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현 <동해 생활>
1년 차 백수 아내와 프리랜서 남편 조합의 우리 부부는, 지난주 월요일-일주일 중 가장 비선호 요일이 분명한-에 강원도 동해시로 급 여행을 떠났다. 연애시절 이후 거의 10년 만의 동해 여행이었다. 그것도 휴가가 아닌 자유의 몸으로 가는 첫 동해.
최근 국내여행을 가면 그 여행지의 독립책방을 방문해서 그 지역과 관련된 책을 골라 사는 여행취향이 생겼다. 아무래도 백수가 되고 난 뒤 늘 목마른 성취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독서인지라 없는 살림에 유일한 사치가 도서 구매이기도 하고 지독한 낭만주의자답게 여행지의 낭만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성취욕은 꼭 일로 풀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에는 동해시의 여행책방 '잔잔하게'에 들렀고 사장님의 깔끔한 카테고리 큐레이션에 따라 책장에서 시선을 옮기던 중 딱 내 여행취향을 저격하는, 취지에 적절한 책을 발견해서 집어 들어왔다.
송지현의 『동해 생활』이다.
이 책은 송지현 작가가 동해에서 살았던 시기, 말 그대로 동해 생활의 기록이다. 이토록 직관적인 제목이 또 있을까? 거의 9살 차이의 동생과, 자매가 함께 서울을 떠나 동해에서 살림을 꾸리고 살았던 기록으로 짧은 제목이지만 그나마도 줄여보면 '동생'이 되듯, 동생에 대한 애틋함과 끈끈한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두 자매의 동해 아지트는 유지태, 이영애 배우 주연의 '봄날은 간다'에서 여주인공의 집으로 나왔던 아파트. 그 안에서 마치 독립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매일을 축제처럼, 파티처럼 지낸다.
그리고 그 생활안에서 느꼈던 감정과 상황들을 마치 술자리에서 친구끼리
-우리 그때 재밌지 않았냐?
-그때 생각나냐, 너 그랬던 거?
라는 둥의 대화로 수다를 떨 듯 풀어낸다.
여행지에서 산 그 지역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이런 맛이 있다.
오전 산책을 하고 커피가 맛있는 곳이 있는 논골담길, 친구들이 놀러 오면 회를 한가득 떠다 술안주로 포장해 가던 묵호항, 오고 가던 등대, 자차 말고는 이동하기 어려운 교통, 전입신고를 하고 한참을 바라봤다던 주민센터, 속옷 대신 수영복을 받쳐 입고 종일 물에 들락날락해서 피부가 다 올라왔다던 서퍼들이 물을 뚝뚝 흘리며 커피를 사러 온다던 2층 카페가 위치한 해변, 소유와 대여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튜브를 구매했던 이마트....
책에 나오는 장소와 장면들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도 아는 곳이라서 소외되는 기분 없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읽어 내릴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참 안 변한다. 조직생활-이라고 쓰니 거창한 세계에 있었던 것 같지만-을 떠났음에도 그놈의 소속감을 찾는 버릇은 별 데서 다 발동하고 난리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매우 가볍다.
물리적인 무게도 물론이거니와 내용의 무게도 그러하다.
독서에서 큰 의미나 교훈을 찾는다면 이 책은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반복되는 에피소드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동해 생활에 대한 이야기니 일기에 가깝다. 자매 간의 이야기, 친구와의 이야기, 동해에서 일자리를 찾는 일화 같은 일상적인 소재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특히나 열정과 최선, 꾸준함과 앞서 나가는 추진력 같은 것들을 성공하는 사람의 기본기이자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맞지 않다. 작가는 경제활동은커녕 취미생활을 위해 무려 자발적으로 찾은 무료 강의에도 한 번 나가고 말만큼 꾸준함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새벽까지 안 자고 게임을 하거나 음주가무를 즐기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I도 사용자에 따라 학습된 내용과 아웃풋이 다 다른 세상에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모양, 똑같은 속도, 똑같은 강도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각자가 타고난 그릇의 크기와 모양과 용량과 용도가 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괜찮은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의 별일일 수 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싶은 일도 누군가에게는 치사량일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작가의 동해행이 일종의 피난이라고 생각한다.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만 챙겨서 -동생, 고양이들, 그리고 컴퓨터 같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그나마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들어가는 것.
이유도 모르고 몸보다 먼저 스러지는 마음만 한 재난이 또 있을까?
그런 재난이라면 멀리 옮겨 피해있는 것도 방법이다.
마음의 재난이 잠잠해질 때까지 피해있다가 다시 돌아와 복구하는 것, 일종의 피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종의 피난 일기다.
누군가는 보고 너무 낭만에 빠져있다, 철이 없다, 의지박약이다, 배부른 소리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도 틀린 것은 아니다. 각자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는 거니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신이 괜찮은 상황이 재난일 수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송지현 작가는 나와 닮은 부분이 많다. 물론 나 혼자만의 친밀감이다.
우선 동갑이고, 2녀 중 장녀이고, 술을 좋아하고, 무너진 마음에 어느 날 갑자기 귀신에 씐 것처럼 스스로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제3의 선택을 한다.
작가는 동해 생활을, 나는 희망퇴직을.
그리고 곧잘 운다.
너무 다른 부분도 많다.
나는 수업에 결석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고 12년 개근도 모자라 대학시절에도 자체휴강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살았고, 페스티벌 같은 건 딱 질색이고, 생일은 매년 새 달력에 가장 크게 체크하는 기념일이다.
작가는 그와 정반대이고.
그런 걸 보면 어떤 부분은 비슷한 사람이라도 다 제각각의 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각자의 삶은 살아진다. 이게 옳고 저게 틀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몸에 맞춰 제작한 옷은 다른 사람에게는 빌려 입는 옷이 티 나게 어울리지 않기 마련이듯이,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그 옷이 내 몸에도 맞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별로이기도 누군가에게는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도 위로가 될 수도 있는 책이다.
다만, 각자의 삶에 몇 번이고 우리고 우려서 시간이 갈수록 녹진하고 속이 풀리는 가벼운 기억들 몇 가지는 꼭 간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슨 맛이든, 이 책 내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