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3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프랑스에서 온 P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보기로 결심합니다.
“아, 이거, 난감하네요.”
P는 양손을 귀 뒤로 넘기며 두 손에 머리카락을 그러모은 채 천천히 걸어온다.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짧은 머리카락은 하릴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버린다. J는 온통 새까만 것들 사이 새하얀 그녀의 몸이 대비를 이루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왜요? 무슨 일 생겼어요?”
“이게··· 드론을 타고 관광하는 거, 도착지가 여기가 아닌가 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 아줌마들이 아이고···. 다시 여기로 되돌아오는 거 말고 산 아래로 내려가 버리는 걸 탄 것 같아요.”
J는 P의 말을 듣고 무심코 산기슭 아래에 마련된 착륙장에 도착한 뒤 '여기가 대체 어디냐'며 당황하는 분홍, 노랑, 초록색의 휴머노이드를 상상했다.
“아, 그렇게 편도로 가는 것도 있나 보네요. 그거 괜찮다. 다음에 저도 휴머노이드로 와서 한번 타봐야겠어요. 그러면 친구들은 다시 드론 타고 여기로 올라 오기로 했나요? 아니면 P가 따로 내려가기로 했나요?”
“그게···. 하하하, 저희가 타고 온 차가···”
“네.”
“얘네가 움직이는 곳으로 자동 주행 되게 설정되어 있었나 봐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하하…. 친구들이 차에서 멀어지니까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자동으로 출발해서 따라갔나 봐요. 그런 기능이 설정되어 있었나 보더라고요. 애들이 이제야 차가 출발한 걸 알았다고···.”
사람을 빌린 것은 P뿐이다 보니, 자율주행이 가능한 차를 빌려 이곳으로 왔고, 그 차는 탑승자로 등록된 휴머노이드를 따라가는 편리한 기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J는 '운전을 안해도 되는 차도 빌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쩌면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네'라고 생각했다. 부지런한 차는 벌써 한참을 내려가 산 중턱까지 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P 씨는 어떻게 돌아 가시게요?”
“아, 괜찮아요. 지금 막 차를 다시 올려보냈다고 해요.”
“아이고, 근데 저기 꽉 막힌 차들 보니 다시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한두 시간으론 어림도 없겠는데요.”
J는 주차장에 빈자리가 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쿠사센리로 올라오는 길은 왕복 1차선이라 추월도 불가능했다. 차가 되돌아오려면 최소한 2시간은 걸릴 것이다.
“흠··· 그러게요. 언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졌데... 아이고···”
언덕 너머까지 차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것을 보고 P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새파랬던 하늘도 어느새 구름에 가려 잿빛으로 바뀌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을씨년스럽다. J는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에서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플레이 리스트가 다시 흐른다.
“P,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랑 같이 분화구나 보러 가요.”
마침내 J가 P에게 말했다.
“네? 하하하”
“어때요?”
J가 한 번 더 제안하자 P는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과연 그렇다는 걸 확인하고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연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근데 날씨가 추워서 안 될 거 같아요. 이렇게 입고 올라가는 건 무리예요. 여기보다 나카타게 화구는 훨씬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울걸요. 전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혼자서 분화구 다녀오셔요. 다녀와서 어땠는지 저한테 꼭 알려주시고요.”
“아니, 호텔에서 보내준 옷이 있으니까요. 아주 두꺼운 패딩이에요. 한 겨울용. 크기도 넉넉해요.”
"아아?”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이상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전 사실 여행 준비를 거의 안 하고 왔거든요. 혼자서 거기까지 가려고 하니 막막해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J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인 S의 외모는 꼭 숯으로 그린 목탄화가 연상되는 모습이라고 J는 생각했다. 훅 불면 새까맣고 고운 입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날아갈 것만 같다. 그렇게 날려 보내면 그 뒤에 P의 얼굴이 드러날까 궁금했다. J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너머 프랑스 여인의 얼굴을 상상해 보려다가, 호텔에서 자기를 비추던 단말기를 가져와 그녀의 태그 목걸이에다 대어 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P도 J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죠. 뭐. 저도 사실 혼자 여기에 있으려니 막막했어요.”
그리고 금세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J에게 삿대질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닙니다.”
“아이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아무한테나 같이 가자고 이야기할 성격은 못 돼요.”
“그러면 제가 친구들한테 J 씨랑 분화구 구경하러 간다고 이야기해 놓을게요.”
P는 친구들에게 다시 전화한다. P가 통화 중에 "아니야, 아니라고."라고 말하는 것이 J의 귀에 들렸다.
"차는 쿠사센리로 오지 않고 나카타케 화구 주차장으로 보내주기로 했어요."
J는 잘 됐다고 말하고 호텔에서 보내준 배낭을 열어 발란드레 패딩을 꺼냈다. P에게 입혀 보았더니 품은 컸지만 길이는 맞았다. P는 키도 컸지만 팔과 다리도 유난히 길었다. J는 하필 이 옷을 가지고 오게 된 것 또한 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짜 놓은 각본처럼 둘 사이가 이어지고 있다.
“흠, 남자 옷을 입으니까, 더 덩치가 더 커 보일 것 같네요. S 씨 사실은 엄청 여성스러운데 말이죠.”
아무리 길이가 맞다곤 해도 품이 큰 남자 옷을 입은 P는 어설프다. J는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네 약간 허수아비에게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보여요.”
“아 J 씨, S 씨한테 실례예요. 사과하세요”
“죄송합니다.”
“아, 그나저나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너무 따뜻해요. 이 날씨에 반팔을 입고 나온 건 너무 심했어요. S 양의 몸을 감기 걸리게 할까 걱정했는데, 고맙습니다.”
“다행이네요.”
P는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본다.
"여기서 나카타케 분화구로 올라가는 버스가 있데요. 제가 저기 가서 제가 물어볼게요."
P가 일어나서 안내소로 가길래 J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따라나섰다.
「すみません、阿蘇中岳火口 へ向かうバスに乗るにはどこへ行けばいいですか?」
- 실례합니다. 나카타케 화구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나요?
안내소의 직원은 입구에서 나가 우측으로 3~4분 정도 올라가면 화산 박물관이 나오고 거기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J는 일본어로 직원과 대화하는 P를 낯선 듯 쳐다본다.
"일본어를 쓰셨네요."
"Oui, il est souvent difficile pour les Japonais de comprendre le français."
- 네,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아는 경우는 드무니까요.
다시 익숙했던 P의 미소가 되돌아와서 J는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계속 일본어를 썼다면, 아마도 죄책감 때문에 여행 내내 불편함을 느꼈을 거라고 J는 생각한다. 일본어를 쓰는 P는, 확실히 여자보다는 아이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J는, 이후에 P가 나간 일본인 S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에게 지금과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S 씨 나이는 몇 살인가요?"
"이제 막 30대가 되었어요."
"아 그래요? 저랑은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네요…."
J는 자신과 일본인의 나이 차이가 새삼스레 당황스럽다. 거의 스미스의 딸 뻘이다.
P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아직 결혼은 전이래요. 남자 친구도 없대요."
J는 'P는요, 결혼하거나 남자 친구가 있는 건 아닌가요?'라는 말이 목젖까지 나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휴게소 밖으로 나갔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휘적 걷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J는 갑작스러운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잠시 멈춘다. 옆에 J가 없다는 걸 깨닫고 P가 뒤를 돌아본다. 고원이 만들어낸, 기대보다 긴 지평선 사이에 그녀가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광경이 J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느새 하늘을 채운 짙은 구름 앞에서 세찬 바람에 눈을 찡그린 그녀가 풍경에 녹아들어 간 채 씩 웃는다. 훅 불면 먼지라도 나올 듯한 느낌이다. 그녀에게서 나온 새까만 목탄 때문에 하늘이 이렇게 어둑어둑해진 건 아닐까? J는 생각한다.
"뭐해요, 빨리 안 오고"
J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민망하게 코를 쓱 훔치고 그녀 옆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휴머노이드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휴게소 앞을 지나가며 P가 말했다.
“사실 분화구를 꼭 보고 가보고 싶었어요.”
“아 그러셨어요?”
“네 이게 분화구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정말 잘 안 오거든요. 내일 되면 또 금방 폐쇄될지도 몰라요. 일본은 워낙 조심도 하는 곳이라”
정류장에 도착했더니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금방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P와 J는 당황하며 맨 뒤에 섰다.
"분화구가 오랜만에 열려서 사람들이 많이 왔나 봐요."
"그러게요. 정말 사람들이 많네요. 전 별 게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요."
"제가 그랬잖아요. 여기 정말 구경하기 힘들다고 우리는 운이 되게 좋은 편이라고요."
바람이 P를 날려 보낼 기세로 맹렬하게 부는 탓에 P는 패딩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다. J도 입고 있던 래빗 점퍼의 지퍼를 잠그고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제법 쌀쌀했다. 정 안되면 배낭에 들어있는 비옷이라도 꺼내 입어야겠다고 J는 생각했다. P는 으슬으슬 떨리는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저 사실 젊었을 적에 오토바이 몰아 본 적도 있는데 그냥 오토바이로 올라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P가 눈을 한껏 찌푸린 채 말했다. J도 줄이 좀체 줄어들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참이다.
“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S 씨가 오토바이를 처음 타 보는 거라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 맞네요. 그러네요. 어쩌지 S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J도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는다. 한 번도 뒤에 사람을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오토바이를 탄다면 어쩔수 없이 A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겨우 A의 흔적을 지워가는데 다시 그의 능력을 빌려야 한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에이 이 녀석들이 차만 안 가지고 갔었어도 그 차로 올라가면 금방일 것 같은데···”
하지만 산 밑에서부터 타고 온 관광객들 때문에 빈자리가 얼마 나지 않는지, 막상 도착한 버스에 겨우 5~6명의 사람만 올라타고는 끝이었다. 기다리던 관광객 중 일부는 그걸 보고 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J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P에게 말했다.
“그럼, 조심조심해서 한번 오토바이로 올라가 볼까요.”
“네 그게 더 좋겠어요. 헬멧은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이럴 때 쓰라고 챙겨둔 건지는 몰라도 하나 더 있어요.”
“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A 씨 보통 사람이 아니네요. 이런 상황까지 예상해 둔 걸까요?"
"…. 그러게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A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꼼꼼하게 준비해 준 A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법도 한데 J는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는 게 왠지 내키지 않는다. 문득 A가 했던 다른 이야기도 떠오른다. 반드시 콘돔을 써 달라던 그 말, 갑자기 J는 침대에 누워 검사를 받고 있을 자기 몸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몸을 바꿔 오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A의 힘을 빌리는 게 안전하다.
빨간색 혼다 오토바이 앞에 서자 P가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
“이거예요? 너무 작은데요. 우리 둘을 태우고 언덕을 올라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는데요.”
J가 슬그머니 웃고 대답한다.
「あの子、こう見えても力持ちなんですよ。」
- 얘가 이래 봐도 힘이 장사더라고요.
J가 다시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P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깔깔깔 웃으면서 J의 어깨를 툭 친다.
"Tu es vraiment bien préparé. C’est super ! Je compte sur toi, Akira !"
- 준비성이 철저하네요. 좋았어요! 잘 부탁해요. 아키라 씨!
J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탑 박스에 들어 있던 헬멧과 장갑을 꺼내어 P에게 전해주었다. 헬멧은 치수가 맞았고 장갑은 약간 작다. P가 메고 있던 가방은 건네받아 오토바이 탑 박스(트렁크)에 넣었다.
J가 먼저 CRF 300에 올라타 오토바이를 지지하던 킥 스탠드를 밀어내어 오토바이를 세웠다. 찬 바람에 서 있었던 터라 사타구니에 닿는 오토바이 느낌은 싸늘하다. 발끝에 힘을 꽉 준 상태에서 P를 향해 오토바이라 타라고 손짓했다.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있다더니 과연 P는 능숙하게 뒷자리에 올랐다. 원체 팔다리가 길어서 수월했다. 오토바이가 삐걱거리긴 했지만 두 명이 앉기에 좁지도 않았고 무리가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P의 무게가 더해지니 J의 발이 더 많이 지면에 닿아서 훨씬 안정적이었다.
'I'm counting on you, Akira. (잘 부탁합니다. 아키라 씨)'
「出発いたします。」
- 출발하겠습니다.
바람이 쌩쌩 부는 가운데 J는 잠시 휘청거렸다가 균형을 잡고 조심조심 출발했다. 혼다 오토바이가 힘겨운 듯 출발이 다소 굼떴지만, 막상 출발하니 답답하지 않게 잘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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