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마음>
도서관에 가면 종종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저 읽을 책을 고르러 들어섰을 뿐인데, 막상 열람실에 들어서면 미로에 들어선 사람처럼 길을 잃고 당황하고 만다. 참 이상하지, 평생 소장할 책을 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대여할 책을 고르는 것뿐인데 이렇게 신중할 일인가. 고작 책 빌리는 일 앞에서도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짠하기도 하면서, 그 마음의 한편에는 '있어 보이는'책을 찾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조금 머쓱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런 마음들을 잘도 뒤로하고 결국 발이 닿는 곳은 익숙한 근현대 소설 앞이다. 언젠가 분명 읽었으나 그 내용은 가물가물한. 게다가 교과서나 시험문제로 나올만한 대단한 작품들이니 실패할 확률은 낮고, 지적허영심을 충족할 확률은 높으니 이만한 선택지가 없다.
이번 책 역시 도서관 미로에서 찾은 내 기억의 단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다.
나는 이 책을 대학교 1학년 교양수업인 '독서와 토론'에서 만난 적이 있다. 토론 과제로 만난 작품은 학점을 위한 정답을 찾아야 하는 사전 같은 거라서 사실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아마 인터넷에서 대충 요약본을 찾아 읽은 흉내를 내며 그럴싸한 단어들로 토론을 했던 것 같다. 참나. 이제나 저제나,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지적허영심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던 것이다.
그 후로 약 20년 가까이 다 되어 다시 만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이 책은 일본의 근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읽으면서 발견한 특징은 주인공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주요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아마 내 기억에 후반부 고향집에서 매부의 성을 잠깐 언급했던 것이 유일한 것 같기도- 주인공은 1인칭 화자로 '나'로 서술되며 그가 관찰자적 입장을 취하는 또 한 명의 주요 인물 '선생님'을 포함하여 등장인물들에게 실명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름으로 등장인물을 부르지 않는 것은 익명이 그렇듯 보편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이 때문인지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나였다가, 선생님이었다가, 선생님의 아내였다가, K였다가 하는 감정적 몰입이 더 깊게 되는 듯한 느낌이다.
내용은 상, 중, 하 3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상은 휴양지에서 우연히 만나 '나'의 일방적인 친밀감으로 시작된 선생님과의 관계,
중은 졸업 후 아버지의 병환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나'와 부모님의 관계,
하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도중 고향에서 받게 된 '선생님'의 편지내용으로 전개된다.
초중반까지는 주인공 '나'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인 3인칭 '선생님'은 후반부에 이르러 편지의 형식을 빌려 1인칭의 목소리를 내면서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결국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입체적인 인물이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도 그렇다고 형편없는 사람도 아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은 인물임과 동시에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내내 그의 복잡한 심경 心境 이 비친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은 사람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하숙집 모녀에게서 치유받고, 그 감정을 아끼는 친구 K에게도 느껴보고 싶어지고, 그 과정에서 원래 나와 가까웠던 것들을 또 빼앗길까 봐 두려워 감추고 모른척하고 결국 큰 상처를 주고야 마는 복잡한 감정.
심경(心境), 마음의 상태.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마음'인 게 아닐까?
한 사람의 마음이지만 음과 양, 선과 악, 죄책감과 외면 같은 상충하는 것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니까. 열 사람이 모여 있으면 그 안에 족히 백 마흔여덟 개는 되는 마음들이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마음이라는 건 한 사람 안에도 수십, 수백 개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중에서 어떤 걸 고를지가 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일 뿐.
책 표지를 덮으면서 김국환 씨의 오래된 노래, <타타타>의 가사가 생각났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소설에서 선생님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주인공을 묘하게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기저에는 바로 이런 감정이 깔려있었을 듯싶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그런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존경한다며 다가오는 청년이 불편하면서도,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을지도. 그러나 자꾸 마음을 건드리는 죄책감 때문에 결국 어디라도 털어놓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아닐까.
마치 도서관에서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책을 찾아 헤매는 나 자신이 좀 없어 보이면서도, 몇 분이고 열람실에서 기다리는 남편에게는 무슨 책을 찾는지 얘기하지 못하고 진중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짐짓 말을 아끼고선 여기 와서 이렇게 날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술술 불어버리는 나처럼?
또 하나 고백한다.
글을 다 쓰고 나서 찾아본 <타타타> 가사는 모음 하나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는 가사였다. 기억이란 참 무섭지, 들리는 대로 들었을 뿐인데! 그래도 노래도 책도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는 거라는 생각으로 고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런데 가사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였다니.
결국 나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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