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재오 Dec 06. 2024

누굴 뒤에 태울 때는 꼭 킥 스탠드를 내려야 해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4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P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나카다케 화구로 오릅니다.




2037년 6월 13일 토요일 오전 9:03


어젯밤, 오이타(おおいたし) 시에서 가져온 새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아키라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다. 도무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해가 뜨기 직전에 겨우 잠들었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쿠슈 섬에 남아 있는 같은 모델은 한 대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확인한 뒤,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을 정하고, 전 주인에게 '팔아달라'고 장장 1년여 동안 조르고 졸라서 넘겨받은 물건이다. 큰돈을 들이긴 했지만,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시나, 기대한 바대로 가볍고, 다루기 쉽고, 무엇보다 희귀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오, 이걸 아직도 타고 있다고요?'라면서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모델, 바로 2020년식 혼다 CRF 300이다.


2035년, 결국 혼다(HONDA)마저 더 이상 오토바이엔 엔진을 달아주지 않기로 했다. 잔디깎이에서 비행기까지 엔진이 필요한 곳엔 뭐든 다 만들어 주던 그 혼다가 말이다. 스쿠터 정도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아프리카 트윈의, 골드윙의 후미에서 더 이상 흰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그 어떤 뉴스보다 아키라에겐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길을 가다가 연료가 떨어지면 가까운 주유소로 터벅터벅 걸어가 300엔을 내고 1L 생수통에 기름을 담아오던 추억이 아쉬운 건 아니었다. 전자기기처럼 매일 플러그를 꽂아 충전해 줘야 하는 게 귀찮은 것도 아니었다. 엔진을 달래어 가며 클러치와 협심해 길을 헤쳐나가는 맛이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회전운동이 즉시 회전운동으로 연결되는 그 단순함과 효율성엔 운전자의 기술이나 숙련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담백하지만 그만큼 단조롭고 지루했다.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목적이라면 오토바이보다 자동차가 훨씬 더 편리하고 안전하다. 오토바이는 비도 피할 수 없고 세 명 이상 타는 건 거의 불가능하며, 무엇보다 자동차보다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은 불편하고 복잡하며, 위험하기 때문에 일부러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다. 그걸 몰라주고 오토바이도 '탈 것'이니 개선해 주겠다는 호의는 ‘당신은 이가 시리니까 아이스크림을 따뜻하게 데워 줄게요’라는 괴상한 친절이나 다름없다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물론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고, 그들이 쓰는 돈이 쥐꼬리만 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난폭한 일반화'라고 아키라는 불평해 왔다.


이런 내연기관이 멸종되어 가는 이 시대에,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니던 CRF 300을 구입한 것이었다. 아키라는 흐뭇했다. 마치 자신이 20세기의 수호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헬멧 속에서 Born To Be Wild의 클라이맥스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다 보니 금세 쿠미코의 집 앞에 도착했다. 쿠미코에게 이 오토바이를 자랑할 생각에 아키라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쿠미코-오오오!!!!”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아키라는 쿠미코를 고래고래 불러댔다. 총 12가구가 사는 낡은 3층 연립주택, 쿠미코는 두바이 맨션 203호에 살고 있다. 아키라의 함성에 203호의 창이 드르륵 열리더니 쿠미코가 등장했다.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인상을 찌푸린다. '토요일 아침이라고, 이 자식아!' 입 모양만 보고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아키라는 호들갑스럽게 입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척한다. 그런 아키라를 보고 쿠미코는 피식 웃더니 창문을 닫고 얼마 후 입구로 내려왔다.


“이게 그거야?”

“응, 멋지지!”

쿠미코는 찬찬히 오토바이를 들여다본다. 앞 타이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도 보고 핸드폰의 불빛을 비춰 속에 있는 부품까지 꼼꼼히 들여다봤다.


“흠, 엔진 개스킷에 오일이 좀 비치네, 프런트 포크도 좀 새는 거 같고, 카울은 재치네? 다행히 사고 나진 않았나 봐. 어라, 그런데 여기 머플러는 왜 해 먹은 거야?”


쿠미코가 오토바이를 구석구석 살펴보는 걸 보며 아키라는 마치 자기가 오토바이를 팔러 나온 사람이라도 된 듯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


“쿠미코오~ 내가 잘 보고 샀어, 이 사람 자기가 정비 다 하고 잘 관리하던 사람이야. 그 왜 재즈바 사장님이 소개해 준 사람이라고. 집에 오토바이만 10대가 넘어. 엄청난 부자라고”

“오토바이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부자 한 명도 없더라.”

꼼꼼히 살펴본 쿠미코는 '그래도 쓸 만은 하네'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거 얼마 줬다고?”

“아이! 이 사람! 그런 건 묻지 말고, 이거 가지고만 있어도 분명히 열 배는 오른다. 두고 봐라.”

“아이고, 항상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요.”

팔짱을 끼고 으스대듯 서 있는 남자 친구를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다가, 쿠미코는 품속에서 한 뭉치의 지폐를 꺼낸다. 노란 고무줄로 묶인 돈다발은 한장 한장 정성 들여 모은 듯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자”

“이게 뭐야”

아키라는 예상치 못한 돈다발에 당황하며, 쿠미코의 얼굴과 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니까 수리도 해야겠고 제대로 타고 다니려면 돈 좀 들어갈 것 같은데, 투자한다 치고 내가 좀 보태 줄게.”

“뭔 소리야! 나 돈 있어 걱정하지 마!”

“아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둬, 대신에 나중에 이거 팔 때 꼭 반은 나한테 줘야 한다. 그러니까 이 CRF 300, 반은 내 꺼야. 알았지?”


단호한 쿠미코의 표정에 J가 한 숨을 푹 내쉬며 지폐 다발을 못 이기듯 받아 든다.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다.

“고맙소. 공주. 이제 이 오토바이의 반은 당신 거요. 아, 이거 투자받기엔 아까운데….”

“헬멧이나 줘봐. 타보게.”

“네, 주인님!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뭐로 대접해 드릴까요?”

“쿠사센리 휴게소 올라가서 화산재 라테나 한 잔 마시자.”


아키라는 싱글벙글하며 트렁크에서 흰색 헬멧을 꺼내서 쿠미코에게 건넨다. 쿠미코는 능숙하게 헬멧과 장갑을 끼고 오토바이에 오르려다가, 오토바이의 킥 스탠드를 내리지 않고 양발로만 서서 자신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키라를 보고 대뜸 야단을 친다.


“너, 내가 나 타기 전에 오토바이 킥 스탠드 꼭 내려놓으라고 했는 거, 또 까먹었지?”

“아! 맞다.”

아키라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왼발로 킥 스탠드를 끄집어 내린다.


“이게 뒷사람이 올라타다가 균형을 잃으면 너랑 나, 둘 다 오토바이에 깔린다고. 날 태울 때는 꼭 킥 스탠드를 내려야 해. 알겠지.”

“알겠습니다. 주인님!"

"너 다리도 별로 안 길잖아."


아키라가 발끈하는 걸 보고 쿠미코는 웃음을 터뜨린다.




나카다케 화구는 현재 아소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화산구다. 다른 몇 곳의 화산구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통로가 막혀 버렸다. 사춘기를 막 지난 이들의 얼굴에 남아 있는 흔적들처럼 한때 지하와 연결된 때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예전의 영광을 잊지 못한 나카다케 화구는 유일하며 단출한 규모지만 자신이 아직도 충분히 위험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거의 매일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조심성이 많은 일본인들은 화구의 분화 위험을 측정하고 예보한다. 공기 중 일산화탄소의 농도를 측정하여 내핵과 연결된 노즐의 압력이 높아졌는지를 확인해서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들의 조심스러움을 유난스럽다고 비웃거나, 겨우 하나 남은 지구 내부와의 통로라며 무시하기에는, 화가 난 나카다케 화구가 초래한 과거의 피해가 절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몇 해 전에 있었던 분출로 100여 가구가 파손되었고 1,100여 명이나 되는 이재민이 발생했을 정도다. 오늘은 다행히 화구가 얌전하게 잠든 날이라 나카타케 화구를 오르는 길엔 차들로 북적인다. 일 년에 얼마 되지 않는 날이다. 운이 좋은 J는 그 길을 P를 뒤에 태우고 한껏 긴장한 채 혼다 CRF 300으로 오르고 있다.


말하는 것을 일본어로 바꾸었음에도, 한번 영어로 작동하기 시작한 뇌는, 일본인의 젊은 패기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언덕길을 오르던 그때와 같은 마법을 부려내진 못했다. 거기에다, 아마도 누군가를 뒤에 태우고 운전하는 것은 일종의 사사로운 기억으로 분류가 되는지, 흐릿하게 알려주던 팁도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A만 믿고 P를 태웠던 J는 자전거 뒤를 잡아주던 부모가 손을 떼고 저만치 뒤에 있는 걸 알아챈 아이처럼 당황했다. 다행히 모범생이던 J는 큰 문제 없이 오토바이는 몰아낼 수 있었다. 비록 긴장은 되었지만, 웬만하면 넘어지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모는 거랑 뒤에 누굴 태우고 모는 거랑은 정말 다르네.'


J는 오늘 오토바이를 운전한 것 중에 가장 힘든 코스라고 생각한다. 길이 구불구불한 것도 아니고 고저 차가 심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J는 한 시도 도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브레이크를 잡은 손에서 긴장을 풀 여유가 없었다. 일단 두 사람이 오토바이에 타니 혼자 힘만으로 무게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풍경을 구경한다고 P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만 해도 작고 가벼운 CRF 300은 뒤뚱거리기 일쑤였다. 꼭 출렁이는 물통을 등에 이고 오토바이를 모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혼자만 다치지 않을 것이란 점도 부담이 되었다. P도 자신의 몸으로 오토바이를 탄 것은 아니었지만, P가 빌린 S는 아마 A처럼 '다치면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되지요.'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J는 나중에 오토바이를 사서 몰게 된다고 하더라도 뒤에 누굴 태우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P는 그런 J의 마음도 모르고 한껏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다.


“아, 저도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오랜만에 타니까 너무 좋네요. 와, 저기 봐요. 와! 저 하늘 보세요!"


바람이 휙휙 지나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워낙 큰 소리로 말하는 통에 P의 말은 귀에 잘 들렸다. J는 P라도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차마 주변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어도 눈앞에 흐르는 풍경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오를 수 있는 곳까지 다 올라와 버린 것 같다. 이대로 달리다 보면 곧 하늘과 맞닿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차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곧 완전히 멈춰서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오르막길이어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J는 브레이크를 꽉 쥐고 두 발로 땅을 단단히 짚어야 했다. J는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뒤에 누가 타니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도 훨씬 더 어려워졌다. 혹시라도 시동이 꺼지면 금방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발이라도 안정적으로 디딜 수 있어서 안심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요령도 생겼다. 이럴 때 A가 본체만체 있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J는 끝까지 홀로 위기를 헤쳐나가야 했다.


"음, 앞에 뭐가 있나 봐요."

P가 고개를 쭉 내밀어 뭐 때문에 차들이 멈춰있는지 확인하려는 통에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쏠려 J는 무게를 지탱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P는 J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챘는지 움직여서 미안하다고 쑥스럽게 말했다.



차들이 멈추는 이유를 곧 알게 되었는데 직접 차를 몰고 화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요금소에서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줄에서 빠져나와 옆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타고 온 차를 몰고 끝까지 올라가는 듯했다. A의 지도에 표시된 걸로도 아직 1~2km 정도 더 올라가야 하는 것으로 나왔다.


“여기다가 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뒤에 탄 P가 J에게 물어보았다.

“어··· 잠시만요 A 씨가 설정해 둔 지도에선 조금 더 올라가라고 되어 있어서요.”


J는 A가 굳이 더 먼 곳에 목적지를 표시해 놓은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를 세운 뒤에 화구까지 올라가는 방법도 확실하지 않았다. 셔틀버스 표지판을 본 것 같았지만 또 한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걸어가기엔 멀 것 같았다. J는 고민 끝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요령도 생겼고 발도 수월히 닿으니 천천히 하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주춤주춤 요금소로 다가가다 보니 어느새 다음이 J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통행료를 내는 사람들을 보며 J는 고민에 빠진다. 앞에 탄 사람들이 목에 건 태그 목걸이를 창 밖으로 꺼내 계산하는 걸 본 탓이었다. 단말기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나고 역시나 목걸이 주인의 얼굴이 2초 정도 영사되었다 사라졌다. J는 소심하게도 호텔 직원이 그랬던 것처럼, P가 자기 얼굴을 보고 나이가 너무 많다며 실망하거나, A의 외모와 비교를 하고 놀릴까 봐 두려웠다. 사실 까짓것 보여줘도 되었을 텐데 J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걸 주저했다.


J는 결국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돈을 내었다. 양발로 균형을 잡고 조심스레 재킷을 열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집었다. 양 허벅지로 오토바이를 고정한 채 핸들에서 두 손을 떼고 무얼 하는 건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P가 뒤에서 가만히 있어 줘서 무사히 돈을 건넬 수 있었다. 잠시 후, 요금소 직원이 거스름돈을 받아 가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받을 자신이 없었던 J는 핸들만 꼭 잡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출발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P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흠, 지갑이랑 현금도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아, 네…. 현금만 받는 곳이 있을 것 같아서요. 따로 준비해 왔어요."

"태그 목걸이로 결제하면 훨씬 편했을 텐데요…?"

P가 어딘지 모르게 따지듯 묻는다. J는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 헬멧 속 얼굴이 새빨개진 채 대답했다.


"그게…. 목걸이가 티셔츠 안으로 말려 들어가서 꺼내려니 쉽지 않았어요.”

헬멧 속의 P는 썩 그럴듯한 핑계는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다.

"흠, 영혼으로만 여행을 오면서 지갑이랑 현금을 챙긴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갑자기 음정이 두 단계는 낮아진 것처럼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J의 귀에 낯설고 서먹하게 들렸다.




요금소를 지나고 나니, 풍경이 그 전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푸른 초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돌과 먼지들만 황량하게 남아 있다. 꼭 큰 채석장이나 전쟁영화를 찍는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순식간에 풍경이 달라질 수가 있구나….'



그렇게 길이 끊기는 지점까지 올라가고 나니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표시가 핸드폰에 나왔다. 언덕 위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보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니 분화구일 것이라 짐작했다. J는 긴장을 풀지 않고 P가 먼저 내리도록 하고, 오토바이를 적당히 세웠다. 헬멧을 벗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리며 J는 자기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쉰다. 그걸 본 P가 싱긋 웃으며.


"아이고, 고생하셨어요. '아키라 씨', 감사합니다."


라며 J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J는 사실 아키라의 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자신이 진땀을 내며 다 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까 싶었지만 지금 와서 공을 따지는 건 유치한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쨌든 이제 더는 일본어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J는 다시 언어 패치를 작동시킨다.


"그나저나 오토바이 운전 잘하시네요. 일본 오기 전에도 오토바이를 모셨어요?"

"앗…. 아니요. 사실 오늘 십 년 만에 몰아보는 거예요."

"네? 뭐라고요? 하하하… 십 년 치고는 너무 능숙하시던데요."


뒤에 사람을 태우고 운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하려다가 P의 표정이 어두워져서 J는 그만두었다.


'놀랄 만하지, 나도 A만 믿고 타고 올라가자고 한 거여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같이 안 탔을 거야….'


J는 속으로 '내려가는 길엔 P의 차를 불렀으니 그래도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10년 만에 오토바이를 모는 처지에, 처음 만난 여자를 뒷자리에 태워서 처음 와보는 길을 어찌 올라올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라도 사고라도 났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는 생각에 머릿 속이 까마득해진다. 하지만, 옆에서 바람을 넣고 굳이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오자고 말 한 건 P인데 싶어서 억울한 마음도 슬쩍 들었다.


J가 아무 말 없이 P가 썼던 헬멧과 장갑을 받아 트렁크에 넣어 정리하는데 저 안쪽에서 핫팩이 보였다.  


“아 맞다! 여기 핫팩이 있어요.”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요. 얼른 주세요. 올라오는 내내 손이 얼어붙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요. 겨울 다 지나갔는데 웬 핫팩을 넣어놨나 했더니 여기서 쓰라고 그랬구나.”

"아, 이것도 A 씨가 준비한 거예요? 흠, 준비성이 너무 철저한데요."

"그러게요."


그때 P가 슬쩍 떠보려는 듯 말했다.

"혹시 여기에 누굴 데려오기로 한 거, 두 사람이 계획한 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전 정말 오토바이만 타러 온 거라…."


"농담이에요. 농담. 뭐 십 년 만에 오토바이를, 굳이 일본인의 몸을 빌려 타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죠."


P가 핫팩의 비닐 포장을 벗겨내며 또다시 비꼬듯 말한다. J는 서운한 마음에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변명할 거리도 아니고 변명하면 더 우습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 여긴 빌려주신 패딩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못 올라왔겠는데요."

P가 핫팩을 두 손으로 쥐고 옷깃을 여미며 J에게 말했다. 쿠사센리 휴게소와는 비할 수도 없이 바람이 많이 불고, 흙먼지도 심한 곳이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현재 화구의 상태를 표시해 주는 각기 색이 다른 경광등이 있었다. 경보는 총 네 단계였고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의 순서로 심각해 지는데, 빨간색의 불이 점등되면 관광이 불가할 뿐 아니라 당장 피난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J와 P가 방문한 날은 네 개의 램프 중 노란색 램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무시무시한 설명에 걸맞게 화구로 올라가는 언덕길엔 꼭 이글루를 닮은 긴급 대피소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고, 벽 두께가 못해도 30cm는 되게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화산이 터지면 저기 안에 들어가서 떨어지는 돌 같은 걸 피해야 하나 봐요."


P가 긴급 대피소 안을 쳐다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J에게 말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비틀비틀 휘청거리며 내려오는 휴머노이드가 J의 눈에 띄었다. 기계 몸이 뜻대로 제어가 안 되지 않는 건지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여 자칫하면 넘어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고장 난 휴머노이드의 화면 속 관광객은 낄낄대며 웃고 있었고, 옆에서 부축하는 휴머노이드들도 태평한 모습이었다. P도 별일이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저기 저분, 오류가 생겼나 보네. 여기 화구 근처에서 가끔 저렇게 된다나 봐요. 아줌마들은 안 오길 잘했네요."


J는 호텔에서 온천에 바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직원의 말을 떠올리며 걱정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근데 저러다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려나 모르겠네요.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요. 사람을 빌릴 경우에는 저런 일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요. 빌리자마자 오지 않는 이상은"

J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오전 10시에 이 몸에 들어왔으니 못해도 6시간은 훌쩍 넘었다.


걱정하는 J를 바라보던 P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J 씨는 걱정할 필요 없지 않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그냥, 너무 그 몸이랑 잘 어울려져 버리게 된 것 같아서 한 이야기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J는 도대체 자기가 뭘 그리 잘못했나 곰곰이 곱씹으며 언덕을 올랐다. 화구까지는 금세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화구를 둘러싼 울타리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밑을 내려다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J와 P도 빈자리를 찾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운 암벽 아래로 기묘한 빛깔의 물이 차 있었다. 표면이 잔잔해서 사실 액체인지도 불분명했지만, 만약 액체가 아니라면 더 기괴했다. 주변에서는 고여있던 옥색의 물이 끓어오른 수증기인지 아니면 틈새에서 새어 나온 유황 연기인지 확실하지 않은 것이 끝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산이라고 생각했을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붉은 용암이 흘러 내리는 강렬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충격이 만만찮다. 충분히 두려움을 자아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푸르렀던, 순해 보이던 아소산과는 완전히 딴 판인,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았다. 마치 지구의 피부를 벗겨내면 나오는 숨겨진 생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멸망하면 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소리의 근원지를 알 수가 없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위축되었다. 이러다 어디가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지금 화산이 분출하려는 건가 싶어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니라 여겼던 화구가 생각보다 큰 규모이고 기대보다 강렬해서 J도 놀랐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암벽에서 토도톡 소리를 내며 화구로 떨어지는 돌들을 유심히 들여다 보다보니 안으로 자기도 함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다. J의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유황 냄새가 점점 진하게 맡아지더니 자신과 일본인의 몸 사이로, 화구에서 나온 연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의 몸과 자신의 영혼의 틈이 점점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가슴이 철렁해서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야 정상일텐데 J는 도리어 흥미롭다. '엥,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고?' 정도 쯤으로 여겨져서 의아했다. 신기한 일이 생겨서 반가울 지경이다. 그러고보니 약간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문득 지금 자신의, 그러니까 영혼의 다리 부분이 온전히 지면을 닿고 서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다리가 짧은 A의 발바닥이 자기 영혼의 정강이 부분에 걸쳐서 질질 끌고 다니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스타킹을 입고 엉성하게 걷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나 자신의 영혼이 구멍이라도 나지 않았을까? J는 신경 쓰인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이 상황이 마냥 웃기다.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 은근히 아련하고 어느새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몽롱한 느낌으로 변한다. 제법 자유롭다. 


해본 적은 없지만 이게 바로 마약을 하고 난 다음의 느낌인가 싶어 왠지 쑥스럽다. 머리카락을 만져봤더니 흐늘흐늘한 명주실 같던 머리카락 대신 굵은 낚싯줄같이 억센 것이 만져졌다. 낯설고 생경하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바라보니 일본인의 손끝에서 야물게 마감되지 못한 자신의 영혼이 너울대며 화구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가려 하는 게 보인다. J는 자기도 모르게 "오"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일본인의 이마 위로 나와 있던 영혼의 꼭지가, 그러니까 자기 정수리가 점점 늘어나더니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힛" 하고 웃어버렸다. 아까 킥킥대던 휴머노이드 관광객이 왜 그랬던 건지 J도 알 것 같았다.


나른하고 몽롱한 기운을 떨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바로 옆에 있던 어떤 일본인 관광객과 눈이 마주친다. 착각인지 몰라도 호텔 직원과 비슷한 얼굴이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썹과 눈매가 가늘고 정 중앙에 가르마를 두고 뒤로 넘긴 머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A의 얼굴에 호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한 표정이다. 문득 P의 '훨씬 낫네요'란 말이 떠오르면서 울컥 화가 났다. 바로 그 말 때문에, 여기까지 그 고생을 하고 올라왔는데 그것도 몰라주는 P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호텔 직원과 비슷한 얼굴을 한 그녀를 보다가, 문득 될 대로 돼버리란 마음이 들어 J는 (A에게서 배운 대로) 한껏 눈웃음을 지어서 그녀를 바라본다. 역시나 그녀도 눈빛이 흔들리고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P가 그런 J를 쳐다보다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잘 생기긴 잘 생겼나 봐요. 함께 다니기는 좋은 외모예요. 제가 다 으쓱하네요."


J의 마음속에서 다시 검고 붉은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시샘과 분노와 배신감이 그의 마음을 채운다. '이런 바람둥이 같은 얼굴이 뭐가 좋단 말이에요.' 소리 내 말하고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까 새어 들어온 연기가 한참 들어와 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 이 몸에서 벗어나 버리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 때문에 늘어난 영혼의 더미는 한없이 늘어나서 화구로 향하고 있다. J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고 난간에 기댄다. 옆에서 P가 무심한 말투로 "괜찮아요?"라며 물어본다. J는 섭섭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 부끄러워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말하고,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J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늘 처음 만난 30대 초반의 일본인 여자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미소가 없으니 일본인 특유의 얼굴이다. 누가 봐도 일본인으로 단숨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일본적인 얼굴이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것은 입술이 아니라 입 전체였고 초롱초롱하게 보이던 눈은 어디로 가고 쌍꺼풀이 없는 눈은 답답하게만 보였다. 얼굴은 여전히 하얗고 뽀얗지만, 튀어나온 광대뼈는 심술궂어 보인다. 어쨌든 어딜 봐도 프랑스인이라 짐작할 만한 단서는 없다.


J는 심한 당혹감에 빠진다. 이 여자를 두고 숙명적인 여행의 마지막 퍼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습고 부끄러워진다. 저 여자 안에 누가 들어갔는지도 모르면서, 인연이라고 확신을 가졌던 게, 꼭 마술에라도 빠져서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심지어 여자를 꾀어내 볼 얄팍한 마음으로 오토바이에 태운 사람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게 억울하고 헛헛하고 씁쓸한 마음이 든다.


더 이상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돌려 다시 화구 안을 쳐다보는데 빠져나간 자신의 영혼 일부가 드디어 화구에 연결되어선, 옥색 액체와 섞여 점점 자기 얼굴로 바뀌기 시작했다. 갑자기 서늘한 마음이 들어서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는데 결국 그 얼굴이 눈앞까지 슬그머니 다가와 J의 귀에다가 호통을 쳤다.


'스무 살이나 어린 일본인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정신 차려!‘


J는 화들짝 놀래버렸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J는 뒷걸음치다가 왈칵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비틀거리는 J를 P가 부축하고 두 사람은 화구 밑으로 내려갔다.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대피소에 들어가 의자에 J를 앉히고 P는 자판기에 가서 생수를 한 통 사 와 그에게 먹인다. 화구에서 멀어지니 다행히 J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정신이 든 J는 충격이 크다. 방금 그런 일을 겪고 보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게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리고 P와 함께 화구에까지 올라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P 때문에 A에게 시샘을 내는 것도 유치하고,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자기 딸뻘의 일본인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P의 마음을 얻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P는 A와 모의해서 자신을 유혹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오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지난밤 술에 취해 운명과 같은 거창한 단어를 꺼냈던,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아침이 되어 날이 밝고 나니,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계면쩍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참, 옷. 드려야지."

한참 동안 J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 P가 어색해하며 말했다.


"아, 차에 타시고 주셔요. 아니면 가지고 가셔도 돼요. 저도 어차피 일본에 두고 가려고 했었어요."


"아니에요. 저도 숙소에 가면 옷이 있어요."

갑자기 무미건조해진 J의 말투에 P는 다시 마음이 상한 것 같다. 그 뒤로 굳이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공기가 맴돈다.


몇 분 뒤, P가 자기를 태울 차가 왔다고 하여 두 사람은 대피소 밖으로 나갔다. P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J에게 건넸다.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오토바이도 타 보고, 화구도 못 볼 뻔했는데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어요.”

P가 인사했다.


“저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오토바이 운전 조심히 하시고요.”

"네, 여행 잘하세요."

아까 전까지 함께 오토바이를 탄 사이라고 보기에는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매우 어색하다.


J는 고갯길을 내려가는 P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아무리 몸을 바꿔도 50대의 만남이란 결국 서글픈 신세가 되어서야 끝나는구나.'


익숙한 고단함에 J는 얼른 숙소에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자신의 머릿속 식당에서 그늘 밑 엘리자베스가 깔깔대며 웃는 걸 들은 것 같다고 J는 생각했다.




J는 P가 썼던 헬멧과 장갑을 트렁크에 넣고, 그녀가 입었던 자신의 발렌드레 외투도 배낭에 다시 집어넣었다. 옷가지에 그녀의 샴푸 향이 옅게 배어있었다. 귀 뒤로 새까만 머리를 넘기며 '괜히 몸이랑 싸우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예의상이라도 연락처를 물어보고 보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헛헛한 마음으로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멀리서 P가 타고 간 자동차가 다시 돌아와 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아무래도 A 씨를 빌리신 게 맞긴 한 거 같아서요.”

차에서 내린 P는 약간 상기된 얼굴이다.

“네?”

막상 P를 다시 본 J는 마음이 복잡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애를 써야 했다.


“아, 긴가민가했거든요. 진짜 처음 여행 온 게 맞나 싶어서요.”

“아···.”

“아니면 너무 고단수라 제가 또 속나···.”

“네? 뭘 속아요.”


“아니 뭐 그게 저한텐 중요하진 않은 것 같고, 하여튼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어···, 저는 핸드폰이 없는데”

“안 그래도 그럴 거 같아서 아까 휴게소에 가서 배낭 보내줬던 호텔 어디냐고 물으려다가 너무 구차한 거 같아서 되돌아왔어요.”


“하하하···”

“호텔이 어디예요”

“근데 아소시에 있는 호텔이 아니에요.”


J는 우물쭈물한다.


“세이후소 호텔이에요. 제 이름 대시면 연락될 거 같아요.”

결국 J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참, 근데 언제까지 계시죠?”

“내일모레, 아침에 떠나요.”

“아이고. 여행 일정이 엄청 짧네요.”


“네, 진짜 아소산 구경만 하려고 왔거든요.”

J는 그간 억울했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 모습을 본 P의 인상이 풀어진다.


“그리고 저 나이가 많아요. 이 A 씨보다 열댓 살이나 위에요.” J가 덧붙였다.

"열다섯이요? J 씨,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네요."


P가 또다시 혀를 날름 내밀면서 웃는다. 장난기 어린 표정에서 다시 프랑스인의 얼굴이 비친다. 왠지 J는 방금 P의 얼굴을 분명히 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P가 다른 몸에 들어가더라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생각이 스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 S 씨보다 딱, 열 댓살 많아요. 알겠어요. 연락드릴게요. 이거 또 너무 늦게 가면 이 아줌마들이 뭐라고 할지 겁나서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P를 태운 자동차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J 도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