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세계는 AI와 휴머노이드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유래없는 변화를 맞이했다. 삶은 편리해졌으나 지구는 급속히 피폐해져 갔고, 결국 지구온난화와 심각한 공해, 기후붕괴와 인구과밀화, 테러, 인종차별, 종교문제, 자원의 고갈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끝내 국가 간 전쟁으로 비화한 이 재앙은 단 13일 만에 전 세계를 폐허로 만들었다.
역사는 이를 ‘마지막 전쟁(The Last War)’이라 불렀다.
마지막 전쟁 이후 핵미세먼지와 자연재해가 잇따르며 그나마 지탱하던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결국 각국의 정부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채, 인류의 생존을 위해 AI를 중재자로 내세우고 각자의 주권을 AI에 위임하였다. 이 결정은 인류를 구한 동시에, 세상을 바꾸게 되었는데 AI가 세계를 통제하고 휴머노이드가 노동의 주체가 된 세상,
우리는 이를 ‘위대한 결정(The Greatest Decision)’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하 깊숙한 벙커에 숨어 들어가 오랜 시간 동안 지내야 했고, 50년의 시간이 흐른 뒤, AI는 대기오염과 지각이 안정되었다는 분석을 내놓았고, 비로소 인간은 두터운 보호장비와 헬멧을 착용한 채 지상 위로 나올 수 있었다. 그사이 AI는 인간을 보호하고 지구를 회복시키기 위해 전 지구적 통합국가인 지구연합 EU(Earth Union)를 창설하여 정치와 경제, 언어와 문자까지 모두 통합한 초국가 체제를 설계했고, 스스로를 Director라 칭했다. 또한 각각의 행정단위를 Zone이라 불리는 구역으로 설정하여 모든 인간은 출생시점부터 라이선스 제도하에서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평생 추적 관리되었다. 이러한 세상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간 대신 Director가 관리와 통제를 통해 완벽하게 질서를 구축했고, 휴머노이드가 생산과 개발에 투입되어 체제를 유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헬맷인데, 헬맷을 착용해야 모든 언어와 문자가 공용어로 실시간 변환되고 오염된 대기에서 숨을 쉴 수 있으며, 모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지금의 완벽한 체제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은 헬멧을 통해 Director와 연결되어 있었다.
KS3019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나 3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다.
퇴근 시각이 막 지난 오후 6시.
KS3019는 하루 종일 기계음과 모니터 빛 속에 갇혀 있다가, 마치 숨통을 틔우려는 듯 경찰국을 빠져나왔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자, 심장이 조용히 두근거렸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 그는 며칠 전부터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을 미리 예약해 두었고, 여자친구인 EJ3242와 저녁을 함께하기로 한 날이었다.
식당 안은 부드러운 간접조명이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는 도로 위 네온사인이 물결치듯 번졌다. 잠시 후, 따끈한 밥 위에 차가운 연어가 얹힌 혼마구로텐동이 조심스레 놓였다. 오래전 일부 구역에서만 전해 내려온 전통 음식. EJ3242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였다. 그녀는 수증기를 머금은 눈으로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젓가락을 들며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EJ3242는 요리 라이선스가 있긴 하지만 정작 직접 요리하기보다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KS3019와 EJ3242 모두 연애 라이선스 보유자이므로 연애목적으로 만나거나 동거하는 것이 허용된 상태이나. KS3019는 아직 결혼 라이선스가 없어 둘은 더 이상의 관계발전을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각 구역별 라이선스 발급처에서는 매달 한 번씩 해당일에 상응하는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라이선스 발급을 해주는데, 간단한 몇 가지 필기검사와 DNA 및 뇌파검사를 통해 발급여부를 결정한다. DNA 및 뇌파검사는 AI가 측정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으며, 이를 통해 적합한 체질과 심리를 가졌는지 판단하게 된다. KS3019는 3일 후에 결혼 라이선스 발급을 받기로 되어있다. 둘은 결혼문제 때문에 상의할 겸 오늘 보기로 한 것이다.
“받는데 문제없겠지?”
EJ3242의 목소리는 낮고 가늘었다. 그녀는 시선을 밥그릇에 고정한 채, 차가운 연어 조각을 뜨거운 밥 위에 올려놓으며 말끝을 떨구었다. 조명이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닿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그림자처럼 가라앉은 불안이 번졌다.
“연애 라이선스 있는 사람 중 결혼 라이선스 발급에 실패하는 확률이 3% 미만이라는데 설마…”
입으로는 태연했지만, KS3019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에 KS3019는 당연히 결혼 라이선스가 발급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막상 심사날이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한번 발급이 거부되면 평생 다시는 발급 신청할 수 없으며, 라이선스 없이 결혼했다가는 위법행위로 인해 곧바로 직업 라이선스를 반납해야 했다. 위반사항의 중요성 여부에 따라 본인의 선택이 아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몇 가지의 라이선스가 곧바로 박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KS3019 입장에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달에 좀 바쁘기도 해서 다음 달로 결혼 라이선스 발급을 미루면 어떨까?”
“왜? 휴가까지 냈잖아.”
“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휴가를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알잖아. 이번 달에 우리 지역 AI센터 해킹시도 때문에 떠들썩한 거…”
“아… 그렇지. 바쁘면 할 수 없지. 그런데 빨리 발급받아야 결혼할 수 있으니, 다음 달에는 꼭 해야 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마워”
2일 전, Zone113 구역 내 AI센터 네트워크에 불법적인 침입시도기 포착되었으나, 3초 만에 해결되었다. 정확히는 2.87초, Director는 즉시 네트워크를 차단했고, 동시에 악성코드를 찾아 제거했으며, 순식간에 보안체계 강화를 통해 오히려 AI센터의 보안망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켜 버렸다. 분석에 의하면 현 수준의 보안망에서 다시 해킹을 시도하려면 앞으로 34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마저도 3초 이내 해결되어 버리겠지만… 오히려 해킹시도가 Director에게 새로운 위험요소를 알려주고 그것을 학습시켜 더 강화하는 방법을 역으로 찾아내게 한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야.”
JQ9920는 언제나처럼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완벽한 세상에서 어떤 불만이 있길래 해킹시도라는 걸 하는 거지?”
“불만이 아니라… 불안해서인가…”
KS3019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뭐라고 했어?”
“아니야. 아무 말도… 순찰이나 나가지.”
HUD에 임무정보가 띄워졌다.
KS3019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완벽한 사회에서 거부당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는 뜻일지도 모르다. 그 생각이 가장 두려웠다.
‘적발목표 : 취미 위반자 1명, 결혼 위반자 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