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용론(Pragmatics)의 쓸모

by Damon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화용론을 "말하는 이, 듣는 이, 시간, 장소 따위로 구성되는 맥락과 관련하여 문장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미론의 한 분야"로 정의하고 있다. 다음 주어진 상황에서, 부부의 대화를 살펴보자.


상황- 부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거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남편은 창가 쪽에, 아내는 거실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아내 A: 오빠, 거실이 좀 추워.

남편 B: 응, 춥네.


위 대화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아내 A의 말이 '거실의 춥다'라는 내용을 단순히 진술하는 평서형 발화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아마도 남편 B의 답변은 그녀의 폭력성을 자극해 그의 등짝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을 선사했을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의 다음 대화를 주목해 보자.


아내 C: 오빠, 거실이 좀 추워.

남편 D: 아이고 울 애기, 추웠어요? 오빠가 얼른 창문 닫아줄게요!


위 대화는 표면적 의미만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거실이 좀 춥다'라는 발화는 '거실의 온도가 낮아 나는 추위를 느낀다'라는 단순한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단순한 발화가 '창문을 닫아라'라는 명령어가 되어 남편의 엉덩이를 소파로부터 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인가?

화용론의 측면에서 위 대화를 분석하면 남편 D의 답변은 적절한다. 아내 C의 발화에는 특정한 맥락과 장면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제(Presupposition)와 함축(Implicature)이 내포된 간접화행(Indirect speech act)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내 C의 발화에는 '거실에 창문이 있다', '창문이 열려 있고 쌀쌀한 바람이 거실로 들어온다', '청자가 화자보다 창문에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화자는 청자가 자신의 어떤 요구든 들어줄 것을 알고 있다' 등의 전제가 깔려 있다. 이것은 화자와 청자가 모두 공유하는 배경지식이 되고, 남편 D는 자신이 처한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아내 C의 발언에는 '거실의 온도가 낮다'라는 표면적 의미 이외에도 '거실의 온도가 낮아 내가 추우니 창문을 닫아 달라.'라는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내 C의 발화는 '거실이 춥다는 의견의 표현'이 아니라 '남편 D가 창문을 닫아주기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앞선 사례에서 보이듯, 일련의 사고 과정을 통해 화자와 청자의 언어 사용이 맥락(context)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를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바로 화용론인 것이다. 이러한 화용론적 능력의 함양은 우리의 가정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인 나의 관점에서 아내가 사용하는 화법은 간접화행의 무수한 향연이었다. "오빠, 나 살 좀 찐 것 같아",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없네", "오늘 나갈 때 입을 옷인데, 이게 나아, 저게 나아?" 등과 같은 그녀의 발언들은 위기를 초래했다. 특정 맥락에서 그녀의 발화 속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고, 화용론적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언어를 전공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화용론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맥락 안에서 언어의 의미를 위트 있게 비틀 수 있다. 고로 타인에게는 한없는 하회탈이면서 남편에게만은 무표정인 아내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실전에서 활용할만하다.


상황- 남편과 아내가 나란히 걸어가며 산책을 하고 있다.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남편: "여보, 나 팔짱 좀 껴도 돼?"

아내: (수줍어하며) "응."

남편: (두 손을 자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가져가 팔짱을 끼며) "어우 춥다."


우리의 아내들은 간접화행의 전문가이며 청자인 남편들로 하여금, 청자가 화용론적 능력이 있고 없고 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요구한다. 단번에 아내의 발화 의도를 파악하는 사내들은 가정생활 전반에 걸쳐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화용론을 적극적으로 배워 실생활에 유의미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사내들이여, 청력에만 기대어서는 실제로 들리는 소리만 듣게 된다. 그녀의 마음에도 기대어보자. 사는 게 더 따뜻해질 것이다.


각별히 주의해야 할 아내들의 말과 숨은 의도를 문미에 두었다. 화용론에 미숙한 사내들을 위해 모범 답변 또한 달아놓았다. 교과서처럼 달달 외우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어휘를 바꾸어 활용하길 바란다.


1. (더러워진 집을 청소하며) "그냥 내가 할게."

가. 숨은 의도: "자존심이 상해서 내가 하겠다고 말했지만, 전부 네가 다 해줬으면 좋겠어."

나. 모범 답변: "그 몸뚱이 당장 소파로 보내. 내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2. (외식을 하거나 배달 음식을 고르면서) "뭐 먹고 싶어?"

가. 숨은 의도: "사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어. 하지만 네가 먼저 말해줘야 내가 기분 좋게 그걸 고를 수 있어."

나. 모범 답변: "지난번에 자기가 맛있게 먹었던 거. 그거 먹자. 그래 거기 그거."


3. (쇼핑을 가기 전 미리 검색해 둔 옷을 보여주며) "오늘은 그냥 이거 하나만 사면 돼."

가. 숨은 의도: "오늘도 지나가다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건 다 살 거야."

나. 모범 답변: "이것만 사면 주차비 내야 해. 어차피 10만 원 이상 사야 하니까 여기저기 다 돌아보자."


4. (잠 자기 전 침대에서)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가. 숨은 의도

1) "다 아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해."

2) "나 오빠한테 불만 많아. 한 시간 정도 말할 거니까 대꾸하지 말고 듣고만 있어."

나. 모범 답변

1) (잘못한 사실에 대한 빠른 인정을 우선 언급하며) "어제 늦게 들어와서 미안해요. 친구가 자꾸 한 잔만 더 하자고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제 절대 늦지 않을게. 혹시라도 늦게 되면 미리 연락할게요."

2) (이야기를 듣다가 절대 졸지 않아야 한다) "응, 자기 말이 맞아. 내가 고칠게. 응, 맞아. 내가 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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