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생기부의 진짜 변별력에 대하여
대입 설명회장의 분위기는 뜨거운 학구열로 가득 찼다. 강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그 확신은 학부모들의 불안을 자양분 삼아 몸집을 불렸다.
"이제 대학은 AI로 생기부를 쓰는 것을 기본값으로 생각합니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고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변별력이 없습니다. 이제는 AI가 할 수 없는 것을 담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기시감과 함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 역시 아이들의 생기부를 쓸 때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문장의 흐름을 잡기 위해 AI와 대화한다. 질문 하나면 수만 권의 책을 요약하고 탐구 보고서의 목차를 뽑아주는 시대.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영토'는 어디일까.
나는 그것이 '행동력'이라고 확신한다. AI는 천재적인 지능을 가졌을지언정 육체가 없다. 계획을 짜고 지시를 내릴 순 있지만, 운동화 끈을 묶고 문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실행의 고통'이 빠진 지식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시대가 온 것이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면 이 현실은 더욱 극명해진다. 요즘 아이들에게 논술이나 발표 자료를 맡기면 너무나 당연하게 AI부터 켠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조별 활동의 '치열함'을 강조하는 전략을 썼다. 대학이 협업의 어려움을 높게 산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사전 조사와 사후 변화까지 요구하는 깐깐한 과제를 내주었다. "이 조는 정말 빡세게 부딪혔구나"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올해 여러 강의를 들으며 내 생각은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지식을 얼마나 많이 인출하느냐보다, 그 지식을 '실제 활동'으로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생기부의 생명력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고1, 2 학생들의 탐구 주제는 대부분 '있어 보이는' 것들에 매몰되어 있다. 생명공학 희망자는 유전자 가위, 화학 희망자는 화장품 소재를 약속이라도 한 듯 들고 온다. 그나마 직접 코딩을 짜며 실패의 '로그(Log)'를 남기는 컴퓨터 공학 지망생들이 나은 편이다. 대다수의 아이는 AI가 3초 만에 요약해 준 이론의 성벽 뒤로 숨어버린다.
나는 올해 아이들에게 무거운 주문을 던졌다. "제발 있어 보이는 주제 좀 버려봐. 대신 네가 공부하다가 진짜 재미있다고 느꼈던 그 사소한 부분에서 심화 탐구를 시작해 봐."
우리 반 상위권 학생 두 명이 나를 찾아왔다. 통합과학 시간에 배운 '운동량과 충격량'이 흥미로웠다며 전차와 전투기라는 소재까지는 잘 찾아왔지만, 거기서 발이 묶였다. "선생님, 소재는 찾았는데 이걸 활동으로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AI를 돌려봐도 이론적인 대답뿐이에요."
나의 전공은 음악이다. 이과적인 질문을 받으면 나 역시 난처해진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잡다하게 읽어온 책들과 경험들이 머릿속에서 화음을 이루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직접 짠 '학생의 시점으로 쓴 탐구 시나리오'를 건넸다.
[탐구 스크립트: 텍스트 너머의 비행]
"과학 시간에 ‘물체가 부딪히는 시간을 길게 하면 충격이 줄어든다’는 원리를 배웠습니다. 저는 이 원리가 엄청나게 빠른 전투기 안에서는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방향을 확 바꾸는 조종사는 그만큼 엄청난 충격을 몸으로 받아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궁금증을 풀고 싶어 직접 성남 에어쇼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만난 조종사분들께 여쭤보니, 전투기를 더 빠르게 만드는 기술보다 ‘조종사의 몸이 버티는 한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조종사들은 이 엄청난 충격을 버티기 위해 상상 이상의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의 몸무게보다 몇 배나 무거운 중력을 견디는 'G-테스트'가 대표적인데, 피가 아래로 쏠려 기절하지 않으려고 특수 슈트를 입고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는 훈련을 반복합니다.
실제 조종석에 앉아보니 생각보다 훨씬 좁아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렇게 좁은 이유는 공기 저항을 줄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전투기가 갑자기 움직일 때 조종사의 몸이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줌으로써 충격을 분산시키고 조종사가 근육에 힘을 더 잘 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전투기를 만들어도 결국 사람이 버티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왜 요즘 나라마다 조종사가 필요 없는 '무인 전투기' 개발에 힘을 쏟는지 그 이유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AI가 준 것은 '지식'이었지만, 내가 준 것은 '서사(Narrative)'였기 때문이다. 에어쇼 현장의 소음, 조종사의 땀방울, 좁은 공간이 주는 압박감. 이것은 AI가 절대로 생성할 수 없는, 오직 '행동하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데이터다.
나는 남들보다 음악을 오래 공부했지만, 그만큼 다른 분야에 대한 갈증이 컸다. 기초 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책을 가리지 않고 잡다하게 읽었다. 신규 연수 때 한 장학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늘 가슴에 남아있다.
"여러분, 감옥 가는 것 빼고는 다 해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때는 웃어넘겼던 그 말이 지금 내 교육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음악 교사인 내가 전투기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코딩의 실패를 공감하며,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쌓인 '잡다한 경험'들 덕분이다. 지금 당장은 무용한 파편처럼 보여도,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아이의 막힌 길을 뚫어줄 '치트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AI 시대의 생기부는 이제 '무엇을 아는가'를 넘어 '무엇을 했는가'의 기록이어야 한다. 지식의 나열은 AI에게 맡겨도 좋다. 하지만 그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 운동화 끈을 묶고 에어쇼장으로, 실험실로, 도서관의 깊은 서가로 달려가는 그 '무모한 실행력'만큼은 인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말한다. "질문하는 법을 모르면 AI도 답을 줄 수 없어.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완성하는 건 네 검색 능력이 아니라, 바로 너의 발자국이란다."
나 역시 내일은 또 어떤 잡다한 세계에 발을 담가볼지 고민한다.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감옥만 빼고 세상 모든 곳을 탐닉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