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맹과 함께한 위임교섭의 기록
위임교섭이 시작되다
2023년 11월, 우리는 단체교섭을 상급단체인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에 위임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9조에는 ‘단체협약 체결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자는 그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를 위하여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1년 넘게 이어진 단체교섭은 사실상 제자리였다. 회사는 시간을 끌며 노동조합의 힘을 소진시키려 했다. 조합은 교섭 지연에 대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쟁의권을 다시 꺼낼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한 차례 경험으로 조합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던 터라 또다시 쓰기엔 부담이 컸다. 결국 우리는 교섭력을 보완할 가장 강력한 카드로 상급단체 위임을 선택했다.
첫 번째 배움, 조급해하지 않는 것
노동조합 설립 후 첫 교섭이었기에 우리는 늘 마음이 급했다. 조합원들도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데 연맹의 첫 조언은 의외였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지금 하는 모든 과정이 나중에 ‘교섭해태’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에겐 당장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컸지만, 연맹은 ‘천천히 가는 것이 결국 멀리 가는 길’ 임을 강조했다. 회사가 2~3주에 한 번, 심지어 한 달에 한 번 교섭을 제안해도 우선은 ‘일단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연맹은 지난 교섭 과정을 처음부터 검토했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구이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꼼꼼히 짚었다. 조급했던 우리는 답답했지만, 그 차분한 태도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교섭 방식을 되돌아보게 했다.
두 번째 배움, 교섭은 만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회사가 내보낸 교섭위원들은 늘 같은 답변만 했다.
“검토해 보고 돌아가서 말씀드리겠다.”
즉석에서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대화는 늘 맴돌 뿐이었다.
이때 연맹은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줬다. 비공식적인 루트를 찾고, 실제 의사결정권자에게 목소리가 닿도록 만든 것이다. 전국단위로 연결망을 갖고 있는 연맹은 회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지점, 다른 업계 사람들, 심지어 정치권과 행정 라인까지 확인했다.
노동조합에게 회사는 오직 공문으로만 응답하며 ‘차단된 벽’처럼 느껴졌는데, 연맹은 그 벽 사이에 틈을 만들어냈다.
공식 테이블에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비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흘러들어 갔고, 다시 공식 교섭에 반영되기도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교섭은 ‘자리에서 마주 앉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리를 둘러싼 수많은 통로와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세 번째 배움, 단계적 전략의 힘
우리의 바람은 단순했다. 회사에 조금씩 양보하더라도 일부 요구는 반드시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는 “어떠한 요구도 들어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연맹은 다른 길을 제시했다.
“처음부터 다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선은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무실 제공과 근로시간 면제만 얻고, 체크오프도 못 받는 게 무슨 성과인가?” 억울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단체협약이 체결되자 깨달았다.
노동조합의 최소한의 권리보장이 있어야 조합원 곁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연맹이 강조했던 단계별 전략은 결국 ‘지속 가능한 교섭력’을 만드는 첫 단추였다.
지금 누군가가 처음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나 역시 똑같은 말을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다 얻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인정받고 버티는 것이다.”
네 번째 배움, 든든한 울타리 속에서
해고 직후, 나는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조합원들에게조차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된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연맹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옆에 있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실제로 교섭 테이블에서, 언론 대응에서, 법률 검토에서, 심지어 현장에서의 뒷받침까지 연맹은 함께했다. 조합원들이 기반을 다지고 버틸 때, 연맹은 그 기반 위에 울타리를 둘러주었다.
그 울타리 덕분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다시 전진할 수 있었다.
큰형의 힘, 그리고 우리의 다짐
어릴 적 동네 싸움이 나면 늘 “형”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형 불러올까?”
“내가 아는 형이 싸움 잘해.”
그 시절의 단순한 자랑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뒤에 버티고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세가 달라졌다.
노동조합에도 그런 큰형이 있다. 바로 연맹이다.
우리가 힘겨운 싸움에 직면했을 때, 든든한 큰형의 존재는 버티고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또 다른 누군가의 큰형이 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하루하루 기록하며, 우리 힘을 쌓아 올리고 있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