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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아니라 화병

by yuri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없던 문서를 새로 만들라고 하는데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은 없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본인이 예전에 결제한 것을 그대로 똑같이 보고 결재를 상신했는데 전임자는 맞고 나는 잘못했다고 하는…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꽤 오랜 기간 전임자, 전전임자들이 오류를 발견하지 못해 문서가 잘못 작성되고 있었는데 하필 그 오류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라 반드시 누군가는 수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였습니다. "여기서 오류가 발견돼서 이렇게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쓸데없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말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혼냅니다. 몇 날 며칠을 관련 법령과 지침, 가이드북 등을 뒤져서 수정 근거를 마련해 오면 그 공은 제가 아니라 본인의 공니다. 자료도 다 본인이 찾은 것입니다.




한 번은 같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부서 이동을 요청을 했는데 "1년도 안 돼서 부서를 교체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답변만 받고 레 떨레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길래 저를 문제아 취급하시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랬어. 언제, 어디서, 몇 시, 몇 분에 그랬는지 정확히 말해봐"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면서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얼굴을 마주치며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는데 다행히 음악선생인지라 음악실이 있어 되도록 그곳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습니다. 물론 음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을 안 좋게 보시는 분도 일부 계셨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시는 출근하는 것 자체가 곤혹이었습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 많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합니다. 인사배치를 할 때도 성격이 강한 사람들 주위로 유순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을 주로 배치합니다.


천성이 착하면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해도 억울해하지 않고 잘 넘어가겠지만 전 어중간하게 착한지라 분노는 하지만 표출하지 못해 속에서 썩어가게 두었습니다.

분노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표출이 되는데 나를 힘들게 한 당사자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니 '에나 이 등신아. 왜 이렇고 사니', '이런 상황이 또 일어나는 것을 보니 네가 잘못된 거다'라는 말을 하며 저 스스로를 공격했습니다.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고 학급교체 처분이 떨어져 우리 반 애 한 명을 다른 반으로 보내게 됐는데 "선생님께서 힘들다고 못하겠다고 해서 다른 반 선생님들이 아무도 안 하겠다고 하는 걸 ○○ 선생님을 겨우 설득해서 맡아달라고 한 거니까 그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기프트콘이나 선물 보내주세요. 그게 예의예요"라는 말을 듣고 '왜 내가 피해자인데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애초에 우리 반에 남자 원탑과 여자 원탑을 넣어놓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다른 선생님들이 우리 반 수업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내가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며 "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날도 남편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듣다가 "넌 왜 당하고만 있어. 뭐라고 해야지"라고 언성을 높여 이야기하더군요. "누구는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만 이렇게 당하는 거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었데. 나도 안 당하고 살고 싶어. 그런데 성격이 이렇게 생겨먹은걸 나보고 어쩌라고"라고 말하며 화를 냈습니다. 울분 섞인 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왜 너는 그 사람한테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나한테 화를 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하고 화가 났는데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남말 할 처지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화나게 만든 사람에게 화를 내야 되는데 남편이 편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밖에서 힘들게 감정노동을 하며 사회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아이가 조금만 잘못해도 "훈육"을 가장해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있더군요.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할 망정 막대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현타가 왔습니다.


지금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할 일을 저에게 미루는 사람에게도 "이건 선생님이 하셔야죠"라고 웃으면서 말합니다. 처음이 어렵지 계속하면 할만합니다.

가끔 저에게 '쉿'이라는 손짓과 아이컨텍을 보내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래도 해서 후회할 바에는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언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했나' 할 정도로 너무도 마음 편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업무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감정소모에 에너지를 쓰지 않으니 훨씬 여유습니다.

참기만 하면 병납니다. 우울증이 아니라 화병일 수 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화병은 속으로 들어가는 말을 잡아다가 입 밖으로 내놓아야만 풀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을 잘 봐가면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듯이 '너무 나갔나' 싶을 때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쪽지와 함께 자리에 놓아둡니다.


적당히 표출하고 그때그때 풀어주는 게 제정신 건강에 좋고 일하는데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네네"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도 알기 때문에 조심하는 게 느껴집니다. 물론 한 번씩 말속에 칼이 보이지만 저 역시 같이 칼을 던지기 때문에 딱히 억울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습니다.

담아두지 말고 표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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