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반노조 여부를 빌미로 멈춰 선 협의기구, 그리고 그 싸움의 기록
법에는 있는데, 현장에는 없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는 노사합의를 어떻게 할까?
노동조합을 막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이 바로 이 질문이었다.
법은 답을 갖고 있었다.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 줄여서 ‘근로자참여법’.
이 법에 따르면 노사협의회는 상시근로자 30인 이상 사업장에서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상시 협의기구다. 분기마다 1회 이상 회의를 열어야 하고, 노동조합이 있든 없든 그 의무는 같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우리 회사에는 노사협의회가 없었다. 회사는 “있다”고 주장했지만, 고용노동부의 판단은 “없다”였다. 심지어 근로자참여법 위반으로 ‘노사협의회 미설치’가 기소 의견으로 송치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법에는 분명 의무조항이 있고, 위반하면 처벌 규정도 있다. 그런데도 실제 처벌은 없었다.
책임은 공중에 흩어지고, 의무는 글자만 남았다.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 닮은 듯 다르다
겉으로 보면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는 모두 ‘근로자 대표’가 사용자와 마주 앉는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법적 근거와 역할은 전혀 다르다.
▶ 노동조합은 헌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근로자의 자주적인 단체다. 교섭·쟁의권이 있고, 단체협약 체결을 통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를 만든다.
▶ 노사협의회는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설치되는 협의기구다. 분기별 회의 개최가 의무지만, 협의와 의견교환이 주 목적이라 강제력 있는 합의를 할 수 없다.
문제는 현장에서 이 차이가 흐려진다는 점이다.
노사협의회가 마치 ‘노조를 대신할 수 있는 기구’처럼 운영되면, 사용자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단체교섭을 피하면서 형식적인 협의만으로 시간을 끌 수 있다.
그래서 과반노조 여부를 빌미로 노사협의회 구성권을 제한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은,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다.
과반노조 여부, 그리고 1:1 대면 확인의 벽
노동조합이 생기자, 우리는 과반노조임을 전제로 노사협의회 설치를 요구했다.
과반노조가 있다면, 근로자위원은 노동조합 대표와 그 위촉자가 맡게 된다.
즉, 과반노조 인정은 곧 노사협의회 구성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결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명분은 하나였다.
“과반노조 여부는 조합원 전원을 1:1로 대면해서 확인해야 한다.”
인사평가 면담처럼 관리자와 조합원이 마주 앉아 ‘너 조합원이냐?’를 묻겠다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근로감독관 입회 하에 양측 노무사가 명부 확인
전자투표를 통한 무기명 확인
CMS 가입인원 확인
체크오프 협약 체결
이런 대안들은 조합원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조작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대면 확인만이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억지 주장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노사협의회는 2024년부터 시작됐다.
원래 법대로라면 과반노조인 우리가 근로자위원을 지명할 수 있었지만, 회사는 끝까지 과반노조 인정을 거부했다.
그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납득이 어려웠다.
우리가 제시한 합리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법들은 단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지명’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선거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7명의 근로자위원 중 5명을 조합원으로 출마시켜 당선시켰다.
하지만 시작부터 억울했다. 법이 보장한 권리를 회사의 억지와 고집 앞에서 내려놓아야 했으니.
형식뿐인 설치, 내용 없는 회의
2024년부터 분기 1회 노사협의회가 열리기 시작했지만, 실상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법 취지와 달리, 노사협의회는 ‘협의기구’라는 이유로 결정권이 없다고 못 박혔다.
고충처리위원회 역시 인사담당 부서장이 사실상 전담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제출한 제안 대부분은 의견은 들었으나 고려해보겠다는 대답만 있고 변화는 없었다.
결국 법이 보장한 취지와 달리, 현장에서는 껍데기만 남은 협의기구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로자위원 자리를 지키며 제안과 요구를 계속 올렸다. 협의기구라도 끈질기게 두드리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찾아온 판결,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싸움
그리고 1년이 지난 2025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판결을 내렸다(서울행정법원 2025.1.17. 선고 2023구합72158 판결).
회사가 노사협의회 설치를 위한 과반노조 확인 다른 합리적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1:1 대면 확인만 고집한 것은 신설노조의 자주성과 단결권을 침해할 위험이 크다.
실제로 ‘지속된 압박과 회유’ 끝에 조합을 탈퇴한 사례가 존재한다.
뒤늦게나마 법원이 우리의 주장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하지만 그 판결이 나오기까지 이미 우리는 회사가 정한 판 위에서 게임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노사협의회는 법 취지와 거리가 먼, 형식적 기구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회사는 이 판결에 불복해 곧바로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1심에서 법원이 명확히 인정한 내용조차, 회사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싸움이 단순히 ‘노사협의회 구성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생노조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이, 이렇게 또렷하게 드러났다.
남은 과제
노사협의회는 노동조합과 법적 근거도,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회사의 의도대로 장악된다면,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
과반노조 여부를 핑계로 설치를 지연시키고,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권리를 축소하는 방식은 결국 단결권을 잠식하는 행위다.
지금도 우리는 근로자위원 자리를 지키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싸움은 단순히 ‘회의 하나 여는 문제’가 아니다.
노사협의회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노동조합이 현장에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권리를 지키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도, 법정과 현장에서 동시에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