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교섭인데, 왜 ‘교섭’을 안 하나

형식만 채우면 ‘성실’이 되는 기이한 법의 세계

by 기록하는노동자
교섭은 했지만, 교섭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이 설립되면 당연히 단체교섭이 시작될 거라 믿었다.
헌법이 보장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성실교섭의무’라는 게 있으니까.
제29조, 제30조, 그리고 제81조 제3호는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단체교섭을 거부하거나 해태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법은 ‘성실’이라는 말을 쓰지만,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교섭 자리에 앉기만 하면 ‘거부’가 아니라고 본다.
결과가 없더라도, 의제가 진전되지 않아도, 심지어 시간을 질질 끌어도 ‘형식적으로 교섭을 했다’면 부당노동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와의 첫 단체교섭에서 나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멈춰 선 상견례, 그리고 무한 반복된 조율

2022년 9월 28일, 우리는 설립신고를 마치고 곧바로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교섭요구 사실 공고, 확정공고 절차까지 마쳤고, 단수노조임도 분명했다.
이제 상견례만 하면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될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경영진과의 상견례 일정은 잡혔다가 하루 전 취소됐고, 이유는 “내부 사정”이었다.
장소 문제, 참석자 범위 문제로도 재조율이 거듭됐다.
특히 회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일시와 장소가 아니면 교섭을 진행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집했다.
2025년 서울행정법원 판결문에도 이 지연의 패턴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서울행정법원 2023구합72158

다만, 참가인 회사가 향후에도 교섭 초기와 같이 2~3주에 1회 교섭을 할 것과, 교섭시각은 17:00 이후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원고의 단체협약안과 참가인 회사의 단체협약안을 각각 1회독할 것도 계속 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단체교섭 관계의 수립을 만연히 지연시킨 것은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형해화할 우려가 크므로, 이는 결국 참가인 회사가 단체교섭을 거부할 객관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없거나 불성실한 단체교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크다
17번의 회의, 합의는 ‘0’

그렇게 어렵게 시작된 교섭은 1년여 동안 실무교섭 4회, 본교섭 12회, 기타 협의까지 합치면 총 17차례였다.
그 결과? 기본협약 한 줄도 체결되지 않았다.

노조는 20개의 요구안을 5대 핵심사항으로 줄여 ‘집중교섭’을 제안했다.
그 핵심은 타임오프, 사무실 제공, 체크오프다.

노동조합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첫 단체협약이고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결국 회의만 하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데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래도 교섭은 했다.”
계열사 소속 조합원 교섭 거부

또 하나의 장벽은 ‘계열사 소속 조합원’ 문제였다.
우리 규약에는 계열사 소속 조합원도 포함돼 있었지만, 회사는 “법인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교섭 의무를 부인했다.

우리는 인사, 채용, 급여, 인사평가, 심지어 작업 지시까지 본사가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구조를 근거로 ‘사용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유진기업에서 계열사로 계열사에서 유진기업으로 이동은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끝까지 부정했고, 이 부분 역시 법원은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법인격이 다르다는 이유다.

우리는 계열사에 대표이사로 등재된 사람을 공장장님으로 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신생노조 교섭권의 구조적 불합리

신설노조의 교섭권은 법조문 속에서만 빛나고, 현실에서는 거의 무력하다.

사용자가 ‘형식적 교섭’만 하면 성실성 입증이 어렵다.

법에 교섭 기한이 없어 무기한 지연이 가능하다.

지연 과정에서 조합원은 지치고, 간부는 회유·압박을 받는다.

유진기업 사례는 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과반노조 지위를 갖고도, 1년 넘게 기본협약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단체협약을 읽고 회사의 의견만 듣다가 끝나고, 다음 회의에서 같은 행동을 다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의도된 지연의 효과

교섭이 길어질수록 노조 내부에는 피로감이 쌓인다.
“뭘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이 퍼지고, 이 틈을 회사는 놓치지 않는다.
조합원제보에 따르면 개별 접촉, 탈퇴 권유, 인사 불이익 같은 조직력 약화 전략이 동원된다.

판결문에는 ‘과반노조 확인 과정에서의 1:1 대면 강요’가 신설노조의 자주성과 단결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이 논리가 교섭 지연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본다.
지연은 그 자체로 조직의 단결권을 무너뜨리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을 준비하며

2025년 8월 현재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 개선 제안을 준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당장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구성된 국정기획위원회에도 이미 여러 건의 제안을 제출했다.

그 핵심은 이렇다.

기본협약 기한제: 설립 후 6개월 내 기본협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타임오프, 체크오프, 사무실 제공을 법으로 자동 부여

구제 절차 단축: 부당노동행위·부당해고 사건의 심문과 판결 기한을 법으로 제한

잠정집행력 부여: 구제명령이 확정 전에도 효력을 발휘하도록 보장

지연이자·징벌적 배상: 악의적 시간끌기에 경제적 불이익 부과

단체교섭은 노동조합이 현장에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을 질질 끌며 의미를 지워버리는 행위가 ‘성실교섭’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는다면, 법은 노동자를 지켜줄 수 없다.

사진설명_단체교섭안을 준비중인 유진기업 노동조합 간부들.jpg 2022년 10월 단체교섭안을 준비중인 유진기업 노동조합 간부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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