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19

by 청화

며칠 후 동네 도서관 서고를 훑어보다가 [데미안]을 발견했다. 인영이 생각났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끝까지 읽지 못하고 반납한 일이 어쩐지 내심 미안쩍어 책을 꺼내 들었다. 사서의 사무적인 안내에 따라 회원가입을 마치고 책을 빌려 집으로 가지고 왔다. 방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책상에 앉았는데 책장은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괜히 책장을 거듭 넘기다가 종이에 중지 끝이 살짝 베었다.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물어 빨았다. 따끔하고 쓰라린 감각이 올라 서랍에서 연고와 반창고를 찾는 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연고를 꺼낸 후에 느직이 전화를 받았다. 재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뭐 좀 하고 있었어.”


“저번에 전화했는데, 못 받아서 전화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전화를 해.”


“바빴어. 근데 무슨 일로?”


나는 한 손으로 연고의 뚜껑을 돌리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냥 전화한 거야. 잘 지내나.”


“역시 내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


나는 왼쪽 어깨와 귀를 밀착시켜 그 사이에 휴대폰을 꼈다. 연고의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무튼, 별 일 없지?”


“나 좋은 소식 있어. 그래서 겸사겸사 전화한 거야.”


“좋은 소식? 설마.”


“여자 친구 생겼어.”


“해냈구나, 너.”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연고를 짜서 상처에 발랐다. 고개를 계속 옆으로 기울이고 있는 탓에 목이 결려왔다.


“여자 친구 생기고 너한테 바로 전화한 거야. 너는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계획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거든.” 나는 답 없이 연고의 뚜껑을 닫고는 휴대폰을 제대로 들었다. “참 그리고, 너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됐어. 별로 관심 없다고 했잖아.”


“아니, 내가 여자라고 해서 네가 괜히 거부감을 느끼는 거야. 사람 만난다고 생각해, 사람.”


“그게 그 말이야.”


“너 방학하고 나서 밖에 나오기는 했어? 안 들어봐도 뻔하다고. 집에만 있거나 나가봤자 동네 주변이나 어슬렁거렸겠지? 솔직히 말해봐. 방학하고 나서 다른 사람 아무도 안 만났지?” 나는 인영이 떠올랐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거 봐. 내 말 맞지? 혼자서만 지내지 말고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 해. 가뜩이나 이제 막 대학생이 됐는데 집에서 그러고 있으면 되겠어? 미팅은 대학생활의 꽃이란 말이야. 한번쯤은 경험해봐야지, 안 그래? 그리고 무조건 사귀어야 하는 것도 아니야. 마음에 들면 다시 만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그냥 친구로 지내도 되는 거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심각하게만 생각하는 거, 그거 병이야, 병.”


“혼자가 편해.”


“말이 안 통하네. 그래, 더 솔직히 말할게. 부탁 좀 들어줘. 내가 조금 난처한 상황이거든. 이 미팅이 지금 여자 친구가 생기기 전에 잡은 거란 말이야. 그때는 얘가 여자 친구가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미리 잡은 거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거야. 갑자기 취소하기도 좀 그렇고.”


“그냥 네가 나가. 네가 말한 대로 친구처럼 만나고 오면 되잖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그런 부분에서는 나는 꽤 신경 쓰는 편이거든. 여자 친구가 있는데 미팅에 나갈 수는 없지. 암, 그럼. 그건 모두에게 도리가 아니지.”


재준이 엄하게 말하는 탓에 재수가 없어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귀찮아 참았다.


“그럼 그냥 취소해.”


“취소할 수도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 소개받을 때 딱 영수 네 생각이 났어, 정말로. 네가 하면 좋을 것 같았거든. 딱 그런 느낌이 왔다니까. 나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나 믿고 딱 한 번만 나가봐. 이번에 별로면 앞으로는 절대 미팅 하라고 안 할게.” 재준의 목소리가 정말로 진지해서 당혹스러웠다. 내가 말을 잇지 않자 재준이 바로 말을 붙였다. “그럼 하는 거다? 알았지? 오케이.”


나는 읽던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우고 아주 덮었다. “이름이 뭔데?”


“오, 영수, 좋아.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 이제 내가 차근차근 상황을 말해줄게. 일단 이름은 수빈. 친구의 친구의 친구야. 모르는 사람이지 뭐. 일단 연락처 받고 문자 보냈는데, 수빈이가 제대로 대답은 안하고 약속 장소랑 시간을 딱 정해서 알려주더라고. 그리고 재미있는 게, 만나기 전까지 쓸데없이 연락하지 말래.”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잠깐 있어봐. 여기서 부터가 더 재미있어. 나도 당황해서 이걸 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연락이 하나 더 왔어. 그 사람은 빨간색 우산을 들고 나올 거래.”


“빨간색 우산?”


“그리고 나도 빨간색 우산을 가지고 나오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영수야, 집에 빨간색 우산 있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아. 잘됐다. 너는 그걸 가지고 나가면 되는 거야. 알았지? 약속장소는 이번 주 금요일, 건대입구역 이 번 출구 다섯 시. 출구 나가지 말고 안에서 보기로 했어.”


나는 의자에 앉아 상처를 바라보며 집안을 상상했다. 책꽂이, 책상 서랍, 신발장, 선반, 거실장, 옷장, 안방의 상자, 장롱 위를 생각했다. 빨간색 우산이 집 어디에 있을지 찾으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구석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순간 어디선가 붉은색을 보았고, 손가락 끝에 상처는 여전히 벌겋게 올라 있었다.


“오케이. 그럼 된 거다? 미팅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전화해. 영수야, 괜히 걱정하지 말고. 혹시 알아? 네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근데 미팅이 보통 이래?”


“아니지. 만나기 전에 연락하기도 하는데, 이 사람은 약속 장소에, 시간에, 우산까지 다 미리 정해놓은 거야. 이런 미팅은 아주 드물어.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괜히 더 기대되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나는 단지, 네가 내 생각이 났다고 해서 나가보겠다는 거야.”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대학생이 돼서 여자 친구 하나 없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다 너를 위해서 내가 이러는 거야. 이런 친구 두니까 좋지 않아?”


“그건 다녀와서 얘기해줄게.”


“좋아. 기대해도 좋을 거야. 약속시간 잊지 말고, 그리고 우산 잊지 말고, 알았지? 우산이 없으면 인연을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내가 말하면서도 왜 내가 더 설레지? 내가 미팅 하는 것 같네?”


재준은 내게 수빈의 번호를 알려주고는, 연락을 할지 말지는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건대 주변에 미팅 장소로 괜찮은 음식점과 카페를 여러 군데 일러주기 시작했다. 어디는 분위기가 어떻고, 어디는 맛이 좋은데 조금 가격이 비싸다거나, 또 다른 곳은 역과는 멀지만 얘기하기 좋은 곳이라며 이곳저곳을 늘어놓았다. 나는 재준의 말을 흘려들었다. 역과 가까운 곳 중에 적당한 음식점을 기억해둔 후로는 재준이 말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재준은 신이 난 듯 새로운 곳을 계속 소개했고, 급기야 옷차림도 조언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조합들이 하나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옷이 몇 벌 없었으므로 적당히 입고 나가겠다고 했다. 결국 재준과 여자 친구의 만남의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 부재중 전화가 하나 남아 있었다. 재준의 전화였다. 방금 전화를 하기 30분 전에 재준은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재준이 일러준 미팅 시간을 일정에 입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