말 기쁜 일이에요. 마치 우주선을 도킹할 때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완전히 내담자와 연결되어서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저절로 공감되는 순간이죠.”


박 상담사의 설명을 들으며 지난 날 탐사했던 행성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별과 별 사이를 오가며 하나로 잇던 나의 여정은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했다.






34. 방랑자, 순례자 _ 진영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음의 위상 1부 보러가기 (01 - 30화)
마음의 위상 2부 보러가기 (31 -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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