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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재오 Dec 20. 2024

너무 편하게 입고 나오신 거 아니에요?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6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의문의 여인 P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J 씨, 나오세요."


J가 전화를 받자마자 P가 불쑥 말했다.


"이 시간에요? 친구들은요?"

"둘은 애들이 학교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라서 로그아웃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요. 한 명은 피곤하다고 저녁부터 자고 있어요."

"흠…."

"다음엔 절대 휴머노이드들이랑은 여행 안 오려고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뭐라도 해요. 내일모레 아침에 가신다면서요."

P의 목소리를 듣고 J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J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도 적적하던 참에 A 씨 데리고 나갈게요. 어디로 가요?"

"밤인데 굳이 오토바이 안 타셔도 되죠?"

"네, 괜찮아요. 충분히 탄 것 같아요."

"그러면 얼른 나오세요. 차 보내놨어요. 아까 주차장에서 봤던 그 차가 갈 거예요. 5분? 뒤에 도착한다고 나오네요. 이따 봐요. 그럼."


J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겨 버렸다.


'5분이라니, 너무하잖아. 내가 자기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거야, 뭐야'


J는 투덜거리면서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곧, J는 입고 나갈 옷이 마땅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A가 챙겨준 것들 중엔 한밤중에 누구를 만나러 나가기에 적당한 옷은 들어 있지 않았다. J는 A에게 오토바이만 타고 기껏해야 온천 정도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으니까. 가지고 있는 옷을 내어보니 낮에 입었던 오토바이 재킷에 라이딩 진, 빨간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가방 안에 넣어둔 흰색과 검은색 티셔츠, 회색 트레이닝 바지가 전부였다.


J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쳐다보다가 생각한다.

'아 그때 억지로라도 짐을 다 보낼 걸 그랬어.'


급한 마음에 J는 회색 트레이닝복에 검은색 티셔츠를 골라 대충 입었다. 오토바이 탈 때 입었던 옷은 지저분하기도 했고, 아스팔트 냄새도 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거울에 비춰본 모습이 수험생처럼 후줄근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전한 마음에 J는 체크무늬 셔츠를 걸쳐 입었다.


“이번엔 함께 다니기에 좋은 외모란 이야긴 안 듣겠군.”

J는 중얼거렸다.


호텔 데스크에서 차가 도착했다고 전화로 알려 주었다. J는 또 갑자기 추워질지도 모르니 P에게 빌려줬던 외투를 챙기고, 잠시 고민하다가 A의 전화기도 주머니에 넣었다.




J는 P가 보내준 자율주행차에 올라탔다. 차는 유령처럼 슬그머니 출발했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을 가는 길은 꽤 어둑어둑했다. 불이 켜진 건물도 드물고 가로등도 몇 개 없었다. J는 이 시간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있는건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스미스가 '괜히 이상한 일에 꼬이지 말고'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추고 '도착했습니다'라고 알려줬다.



내려 보니 한 일본식 건물 앞이었다. 건물은 하얀 벽에 짙푸른 기와를 얹은 전통 양식이었는데, 단층임에도 높이가 상당했다. 마치 교회 예배당이나 창고로 쓰면 적당할 것 같은 곳이었다. 기단을 따라 빙 둘러 설치된 조명이 은은하게 벽을 비추고 있었다. 건물의 길이를 가늠해보니 내부도 제법 넓을 것 같다고 J는 짐작했다. 그런데 주변이 이 건물 외에는 불이 들어온 곳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라 어쩐지 생뚱맞게 느껴진다고 J는 생각했다. 그나마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어서 J는 마음을 놓았다.


건물에는 앞쪽으로 난 창문이 없어 내부를 볼 수 없었고, 어떤 곳인지 짐작할 만한 간판 같은 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J의 귀에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J는 여닫이문으로 만들어진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기울이니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이 나오고 있었고 입구에 조그만 글씨로 Woodside Basie Jazz Spot이라고 적혀 있었다.


‘재즈 클럽인가? 베이시면 카운트 베이시?’

J는 익숙한 재즈 선율에 슬며시 안심하고 나무로 만들어진 여닫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 오스카 피터슨 같은 재즈 거장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따금 라이브 공연도 열리는 듯, 이곳에서 연주한 밴드들의 사진과 사인을 담은 액자도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다.


짧은 복도를 돌아 가니 홀이 나왔다. 홀은 예상했던 것처럼 면적이 제법 넓고 천고도 높았다. 천장이 높게 트여 있었고, 나무 들보에 달린 갓등에서 (이제 J에겐 낯설어진) 백열전구가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홀엔 서른 개 정도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반 정도가 차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휴머노이드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홀의 가장 안쪽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와, 소박한 구성의 드럼 한 세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덱스터 고든이 흘러나오는 오디오가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규모가 심상치가 않았다. J는 '월차를 내고 일본에 오겠다던' 스미스 생각이 나서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오라고 할 걸'하고 아쉬워했다.


한쪽 벽면에는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넓고 긴 바가 있었고, 바 테이블에 앉은 P가 J가 들어오는 걸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P는 V넥의 짙은 파란색 막스마라 슬리브리스 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옅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포플린 원단이 그녀가 앉은 높다란 바 스툴 위에서 풍성하게 부풀어 있었다. 영리한 실루엣이 그녀의 마른 체형을 감춰서, 더 이상 어리게나 연약하게 보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매어진 허리끈은 한 줌에 들어올 만큼 가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주름진 치마 밑으로 분홍빛의 매끈한 무릎이 드러나 있었고, 가늘고 긴 종아리 아래에는 발랄한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나카타케 화구에서 남자 패딩을 대충 걸치고 목탄화처럼 시커멓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노란 조명 아래서 파란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놀랍도록 여성스러웠다.


다리를 꼰 채로 밝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고 J는 당황했다. 자신의 옷차림과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에 티셔츠를 걸친 채, 어울리지 않게 등산화를 신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 J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J는 내일도 P와 만나게 될지 모르니 날이 밝는 대로 옷을 좀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J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웅크린 채 담배를 피우는 돌멩이 같은 사람들을 지나 P가 앉아 있는 바 근처로 갔다. 역시나 P가 J의 행색을 보고는 킥킥대며 그게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J는 머쓱해하며 그녀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여기는 대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크크크, 아이고, 우리 인사부터 해요. 잘 들어가셨어요?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그러게요. 다시 보니까 좋긴 좋네요.”


J는 큼 하고 헛기침하며 바 건너편을 둘러보았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종류의 술병들이 눈에 들어왔고, 테이블 한쪽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그라인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업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잔들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J는 자기를 지켜 보던 한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는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숄더 스트랩과 토시까지 착용한 모습이 마치 1950년대 재즈 바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바텐더가 J를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J는 '아, 또 A를 아는 사람인가 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듯 손사래를 치며 싱긋 웃었다. 바텐더는 잠시 당황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면서 실례했다는 제스처를 했다. J는 풍성하고 근사하게 다듬은 그의 콧수염을 보고 '아마 A가 저 사람을 보고 수염을 기르고 싶어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휴머노이드들이랑 여행하다 보니 이런 곳도 찾아 주더라고요. 괜찮죠“

“좋네요. 근사해요.”


J는 외진 곳인데다, 별 표시도 없는 탓에 아마 이웃 주민들조차 이런 곳이 있는지 모를 것 같은 곳까지 찾아낸 휴머노이드가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P가 J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옷이 좀··· 너무 편하게 오신 거 아니에요?”


J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이거 말고는 준비한 옷이 없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좀 난감했어요. 미안해요. 이렇게 멋지게 입고 오실 줄은 몰랐어요.”

P는 어깨를 으쓱이며 오히려 홀가분해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뭐 드실래요? 밤도 늦었는데 커피는 좀 그렇죠?”

“그러게요.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네요.”


P가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바텐더가 다가오자 P는 J에게 주문하라는 듯 넌시지 바라본다. J는 바텐더 뒤편의 수많은 술병들 중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찾아보려다가 곧 포기했다.


“전 짐빔으로 주세요. 온 더 록으로”


P가 끼어 들었다.

“아니 무슨 짐빔이에요. 할아버지처럼…. 여기 헤네시 두 잔 주세요.”


바텐더는 싱긋 웃으며 브랜디 잔을 내어와 능숙한 솜씨로 헤네시를 따랐다.


“술 잘 드세요?”

“저는 적당히 마시는데, A 씨는 술을 좀 피해달라고 하긴 했어요.”


J는 프랑스 여자를 만나는 자리니 꼬냑이 맞긴 하겠다고 생각하며 잔을 손바닥으로 데운 헤네시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술이 넘어가는 느낌이 부드러우면서도 알싸했다.




무대 위의 스피커는 스미스가 갖고 싶어 했던 1980년대에 출시된 JBL 제품이었다. 수영장 물빛과 닮은 파란색 배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었던 걸 J도 기억해냈다. 스피커엔 여행용 트렁크 크기의 거대한 앰프가 세 대나 연결되어 있었고, 매킨토시 제품으로 보였다. 특유의 파란빛을 내는 레벨미터 창에서 바늘이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활기찼다.


“재즈 좋아하세요?”

P가 오디오를 유심히 살피는 J를 보며 말했다.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오디오광이에요. 그 친구가 매일 자기의 오디오 소리를 들어봐달라는 통에 저도 좀 듣게 되었고, 판도 몇 장 수집하기도 했지요. 그 친구가 재즈에 대해서 여러 가질 알려줬었어요. 그 친구가 여기 왔으면 참 좋아했을 텐데"


"친구요?"

J가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네, 둘 다 '홀아비' 신세라서요"

J는 홀아비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강조해서 말했다.


"저도 전남편이, 하하"

전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J의 귀가 번쩍 뜨였다.


"재즈광이었죠. 처음엔 시끄럽기만 하고, 엄청나게 듣기 싫었는데 듣다 보니 좋아지더라고요."

"아, 어쩐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좋아하신다고도 하셨죠."

"아 그런데, 바브라는 남편 취향은 아니었어요. 저만, 크크크"


P가 잔의 테두리를 검지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덱스터 고든의 곡이 끝나자, 소니 롤린스의 Saxophone Colossus 앨범이 턴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맥스 로치의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홀 내부를 가득 채웠다. J는 어쩐지 그 소리가 비밀스러운 의식이 시작되려 할 것처럼 주술적으로 들리는 통에, 자연스럽게 방금 전 꿈 생각이 났다. 우르렁거리던 나카다케 화구의 모습과 거기에 묶여 유령이 된 채로 어쩔줄 몰라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슬그머니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왜 P가 슬퍼해 줄 거라 확신했던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소니 롤린스는 성실한 느낌이 들어요.”

P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말했다.


“실제로도 지독한 연습광이었다고 하던데요. 자기는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만큼의 재능이 없다며”

"맞아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렇게 들었던 것 같네요."


J는 전남편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다가 아직 실례일 것 같아 간신히 참아내고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일본엔 언제까지 계세요?”

"저희도 내일, 떠납니다.”

"……아이고…. 내일 돌아가시려면 오늘 일찍 들어가 보셔야겠네요."

"왜요? 아쉬우세요?"

"아뇨, 뭐. 마지막 일정으로 저를 만나주시니 영광이죠."

“기차를 타고 오사카로 갈 예정이고, 거기서 이틀 더 머물렀다가 각자 귀국할 것 같아요.”

 

P는, 자신이 S 에게서 몸을 빌려야 하므로 그녀가 사는 오사카 시에서 친구들과 만나 여행을 시작했고, 차를 타고 도쿄를 거쳐 후쿠시마, 삿포로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이틀 전부터 규슈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던 중이었다고 J에게 말해주었다.


“차를 타고 직접 다니셨다니, 세계정부에서는 썩 싫어할 만한 여행인데요.”

“맞죠? 안 그래도 저희도 그 이야기했는데, 하하하. 휴머노이드를 빌려 놓곤 차나 기차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체 어디 있느냐고, 친구들도 저 때문에 꼼짝없이 일반 사람들처럼 다녔죠. 뭐”


P는 까르르 웃으며 손으로 J의 어깨를 툭 밀었다. 익숙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치자, J는 문득, '오토바이는 충분히 타 봤으니 오사카에나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쯤 벚꽃도 한창일테고')


"그래서 이번엔 애들만 낮에 오사카를 다녀오라 할까도 싶어요. 오사카에서 휴머노이드를 빌려서 구경하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저와 지내도 되니까요. 전 사실 오사카에서 S를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봐 걱정되거든요. 별로 안 가고 싶어요.”


'그래요. 친구들은 오사카에 보내고 저와 같이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J는 꾹 참는다. 그리고 곧 다이칸보 전망대에서 만난 A의 일본인 친구 생각이 났다. 내일 꼭 가게로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안경을 쓰고 땅딸막하던 우동집 사장.


"아, 그건 그렇겠네요. 저도 A 씨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확실히 난처하더라고요"

“아, 그러셨어요? 오토바이 타다가?”

“네 오토바이 타고 다이칸보 전망대에 올랐는데 누가 아는 척을 하더라고요. 아마 그분은 A 씨에게 자기 몸을 저한테 빌려줄 거란 이야기를 못 들은 것 같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저 앞뒤 생각하지 못하고 우쭐한 기분에 뭔가 실수한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J는 바 건너편에서 잔을 닦고 있는 바텐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 그리고 여기 바텐더님도. A 씨를 아시는 것 같고요."


그 말을 들은 바텐더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A 님과 친구분께서 저희 가게를 자주 찾아 주셨습니다. 최근 일 년간은 못 뵈었지만…."


“아하”

P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은 빌린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여행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에요.”

“아, 그래요?”

“네, 아무래도 오해받을 일이 생기기 쉽지 않겠어요? 오늘 만나신 분도 저쪽에서 아는 척했는데 냉정하게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리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잖아요. 잠시라도 이야기 나누신 건 잘하신 거예요."

“그러네요. 맞네요.”


"그리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J는 쿠사센리 휴게소에서 처음 말을 걸었을 때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피커에서는 소니 롤린스가 숨을 고르는 사이 토미 플라나간이 조심조심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귀기울여 음악을 듣던 그녀가 술을 한모금 마시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휴게소에서 J 씨가 말을 걸었을 때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도 몸을 빌린 척 하면서 외국인에게 접근하는 현지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J는 식사를 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넙죽, 눈웃음까지 지어가며 받아들였던 그 때를 떠올렸다.

"그러게요. 오해받을 만했죠."


J는 잠시 말을 멈추고 P의 눈치를 살피고 덧붙였다.

"바람둥이로 오해받기 쉬운 얼굴이기도 하구요…."


"그냥 바람둥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죠. 원래부터 S를 아는 사람이 작정하고 접근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에요. 여기가 S가 사는 오사카는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도 일본이긴 하잖아요. 그리고, 저와 J 씨는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일지 몰라도 정작 A 씨와 S 씨가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요."


"흠, 유괴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에요?"

"유괴도 있고요, 생각보다 사고가 많이 나요."

"영혼 보관 장치가 있으니 그런 일이 생겨도 우리는 괜찮은 거 아니에요?"


"글쎄요. 완벽한 건 없으니까요. 지금, 이 몸에서 우리 영혼만 떼고 나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몸이 되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몸은 엄청 비싸게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P는 목이 탄지, 술 대신에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요금소에서 현금으로 입장료를 내는 걸 보고는 완전히 긴장했죠. 아, 이 사람. 확실히 수상하다. 난 또 순진하게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서 혼자 신내고 있었네. 보통 트랜스퍼 해서 외국 여행 오는 사람이 돈까지 준비하고 그러지 않거든요. 거기에 지갑까지 가지고 있고.“


J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 전 오토바이를 타보려고 일본에 왔거든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옷을 그렇게 입고 오신 거 보니, 믿어드릴게요."

P의 말에 J도 피식 웃었다.


J는 화구에서 P가 갑자기 냉랭해진 까닭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P 도 자기 몸이 아니라 낯선 일본인의 몸에 들어간 처지인건 똑같단 걸 J는 깨닫는다. 자기가 느끼는 불안함과 시샘을 그녀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진 게 생겨 P에게 물어보았다.


"근데 왜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바람둥이일지도 모르고 일본인일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P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그러게요. 심지어 지금 이렇게 술도 마시고 있죠."




A면이 끝나고 바텐더가 판을 B면으로 바꿔 돌렸다. 음악 소리가 중단된 술집 내부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곧 B면의 Moritat 이 시작되고 안심한 사람들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저는 그렇다 치고, J 씨는 아까 화구에선 갑자기 왜 그랬던 거예요? 갑자기 뚱해져선 사람 민망하게"

"아…. 조금 전에…. 그러게요. 미안합니다."


J도 술잔을 비우고 머뭇거리다가 털어놓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이렇게 오늘 처음 만난 스무 살도 더 차이 나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 거냐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가 J는 말한다.


"근데 S 씨는 정말 제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J가 억울한 듯 P에게 털어놓자, P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근데 왜 나오신 거예요? 자기 스타일도 아닌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를 만나러?"

J가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잇지 못하자 P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까지 뒤로 젖힌 채 깔깔대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 다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나 보네요."




“그런데, A 씨는 뭐 하는 사람이래요?”

비워진 잔을 다시 채우며 P가 A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전 그런 건 물어보질 않았어요.”

“아, A 씨에 대해서 조사해보지 않으시고 이쪽으로 넘어오셨어요?”

“네”

“거 참, 하기야 사람을 처음 빌리는 거라면 몰랐을 수도 있을 것도 같고…."

J는 트레이닝 바지 주머니 안에 있던 A의 핸드폰을 꺼냈다.


“A 씨가 오토바이 경로도 다 지도에 정해주고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J는 일부러 핸드폰 전원을 눌러 A와 여자 친구의 사진이 뜨도록 했다.


“오오, 어머 귀여워라.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리네요. 여자 친구인가 봐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럼 더 조심하셔야죠.”

“뭐가요?”

“아니 J 씨랑 제가 만나는 걸 누가 보고, 네 남자친구 바람피고 있더라 하고 일러 바치면 어쩔려고 그러세요."


P는 당황하는 J를 보며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나중에 A 씨가 J 씨한테 머라 그러는 거 아니에요? 오토바이만 탄댔더니 왜 한밤중에 여자를 만나고 있었냐고. 그런 건 계약서에 없지 않았냐고. 크크크”


J는 'A가 콘돔만 쓰면 상관없다고 했는데요'라는 말이 목젖까지 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때, 바텐더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그런 오해가 생기시면 제가 해명해 드린다고 했다고 전해주세요. 여자 친구분도 저희 가게에 자주 들르셔서 잘 알거든요.”

“어머, 이 바텐더분 센스 있으시다!”

P가 깔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죄송합니다. 이 잔은 두 분 이야기를 엿들어버린 데 대한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바텐더가 술을 따른 뒤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다른 테이블을 정리하러 자리를 떴다. P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대고 있었지만, J는 P가 다시 A 이야기를 꺼낸 게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일본인 S의 고향이 어디인지, 결혼을 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는데, P는 왜 자꾸 A에 대해 물어보는 걸까?


'정작 나에 대해서는 하나도 물어보지 않고'

찜찜한 마음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술이 좀 취하는 것 같다고 J는 느꼈다.




Saxophone Colossus 의 마지막 트랙은 10분이 넘는 길이의 Blue 7이다. J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항상 핑크팬더의 주제가가 연상되곤 했다. 더그 왓킨슨의 베이스가 음모라도 꾸미는 듯 서늘하게 시작해서, 맥스 로치의 드럼이 장난스럽게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소니 롤린스의 능청스러운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J는 점점 술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술이 취하는 건 A의 몸인데 왜 자기까지 덩달아 몽롱해져야 하는지 J는 억울해졌다.


J는 P에게 물었다.


"P는 A 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A 씨는 왜요?"


P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다가, J가 의미심장한 투로 자신에게 물어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자세를 바꾸었다. 원피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니, S 씨가 A 씨에게 호감이 있다고 말했던 것부터, 같이 있으면 좋을 만큼 잘생겼다느니, 지금도 A 씨 얘기만 묻고"

"왜요, J 씨는 제가 A 씨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굳이 두 사람에게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서요."

"하하하, 그래요? 양보하시기라도 하는 거예요? 듣고 보니 은근히 섭섭한데요."


J는 대꾸하지 않고 바닥에 얕게 남은 헤네시를 마저 마셨다. 그때 3명의 연주자가 모두 뜬금없이 연주를 중단하더니 맥스 로치의 단독 솔로 연주가 시작된다. 자크 클루조 경감이 사건을 수사한답시고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이 떠오른다. 긴장이 고조되는 지점이다. P는 J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준비가 너무 철저하잖아요. 마치, J씨가 누구를 만날 걸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 헬멧도 두개나 준비해두었고, 핫팩도 있고. 그리고…."

"그리고요?"


"아니에요. 근데 전 이제 J 씨가 J든 A든 상관없어요."


알듯 모를듯한 P의 말에 J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내가 J이든 A든 상관이 없다는 거지?' 그 뜻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그러고 보니 지금 이렇게 술에 취한 나는 J인가, 아니면 어느새 A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J는 문득 깨달았다.


'나도 이제는 P가 P든 S든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S 씨가 J 씨 스타일이 아니듯, A 씨도 얼굴은 마음에 들지만, 저한텐 너무 어려요. 동양인들은 꼭 고등학생 같다니까요. 아무리 수염을 길러봐도 소용이 없어요."


P가 다시 바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J를 아래에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한 맥스 로치의 드럼을 구경하고 있던 세션들이 일순간 확 들이닥친다. 그리고 J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 들어서 정신이 말짱해졌다.


'어라, 이건 확실히 엘리자베스가 했던 말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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