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그리고 누군가의 생각을 기반으로.
온전히 타인을 위한 감정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영화를 생각하는 학생으로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타인을 보는 관점일 것이다.
결론부터 짓자면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외부이다.
인문학은 치유가 아닌, 오히려 병을 유발한다. 인문학은 질병이다.
인문학을 즐겨보는 사람으로서, 문학은 치유를 목적으로 기반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문학이 치유라는 관점은 매우 환상적인, 근대적인 시각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어>와 <82년생 김지영>은 절대로 치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전 자신과의 안녕' 혹은 '현실을 다르게 보기', 치유는 질병과 다르게 진보를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문학은 절대로 진보하지 않는다. 문학은 문화적이고, (로메르의 의미에서) 도덕적이며, 개인적이다. 감정의 아카이브.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가진 것이 질병이라면, 우리 자신이 타인을 보는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질병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인을 경유해야 할 것이며, 혹은 그것을 넘어서 타인을 경유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타인의 개인적인 시선을 경유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해 봤자, 질병이라는 것, 인간을 이해하려는 작업은 업이라는 카르마를 동반시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시선을 공유받아야 할 것인가?
다시 돌아가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타인을 보는 관점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이해의 과정과 비슷하다. 인문학은 현실 존재의 실패를 가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환상을 필연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또한 자신이 타인을 보는 관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는 이해를 동반해야 서로 살아 숨 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환상은 제거되어 있다. 텍스트의 세계에서는 논리를 담보하기에 환상이 가능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 무엇도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근대의 시대는 지나갔다.
누군가가 나의 못난 부분까지 품어줄 수 있을까?
인문학이 치유가 아닌 질병으로의 목적을 갖고 있다면, 인문학이 진보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도 자신이 갖고 있는 '질병'은 질병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질병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어>와 <82년생 김지영> 또한 '우리'의 질병에 관한 것이다. 이제 질병에 대해서 다르게 말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전 자신과의 만남', '현실을 그대로 마주하기'. 우리가 마주한 질병이라는 것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살아온 시간을 마주하는 것은, 살아온 자신의 시간이 담보하는 것은 가치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맥락을 달리한다. 외부이기 때문에 타인을 위한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만들어온 시선 속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면서, 다른 말로는 타인의 질병을 경유하면서 바라보기. 타자 되기가 항상 실패하는 문제라면, 자신 속에서 타자의 시선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이것이 타인을 위한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