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다 지쳤어요, 위원장님”

끝나지 않는 질문, 그러나 변하고 있는 현실

by 기록하는노동자

가장 많은 질문, 가장 무거운 대답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첫 단체협약을 체결하기까지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위원장인 나는 설립 1년 만에 부당해고를 당했고, 노동위원회와 행정법원에서 연이어 승소했음에도 여전히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사무실을 돌거나 조합원들의 민원을 받을 때면 꼭 받는 질문이 있다.

“위원장님, 언제 단체협약 체결됩니까?”
“언제 복직하십니까?”

나는 차분히 현 상황을 설명하고, 판결과 교섭의 흐름을 이야기하며 “쉽지는 않지만 결국 이길 것이다”라고 다독인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는 늘 가슴이 무겁다.

“기다리다 지쳤어요. 이 회사는 더는 가망이 없는 것 같아요.”
기다림의 무게

노동조합이 설립된 후 회사를 떠난 조합원만 50명이 넘는다.
그들이 떠날 때 가장 많이 남긴 말은 “기다리다 지쳤다”였다.

나는 “살아남는 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자”라는 말을 꺼내며 위로하지만, 솔직히 그 말조차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심리학적으로도 기다림은 불확실성이 동반될 때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한다.
어느 글에선가 봤던 내용인데 “사람은 확실한 고통보다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고통에서 더 큰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 조합원들이 힘들어하는 것도 바로 그 불확실성이다.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 때, 사람은 지친다.

조합 재정의 이중고

우리 조합은 위원장의 부당해고로 인한 생계지원까지 감당하고 있다.
덕분에 정상적인 조합 운영은 늘 빠듯하다.

조합 임원들 활동비도 제대로 책정하지 못하고, 공지문이나 소식지를 만들 때도 늘 비용부터 고민해야 했다.

위원장인 나 역시 몇 년째 소득증빙이 없는 상태다. 은행 대출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할 만큼 경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생계지원은 조합의 단결을 보여주는 힘이지만, 동시에 운영을 위축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가까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조합원들의 연대와 곳곳에서 뻗어온 도움의 손길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예상치 못한 연대가 나타났고, 그 힘이 다시 조합을 일으켜 세웠다.

변화의 증거들

그렇게 버티는 동안, 하나둘 현실은 바뀌었다.

회사는 처음에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지금은 노동조합 사무실이 마련됐다. 근로시간면제도 단체협약으로 공식화되었고, 최소한의 활동 기반을 확보했다. 연차수당·연장근로의 대가는 노동부 근로감독을 거쳐 지급되기 시작했다. 위원장의 부당해고는 지노위·중노위·행정법원을 거쳐 3번이나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우리가 던진 계란은 매번 깨졌지만, 어느새 바위 귀퉁이에 균열이 생겼다.
재료역학에서 말하듯, 바위도 반복되는 충격에는 ‘피로 파괴(fatigue fracture)’가 온다.
처음엔 미세 균열일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전체 구조가 무너진다.

속담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투쟁은 바로 그 가랑비다.

한 번의 큰 폭풍이 아니라, 오랜 시간 스며드는 물방울이 결국 바위를 깎아낸다.

여전히 남아 있는 상처

그럼에도 기다림에 지쳐 떠난 동지들이 있다.
노조 결성 초기에 함께했던 3명도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들과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후벼파인다.
노동조합이 조금 더 건강하게 성장하고, 회사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고, 떠난 자리를 볼 때마다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우리가 요구하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연장근로 인정 : 정시에 끝날 수 없는 업무, 일찍 시작해 늦게 끝나는 노동을 제대로 보상해달라는 것.

휴게시간 보장 : 본사는 1시간 30분 점심시간을 지키지만, 현장은 밥을 입에 밀어 넣고 바로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최소한의 휴게 보상은 필요하다.

공정한 인사평가 : 평가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지 검증하고, 합리적인 이의제기 절차를 보장해달라는 것.

차별 시정 : 같은 현장에서 같은 고생을 하는데 임금과 승진에서 왜 차이가 나는지 확인해달라는 것.

결국 요약하면 하나다.

“노동자를 존중하고, 같이 논의하자.”

하지만 회사의 답은 언제나 똑같다.

“경영권, 인사권은 협의 대상이 아니다.”
버티는 자가 이긴다

노동조합의 길은 참으로 불합리하고 험난하다.
고용노동부 진정,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법원 소송… 결과는 늘 “위법하지만 처벌할 수 없다”는 벽이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처럼 보였던 싸움에서, 우리는 이미 바위에 균열을 만들었다.
단단해 보이는 재료일수록 미세한 반복 충격에 더 취약할 수 있다.
바위는 변하지 않고 버티는 듯 보이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금이 가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 진부한 말이 지금 우리에겐 현실이다.

기다리다 지친 동지들에게

이제 떠난 동지들, 지친 동지들에게 전하고 싶다.

“잠시 노동조합 울타리에서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다만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함께 계란을 던져 봅시다.”

우리가 버텨온 증거는 이미 분명하다.
안 된다던 것이 되고 있다.
조금 느리지만, 현실은 변하고 있다.

“천천히 가더라도 멈추지 않으면 결국 도달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18일 오후 03_05_38[포맷변환].jpg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



keyword
이전 24화본사 앞 방송시위, 절박함을 외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