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단편소설이 담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
드물게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올해 여름 어느 날.
고맙게도 붕-뜬 시간을 채우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던 서점은 눅눅한 문밖의 날씨와는 달리 뽀송하고 파삭한 책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복잡해지는 시선은 정처 없이 베스트셀러와 신간이 정갈하게 누워있는 진열대를 표류하다 청량한 포도 그림 위에 멈췄다.
휴대폰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큰 크기, 역시 휴대폰 두께를 겨우 넘는 얇은 두께, 손으로 쓰다듬으면 살짝 까끌한 재질에 적당히 도톰한 종이 위에 탐스러운 제철과일 포도 일러스트가 가득한 표지.
게다가 제목은 '소설 보다 여름'이라니, 마치 제철 소설이라도 되어 얼른 집지 않으면 안 될 듯싶었다.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여름 2025』은 그렇게 7월을 내 가방에서 나와 함께 했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문학과지성사가 2018년부터 분기마다 선정하는 '이 계절의 소설'을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로,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 해당 작가들의 인터뷰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소설을 읽고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한 듯한 심도 높은 감상이 가능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한정판'의 뉘앙스가 도무지 이 계절에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될듯한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커머스 업계에서 십수 년 간 현혹하는 말들로 상품을 팔아먹고 산 입장에서 아주 매력적인 콘텐츠가 아닐 수 없다.
『소설 보다 : 여름 2025』은 김지연 작가의 『무덤을 보살피다』, 이서아 작가의 『방랑, 파도』, 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총 3개의 단편소설로 엮여 있다.
김지연 작가의『무덤을 보살피다』는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이 내키지 않는 성묘를 위해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다 길을 잃고 음산한 양어장을 마주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생전의 기억과 굳건히 믿었던 자신의 세계가 패배했던 순간들의 기억, 그리고 불쾌한 느낌의 양어장 주인 남자의 수수께끼 같은 정체에 대한 생각을 교차하며 이어진다.
소설에 이어진 인터뷰에서 말하길, 이 소설의 초고 제목은 ‘양어장에서’, 그리고 원고를 다시 읽고 붙이려면 제목은 ‘성묘’, 최종적으로는 성묘(省墓)의 뜻을 그대로 풀이한 ‘무덤을 보살피다’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제목만 보면 누군가를 돌보는 따뜻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마지막까지 무덤을 보살피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작품에는 정치적인 견해가 은근히 스며있는데, 민감한 소재인만큼 좀 더 깊이 있게 다루거나, 또는 정치색은 배제하고 인물 간의 관계성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작가의 의도는 의미 있었겠으나 오히려 작품에 몰입하기에 어렵게 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선명하지 못한 느낌이다. 아마도 단편 소설의 한계겠지만, 작가가 의도한 뜻을 좀 더 전달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서사나 인물 간의 관계성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이서아 작가의『방랑, 파도』는 바닷가 마을에서 백반집 남매의 추천으로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방랑하는 젊은 외지인 '나'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시작은 요양원에서 침대 밑에 떨어진 물건을 줍기 위해 절을 하듯 말 그대로 '굽어 살피는' 행위를 하는 주인공의 행동으로 시작해서, 하늘에서 거대한 존재가 절을 하듯이 엎드려 고개를 돌리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마무리된다.
작가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행위와 수평으로 펼쳐지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교차하며 서술한다. '굽어 살피는 행위'에 대한 묘사인 듯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학적 소견이 얕은 나로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대책 없이 해맑고 쉽게 공상에 젖는 분류의 사람과 심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아마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 그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지독한 호불호를 가진 나의 취향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끝날 무렵 묘한 여운이 남는다. 향자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산 건지, 백반 남매는 왜 구설에 올랐는지, 주인공을 차에 태웠던 유품을 가지러 왔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지. 주인공 빼고 다 궁금해지는 결말인걸 보면 주인공과 나의 결이 달랐던 것으로.
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개인적으로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몰입도가 높았다. 면사무소의 직원 노아가 선배 녹원과 민원처리를 위해 찾은 천문대에서 특정 집단을 만난 뒤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묘한 궁금증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개이다.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의 이름과 마치 그 방주를 연상케 하는 천문대,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녹원과 천문대 사람들의 행동, 그리고 그 가운데 과거를 연상하며 이상한 광경에 묘하게 이끌리는 주인공 노아의 모습이 모난 곳 없이 물흐르 듯 전개된다.
단편소설의 매력이 짧은 분량에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 그리고 그 안에서 복잡하지 않게 따라갈 수 있는 인물들의 관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그 세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로운 작품이었다.
『소설 보다: 여름 2025』의 세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를 찾아본다면, 나는 결국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얘기하고 싶다. 정체성이란 대상이나 개인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성질을 의미한다.
첫 번째 작품, <무덤을 보살피다>는 '무덤을 보살피러' 떠난 길을 잃고 만나는 사람과 사건으로 지독하게 엮인 나의 뿌리, 그리고 과거의 언짢은 실패와 상실의 기억들에서 어쩌면 앞으로도 보살핌 받지 못할 자신의 세계를 예감한다.
두 번째 작품, <방랑, 파도>에서는 침대 밑의 분실물들을 찾는 주인공의 행위가 신의 관점에서 굽어 살피는 것과 오버랩되면서, 거대한 존재의 시선으로 봤을 때의 무력한 삶과 허약한 감정들을 마주한다.
세 번째 작품,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에서는 낯설고 기묘한 사람들에게서 넘치는 확신과 그로 인한 기괴한 상황들로부터 혼란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볼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개성이 강하지만, 모두 자신의 세계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과 만나 부딪히면서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감각을 각자의 감각으로 변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들이 왜 여름의 소설인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음 계절에 출간되는 '소설 보다'시리즈는 또 만나고 싶다.
가을엔 어떤 얼굴의 이야기들이 찾아올까.
부디, 그땐 내가 좀 더 몰입할 수 있는 내 취향의 이야기이기를.
문학은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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