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단계 Fade Out(장막이 거두어진다): 평화시기
남자는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정상 출근 시간보다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평소 요리가 취미인 그는 아내가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직장 동료들을 위해 베이컨 샌드위치를 만들어 포장했다.
"오빠, 샌드위치를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어?"
그녀가 주방으로 다가와 물었다.
"응, 자기 출근해서 동료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만들었지."
내가 말했다.
"고마워, 이따 퇴근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먼저 갈게 이따 봐."
그녀는 낭랑하게 말하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직장으로 향하는 길은 신호가 많고 차선이 좁아 차가 많이 막힌다. 그날따라 모든 신호가 그를 기다렸다는 듯 초록으로 바뀌었고 남자는 수월하게 출근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업무들이 속속 처리되었고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기분 좋은 오후였다.
4단계 Double Take(대비한다): 경계태세
남자는 건물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외식 장소를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인기척을 내며 그를 불러 세웠다.
"형, 오늘 한 잔 할까?, 애 나오면 술 마실 수도 없을 텐데, 오늘 6시 고? 막창에 소주 고고?"
그 녀석이 술을 먹자고 할 때마다 늘 하는 멘트로 남자를 유혹했다.
"오 좋지! 6시? 그래, 맞춰 나갈게. 늘 먹던 거기?"
"형, 근데 미리 허락 안 받아도 괜찮아? 못 나오는 거 아냐? 요즘 꽉 잡혀 살잖아."
그 녀석이 나를 도발했다.
"무슨, 가는 길에 말하면 돼. 이따 보자."
유혹에 넘어간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잠시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오빠. 나 퇴근 중인데 왜?"
전화기 너머로 그녀 특유의 밝고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자리 빠르게 가기 전략을 사용할 차례였다.
"자기야, 좀 전에 퇴근하면서 그 녀석이랑 마주쳤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봐. 오늘 갑자기 우울하다며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보네? 무슨 일인지 얘기 좀 들어줘야 할 것 같아,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이고. 그래서 6시까지 나가기로 했어. 오늘 저녁은 자기가 좋아하는 참치 초밥 시켜놓을게요. 어때?"
"... 갑자기? 미리 말도 안 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청명함이 빠져 있었다.
"미안, 당장 급하게 보자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어. 일단 집 가서 봐요."
남자가 말했다.
"..... 알았어."
그녀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보통 15분이면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막히는지, 신호에 걸릴 때마다 남자는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선뜻 술자리를 허락한 적이 없는, 오늘도 못마땅한 티를 언어에 담아 팍팍 던지는 그녀의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3단계 Round House(천막을 돈다): 준전시대비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먼저 와서 씻고 있었다. 그녀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시계를 보니 17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는 서둘렀다. 싱크대에 쌓여 있는 식기들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빨래통에 쌓여 있는 옷들을 개어 옷장에 넣었다. 구석구석 진공청소기를 돌렸고, 주말에만 가동하는 물걸레 청소기로 먼지 가득한 집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모든 작전을 끝내고 나니 17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10분 뒤에는 출발해야 약속한 18시까지 집결지로 이동할 수 있었기에 남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간밤에 분리수거를 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속히 아내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거북이처럼 기어 나왔고 남자의 몸은 즉시 욕실로 투입되었다. 그는 5분 대기조 출동 때보다 빠른 동작으로 샤워를 마치고 평상복으로 환복 한 후 거실로 향했다. 전등이 하나 나갔는지 깜빡거리는 거실 천장 불빛 아래 아내가 팔짱을 낀 채 사형수처럼 앉아 있었다.
2단계 Fast Pace(천막을 도는 속도를 높인다): 전쟁준비완료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오빠 갔다 올게. 밥 오면 먹고 쉬고 있어요."
황급히 양말을 신으며 남자가 말했다.
"오빠, 나 서운해. 요즘 너무 자주 나가는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약속 있으면 미리 말해 달라고 했잖아."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술 마신 지 3주는 넘은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은 그 녀석이 갑자기 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잖아. 일찍 들어올게요."
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조로 남자가 말했다.
"오빠는 일찍 들어온다면서 술 마시러 나갈 때마다가 만취해서 새벽 2시는 넘어야 들어오잖아. 그때까지 집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생각해 봤어? 다른 남편들은 뱃속에 아이 태교 동화도 읽어주고 한다는데, 오빠는 가족보다 술 마시는 게 더 중요해? 우리 육아 계획도 같이 세워야 하잖아. 그 녀석이랑은 직장에서 매일 보잖아. 저녁에 또 봐야겠어?"
그녀가 쏘아붙였다. 이럴 때 그녀는 1초에 17음절씩 내뱉는 래퍼 아웃사이더를 가볍게 능가한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귀로 떨어지는 포화를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신혼 때 장만한 아날로그 벽시계의 침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출발해도 10분은 늦겠네.'
남자는 생각했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길래 또 보는 거야? 걔가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 되는 거야? 가정에 너무 책임감이 없는 거 아냐?"
'책임감이 없다'라는 말이 미사일처럼 날아와 남자의 귀에 박혔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담긴 그 언어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1단계 Cocked Pistol(권총을 장전한다): 전시돌입
"아니, 어째서 단 한 번을 흔쾌히 나갔다오라고 하지 않는 거야? 내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거야?(사실 나가고 싶은 게 맞다) 왜 또 태교나 가족 얘기 운운하며 그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건데? 퇴근하고 집청소하고 빨래 개고 너 먹을 음식까지 시켜놨는데 뭐가 책임감이 없다는 거야? 자기는 결혼하고 한 번이라도 음식물 쓰레기 버리거나 화장실 청소 한 적 있어? 요리도 내가 다 하잖아. 그런데, 뭐, 책임감? 기가 찬다 정말."
남자가 대응사격을 했다. 술자리 가기 전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는 타들어 갈 듯한 눈빛으로 아내를 쏘아보았다.
"오빠, 내가 가사에 소홀한 건 인정할게. 하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게 아니잖아. 나를 좀 챙겨달라는 거고, 술약속 같은 건 미리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당일에 이렇게 말하는 거 나 싫다고 했잖아."
그녀가 눈물 글썽이며 호소했다.
"아니, 지금 네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나 술 마시러 가는 거 그거 하나만 가지고 내 사람됨 전체를 판단하고 있잖아. 책임감 없다는 그 말이 내가 가족을 위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매일도 아니고 달에 한두 번 친구랑 술 마시러 가는데, 그걸 내가 눈치 보면서 못 가는 게 너무 웃기지 않아? 한두 번 술 마시러 가면 내가 너 안 챙기는 거야? 그리고 왜 내가 허락을 받아야 해?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지금도 친구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18시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약속시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인 거 알면서, 꼭 나가기 직전에 이런 얘기해서 사람을 괴롭혀야겠어?"
남자는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상했길래 나한테 소리 지르며 화내는 거야? 내가 나쁘다는 거야? 그 녀석이랑 약속한 시간 못 지키는 게 그렇게 억울해? 나는 그냥 내 생각 좀 해달라고 하는 거라고!"
여자도 격분해서 소리쳤다.
"하..."
외마디 탄식과 함께 남자는 침묵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솔직히 난 오빠가 술자리 다니는 거 별로 좋지 않아. 늦게 들어오는 것도 싫어. 그리고 내 허락도 받았으면 좋겠어. 가족이니까. 오빠 한 사람만 기다리며 정승처럼 집에 있는 나는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오빠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말 좀 해봐."
남자는 사고를 정지하고 벽시계만 쳐다보았다. 24시간 같은 20분이 흘렀고 그의 휴대전화에서는 진동이 거듭 울리고 있었다.
"하.. 오빠가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화내는지 모르겠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술자리 가는 거 미리 알려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나한테 화내고 침묵으로 일관하면 결국에는 내가 다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오빠 늦었다며, 다녀와. 다녀와서 얘기해."
아내가 말했다.
남자는 일말의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0단계 Ceasefire Negotiaion(휴전 협상, 물론 이 단계는 실제 DEFCON에는 없음)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남자는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갈 수 있었다. 그 녀석과 곱창을 씹으며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원하는 만큼 마셨다. 남자는 가득 채운 술잔 하나에 아내와 싸웠던 사실을, 다른 하나에 그녀에게 그렇게 화를 내었던 감정을, 또 다른 하나에 내뱉었던 말들을 놀랄 만큼 빠르게 비웠다. 그의 기분은 한 결 나아졌고 어느덧 귀가할 시간이 되었다. 자정 즈음 들어간, 어둠이 가득한 안방에는 당면한 과제가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남자는 알코올 향기를 없애고 최대한 용모를 바르게 한 후 잠옷을 입고 드넓은 침대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몸을 아내 쪽으로 돌려 살며시 등뒤로 다가가 팔베개를 하며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남자가 말했다.
"뭐가, 미안한데?"
여자가 말했다. 그렇다. 구체적 발화가 중요하다.
"오늘 사전에 언급도 없이 급하게 술 약속 잡았는데, 허락받지도 않고 나간다고 해서 미안해. 또 언쟁이 있으면 차분하게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내가 내입장만 생각해서 소리치고 침묵으로 일관해서 미안해."
"오빠,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는 오늘 잠들기 전에 이건 꼭 말하고 자야겠어. 아까 강조하긴 했지만 우린 가족이잖아. 오빠의 입장도 있겠지만 나는 오빠가 나를 좀 더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술 약속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사전에 오빠가 나한테 허락받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후 정확히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그녀의 발화가 이어졌다. 남자는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내려 노력하며, 묵묵히, 반항하지 않고, 아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데프콘 5단계 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