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영에게 연락을 남기고 학교 정문에서 기다렸다. 방학 중에도 학교는 변함없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계속 오갔고, 그 앞으로 차들이 달렸다. 방학이라도 학교에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영을 마중할 겸 도서관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나를 알아보았는지 갑자기 속도를 내어 뛰어왔다. 금세 내 앞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미안. 좀 늦었죠?”
“천천히 오지 왜 뛰어 와요. 미안하게.”
“아니, 오래 기다릴까봐.” 인영은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뗐다. “어디 갈까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그런 것까지 미리 고민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즉흥적으로 말했다.
“술 한 잔 할래요?”
“술?”
“싫으면 그냥 카페 가도 돼요.”
인영은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뗐다. “아니에요. 술 한 잔 하러 가요.”
우리는 파전동동에 갔다. 여전히 주점 안으로 멜로디가 익숙한 오래된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동동주와 사이다 그리고 해물파전을 시켰다. 항아리가 금세 나왔고, 나는 재준처럼 사이다를 동동주에 말아 잔에 펐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들이켰다. 인영은 시원한 소리를 길게 냈다. 그때 주점 안으로 사람 세 명이 들어왔다. 내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에 인영이 말했다.
“그래서, 오늘 무슨 일 있었는데요?”
“그냥 좀…….” 나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무슨 일인데요?” 주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수다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입을 떼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자 인영이 말했다. “사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도 돼요. 우리가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처럼 그냥 앉아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해도 괜찮아요. 근데, 같이 술 먹으러 와서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으면 좀 이상하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 말하게 되네요.”
“미안해요.”
“그런 뜻 아니에요.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말을 잇지 않는 사이에 주문한 해물파전이 나왔다. 인영은 내 눈치를 보더니 파전을 찢어 입에 넣었다.
나는 왼쪽 뺨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인영은 우물거리던 파전을 얼른 삼키고 대답했다. “아버지?”
나는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고민했다.
때렸다. 때리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떠났다. 떠나고 싶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다.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끝냈으면 좋겠다. 수많은 문장으로 나의 말을 맺을 수 있었지만,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뒤를 잇는 모든 문장을 이미 그대로 행한 것 같은 착각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인영은 파전을 더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술을 들이켰다. 시원하기는 했지만 첫입만큼은 아니었다.
“무슨 일 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영이 물었다. “후회해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괜찮을 거예요.” 인영은 취소하듯 말을 바로 붙였다.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나는 고개를 돌려 벽면에 낙서를 뜻 없이 훑어보았다. 빼곡하게 글로 채워져 있었다. 여백이 없었다. 굵은 글씨 사이를 헤집다가 다소 초라하게 남아 있는 문장 위에 시선이 머물렀다.
너는 이제 괜찮은지 모르겠어. 예전처럼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많이 아파. 언제쯤 나도 괜찮아질지 알 수가 없어. 그래도 이제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어. 사실은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척 할 수도 있어.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괜찮아질 거야. 아프지도 않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나는 그 글을 빤히 눈에 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근데 정확히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 자체를 모르겠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모르면 해결 자체를 시도할 수가 없잖아요.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데.”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맞는 것 같아요. 무슨 문제인지를 우선 알아야, 뭘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근데 지금 나는 문제 자체를 모르겠어요. 모조리 다 잘못된 것 같아요.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막연해요. 온통 문제투성이라.”
“그렇단 말이죠?” 인영은 심각한 낯빛으로 말했다. “저번에 교수님 면담했거든요. 그때 그러시더라고요. 수학을 하다보면 뭐가 문제인지 알기 힘든 순간이 온대요. 증명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문제를 정확히 만들어내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우리는 이미 문제가 적혀 있고 답이 있는 안전한 영역에서 수학을 하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고민하고 고민하면 어딘가 답이 있는 문제 말이에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거든요. 이 앞에 있는 문제가 만약 답이 없다면, 눈앞에 있는 명제가 사실 아예 증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면, 그 작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까? 아니, 고민을 시도하기는 할까? 두려운 거예요. 아무리 고민해도 끝에서 답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잖아요. 답이 애초에 없다면 시간을 헛되게 보낸 거고.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 문제에는 답이 없다는 건가?”
“아니요. 아, 물론 그럴 지도 모르죠. 근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먼저 그 안에서 풀 만한 문제부터 찾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서로의 문제를 몰라요. 자기 자신도 모르고요.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의 그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건 저도 그렇고 모두가 그래요.”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인영은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가끔이라도 꼭 이렇게 힘들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해야 돼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라도 꼭.” 인영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대부분 혼자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이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때로는 다른 사람한테 나의 문제가 이래요. 이게 제 문제예요. 아니면, 오늘처럼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억지로라도 말해요. 안 그러면 혼자 매몰돼서 넋 놓고 시간만 보낼지도 몰라요. 이건 아직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다음으로 미뤄두는 것도 필요하고요. 조금 더 실력을 쌓으면 그때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잠시 미뤄두는 거죠. 마치 우리가 다음 전공과목을 듣기 위해서 필요한 선수과목을 수강하는 것처럼.”
“우리가 겪는 문제를 증명해야 하는 명제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저도 완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왜요?”
“거기에는 감정의 자리가 없잖아요.” 인영의 우울한 눈빛으로 홀로 잔을 비우고 말을 붙였다. “거기에는 감정이 없고 논리만 있잖아요. 오히려 명제처럼 생각하면 감정과도 더 멀어질 수 있어요. 그러면 잠시 미뤄두기도 편하고 거리를 두기도 수월하니까.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각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명제를 만들고 붙잡고 살아요. 피타고라스의 정리, 가우스의 정리, 페르마의 정리처럼 우리 각자도 인영의 정리, 영수의 정리, 그런 비슷한 정리 따위를 어쩔 수 없이 만들면서 살아왔고, 그걸 기준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다른 명제를 만들고 증명해 나가는 거죠. 수학이랑 비슷하게 말이에요.”
나는 인영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가능하다면 나의 복잡한 생각과 상황을 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재준의 잠정적인 명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는 묵묵히 인영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그녀의 말은 차갑고 논리적인 듯했지만 매우 씁쓸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면 감정은 해결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다루려고 해도, 사실 감정은 그대로 남는 것 같아서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말이에요.”
인영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홀로 동동주를 마셨고, 파전을 적당히 찢어 간장 소스에 찍어 먹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염려하며 인영을 기다렸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인영이 말했다. “그래서 그게 나한테는 난제인가 봐요. 그래서 아무리 뒤로 미루고 미루려고 해도 자꾸만 찾아오는 문제인가 봐요.”
나는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되뇌던 나의 단단함에 대한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얼마나 더 단단해져야할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답하지 못했다. 앞으로 언젠가 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막연히 답을 찾아 헤매다가 이내 인영을 응시하며 물었다.
“뭔지 물어봐도 돼요?”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나는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어떤 응답도 하지 못했다. 어쭙잖은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영의 말이 끝났으므로 마치 내가 말할 차례인 것처럼 어떤 책임감이 서서히 깃들었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게 어느 정도 힘든 일인지 저는 잘 몰라요.”
인영의 눈동자가 내게 머물렀다.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매일 울었어요. 주변에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고요.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이미 세상은 바뀐 거예요. 그런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서도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아빠는 죽었고 나는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미뤄두는 방법 밖에 없고요. 하지만 그 복잡한 감정은 수시로 저를 찾아와요. 저는 그게 싫어요. 내가 아무리 슬퍼하고 보고 싶어 해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요.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해요.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가끔은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인영은 깊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짜증나게도 지금이 그래요. 그게 지금 나를 찾아왔어요.”
나는 인영에게 미안했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필 아버지의 이야기를 인영의 앞에서 꺼낸 일이 후회스럽고 미안쩍었다. 나의 나약함을 나무랐다. 내가 강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의 일이 있고 나서 힘든 상태를 토로할 상대를 찾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었고,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인영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씁쓸하게 인영을 눈에 담았지만, 인영은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고,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듯 했고, 눈물을 참듯 콧물을 거듭 들이켰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냥 그대로 있었다. 같이 울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며 방금 전 찾은 벽의 낙서를 다시 읽었다.
잠시 후, 인영은 눈가를 보이지 않게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애써 밝은 얼굴을 짓는 듯했다.
나는 말했다. “미안해요. 아버지 얘기 꺼내서.”
“아니에요. 저도 오랜만에 꺼내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요.” 나는 여전히 겸연쩍은 마음으로 인영과 눈을 마주쳤다. 인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줄 몰랐잖아요.”
“그래도 미안해요.”
“아빠 얘기 더 해도 돼요?”
“물론.”
인영은 한결 편안하게 은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빠는 있잖아요? 내가 하는 어떤 질문이든 답해주시려고 노력하셨어요. 때로는 엉뚱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도 좋았어요. 사실 아빠도 모르겠으면 같이 찾아보기도 했어요. 아, 한번은 가족 여행을 갔어요.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이 있어서 아빠랑 내가 손을 잡고 가로지르면서 걸어갔어요. 그때 내가 그냥 물었어요. 아빠 왜 우리가 기찻길을 건너야 하는 거야? 하고. 근데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행한 두 직선은 만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건널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답을 듣고 나는 그랬어요. 뭐야 그게. 그리고는 손을 놓고 막 앞으로 달려갔어요. 기찻길을 넘었어요. 아빠는 나를 쫓아오고. 나는 그게 재미있으니까 계속 도망갔어요.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빠 목소리랑, 기찻길이랑, 햇볕이랑, 바람이랑, 주변에 나무들이랑 그런 것들이.”
“좋았겠어요.”
인영은 동동주를 한참 들이켜고 날숨을 길게 내쉰 후 말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선을 넘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선?”
“얼마 전까지는 물 흐르듯이 그 선을 넘어왔어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뭐 그런 경계 말이에요.” 인영은 손을 구부려 기억자로 만들고 어깨춤에서 가볍게 손목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 선을 만들었어요. 자. 다음에 네가 넘을 선은 이거야, 하면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든 뭐든 해서 그걸 넘어 왔어요. 그러면 또 다른 선이 있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그 중에 우리가 원하는 선은 하나도 없었어요. 내가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요?”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인영은 주저함 없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아무도 그 선을 말하지 않는 거. 아무도 내가 넘을 선을 만들어주지 않는 거요. 이제 우리 스스로 넘어갈 선을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거죠. 그런데 여태껏 다른 사람이 말한 선만 보고 넘다보니까, 이제는 그 방법을 내가 잊어버린 것 같아요. 나는 그게 무섭고 불안해요.”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겠어요.”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가 그 선을 만들고 넘어야 해요. 만들지도 않고 넘어가지도 않으면 우리는 다음 문제도 만나지 못하고 새로운 세계도 만나지 못해요.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나아가려면, 그런 수도 없는 평행선들을 우리 힘으로 넘어야 해요. 하지만 한번 넘으면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요. 알을 깨고 나온 후에는 다시 알로 들어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해요. 지금은 내가 아빠가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제는 절대로 아빠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어요.”
나는 포근한 기찻길의 풍경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어린 인영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정경 위로 점차 회색빛이 감돌았고,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선로이지만 저 멀리서 경적을 울리며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모습을 내치기 위해서라도 나는 동동주를 끝까지 들이켰다.
주점으로 두 남녀가 급하게 내려왔다. 우리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쏠렸다. 머리카락과 옷은 젖어 있었다. 남자가 어깨 위를 털며 말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냐. 큰일 날 뻔 했네.”
생생하게 전한 비 소식에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순식간에 날씨로 바뀐 듯했다.
나는 말했다. “우산 없는데.”
“오늘 소나기 온다고 했어요.”
“곧 장마네요. 그럴 때는 어디 돌아다니지 않고 조용히 어디 박혀 있는 게 최고죠.”
“맞아요. 그래도 집에 있기 뭐하면 학교 와요. 좀 멀어서 오기 힘들까요?”
“아무래도 좀 멀죠? 그래도 가끔 올게.”
“응. 나는 사 층 그 자리에 계속 앉거든요. 그 자리는 사람이 오지 않아서 좋아요.”
나는 끄덕이며 빈 잔을 보며 말했다. “더 마실까?”
인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병맥주를 하나 더 시켰다.
인영이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만난 건데, 내 얘기만 잔뜩 했네.”
“아뇨. 나도 덕분에 좀 괜찮아졌어요. 물론 해결이 된 건 아니에요. 여전히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잠시 미뤄둘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인영은 술도 마시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추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눈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인영의 말을 경청하려고 했지만, 수시로 기찻길과 부녀의 모습이 떠올라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몰래 미안했다. 인영의 표정은 얘기를 하면 할수록 더욱 편안해 보였다. 서서히 풀리는 인영의 얼굴에 오히려 나의 답답함까지 조금씩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 인영은 글로 가득한 벽에다가 무엇이라 쓰고 있었다. 쓸 여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의아했지만, 인영은 한쪽 귀퉁이에다가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공백이 너무 좁아서 글씨는 작았다. 인영이 벽에서 손을 떼고 나를 흡족한 미소로 바라볼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무슨 말을 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