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2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일본에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2025년 7월 15일, 오전 11시. J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 3번 터미널에 와 있다. 터미널 안은 후텁지근했다. 공조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커다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강한 햇빛을 이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J는 창 밖으로 활주로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전기를 낭비하는 것 보다 커튼을 내리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텐데'라고 생각했다. J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위해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쳐낸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국내 허브인 3번 터미널은 국내선과 국제선 모두 연결되어 있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넓은 통로를 분주히 오가는 인파를 보며 J는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과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J는 한국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다. 다행히 국제선 비행기가 출발하는 G 게이트는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짧은 거리에 있다.
한국에는, 모 기업에서 발주해서 만든 새 광고를 아시아 모델로 바꾸어 찍어줄 대행사를 정하러 가야 했다. 회사는 아직도 계약하기 전 꼭 직원을 보내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다행히 한국의 대행사와는 이미 여러 번 일을 같이 해본 경험이 있어서, 책임자와 미팅하고 본사의 지침을 전달하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 오래 걸리거나 힘든 출장은 아닐 것이다. 다만, 비행기 안에서 반나절은 오롯이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동안 엘리자베스의 상황 때문에 J는 출장을 최대한 피해 왔지만, 이제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회사에서도 J밖에 없다며 연신 미안해했다. 다행히 엘리자베스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2차 항암제는 기대했던 것보다 효과가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달마티안 강아지는 이제 PET CT에서 얼룩이 작아지고 많이 옅어진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젊은 나이와 쾌활한 그녀의 성격 덕택인 것 같다며, 잠시 항암을 쉬며 몸을 추스르고 다음 치료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자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머리카락이 없어진 것만 빼고는 혈색도 좋았고 식성도 돌아왔다. 가끔 두 사람은 무시무시한 병이 자기들 곁을 떠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J가 풀이 죽어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니, 엘리자베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다녀오라고 말했다.
"괜찮아. 다녀와 나 아무렇지도 않아. 회사에서 당신 말고는 갈 사람이 없다고 그랬다며."
"응, 다른 친구는 한국 쪽으론 출장을 나가기 어려운 개인적인 사정이 있데. 그 친구가 가는 브라질만 해도 좀 나을 것 같은데…."
"괜찮아, 나 아무렇지 않아. 대신에! 아픈 부인 두고 한국 가서 바람이나 피지 말라고. 킬킬킬"
엘리자베스는 한국 출장이 훨씬 나아 보인다고 J를 다독여 주었다. 사실 그건 그랬다. 브라질에선 광고 대행사 선정부터 해야 해서, 운이 나쁘면 최소한 열흘은 붙잡히게 될지도 몰랐다. 반면 한국은 길어야 2~3일이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J는 혹시라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게 찝찝했다. 엘리자베스가 멀쩡한 것이 더 불안했다. 이만큼 두 사람에게 평안을 주었으니 이제 차례가 바뀔 순서일 것 같았다.
그래서 J는 엘리자베스의 처형(캐서린)에게 연락해 자신이 한국으로 떠나 있는 기간 동안 동생과 함께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캐서린은 흔쾌히 승낙했고 남편 앤드루와 조카들은 뉴욕에 남겨두고 워싱턴으로 혼자 오기로 했다.
국제선 비행기가 오고 내리는 G 게이트는 그나마 사람들이 적었고 해도 덜 들어와 한결 시원해졌다. J는 땀을 많이 흘린 탓에 목이 말랐고 배도 고팠다. 눈에 뜨이는 작은 카페테리아에 들러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했다. J는 20달러를 지불하고 짐을 챙겨 가게 앞에 마련된 서서 먹는 테이블로 향했다.
허겁지겁 콜라를 마시고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기려 하던 그 때였다. 카페테리아 스피커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The Way We Were'가 흘러나왔다. 별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뜻밖에 한 구절이 J의 귀에 또렷이 들려온다. "If we had the chance to do it all again(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Tell me, would we? Could we?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뜬금없이 그녀의 구슬픈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경고같이 들린다. 왠지 불길하다. J는 금세 불안하고 찝찝해졌다.
결국 J는 샌드위치를 한 입 먹으려다가 관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자마자 엘리자베스와 제법 긴 통화를 했지만, J는 다시 전화를 건다. 엘리자베스가 낄낄대며 '또, 또 그 샤머니즘 발동했네, 뭐든 다 운명처럼 믿더라. 당신은.'하고 비웃어 줄 거라 기대하면서.
"응, 제임스. 나야 캐서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나와 J는 잠깐 당황했다. 다행이다. 처형이다.
"아, 캐서린, 엘리자베스는요?"
"아, 지금 목욕하고 있어. 기분이 좋은가 봐. 안에서 흥얼거리고 있네. 방금 우리 맛있는 점심 먹었어. 제임스는 곧 비행기 타겠네?"
"네, 맞아요. 1시 비행기에요."
"응, 들었어. 엘리자베스는 별일 없어. 괜찮아. 바꿔줄까?"
J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엘리자베스는 뭐가 그리 걱정이냐며 놀릴 게 뻔하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긴장도 풀렸다.
"아니에요.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한국 도착해서 전화하죠. 뭐."
"응 그래, 여긴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서 잘 지키고 있을게."
캐서린과의 전화를 끊고 J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괜찮다는 걸 확인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작은 불안이 똬리를 틀고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음을 느낀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고조되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목소리는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J는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검색해 본다. 유나이티드항공에서 오후 1시 30분에 68번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UA230편이 있다. 5시간 정도만 타고 가면 워싱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늦은 저녁이 되겠지만 괜찮았다. 오랜만에 캐서린도 보는 거다. 조카들 안부도 물어야지. 한국에 부친 짐은 대행사의 한(Han)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와는 막역하다. 엘리자베스를 확인하고, 이 불안을 떨쳐낸 뒤, 내일 다시 출발하면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때 G 게이트에서 아시아나항공 탑승수속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J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짐을 챙겼다. '난 너무 예민한 게 맞아' J는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P의 표정은 불쾌해 보인다. 친구들이 자기들 멋대로 낯선 남자를 식사에 초대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J는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P의 표정에서 은근한 기대감이나 수줍은 미소를 보았다면, 그는 아마 열등감과 질투심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심한 부끄러움이 그에게 찾아왔다. A의 잘생긴 외모를 써먹어 보려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A의 몸이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닐텐데 이제 와서 일본인을 탓하는 건 비겁한 일이었다. J는 유치해진 자신이 참담했다. 여행을 왔다고 너무 들떴었다. 젊은 몸을 빌려 성공적으로 오토바이를 타 냈다고 우쭐해 져 있었다.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15년 전으로 돌아갔다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까닭 없이 위화감이 찾아드는 것도 그런 탓일 테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지자'고 J는 마음먹었다.
잘 됐다며 식당 메뉴를 들여다보며 즐거워하는 휴머노이드 친구들 사이에서 J와 P는 어색한 눈빛을 나눴다. J는 무언으로나마,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합석하자고 대답한 것이, '그럴듯한 얼굴을 빌려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오해하진 말아 달라는 뜻을 전했다.
두 명의 일본인과 세 명의 휴머노이드는 식사를 하기 위해 옆에 마련된 큰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J는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일인용 나베 세트를 주문했고 P는 카레덮밥을 시켰다. 3명의 휴머노이드 중의 한 명은 1층의 커피숍으로 내려가 화산재 라테를 사 오기로 했다.
P와 친구들은, 막상 자리를 옮기고 나자 같은 테이블에 J가 함께 있다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자기네끼리의 대화에 열중했다. 쿠사센리의 평야가 얼마나 넓은지,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드론 여행이 얼마나 재밌어 보이는지, P, 너만 휴머노이드를 빌린다면 4명이 타면 딱 맞을 텐데 같은 이야기였다. 긴장했던 J는 머쓱해졌다. 그래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일본어 패치도 중단시켜 보기로 했다. 더 이상 일본인의 몸 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또, 더 이상 일본인의 덕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영혼과 몸 사이에서 번역을 해주던 일본어 패치가 작동을 멈추자, 몸의 반응 속도가 아주 느려지기 시작했다. 병목을 일으키는 구간이 J의 영혼이 아니라 A의 뇌 안이 되면서 생각의 속도가 줄어들고, 덩달아 행동마저 굼떠지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의미를 모른 채 발화만 할 수는 없으니 뇌는 어쩔 수 없이 전달되는 영어를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익숙해져야 했다. 거칠고 급박한 학습 과정이었으나 J의 영혼이 매 순간 교정해 주면서 일본인의 뇌는 영어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집중하느라 특유의 여유롭던 표정은 사라지고 신중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뇌의 언어 영역에 부하가 걸려 가벼운 두통이 일었지만 참을 만 했다. 아니 차라리 그 두통이 자신이 정상적으로 주도권을 되찾아 내는 과정처럼 느껴져서 안심이 되었다. 너그러운 명령에 제 멋대로 움직이던 작은 난쟁이들을 드디어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든 것 같아서 흡족했다.
'진작 이렇게 해 둘 걸'
서빙하는 로봇들이 식사를 가져다 주었고, 분홍색 휴머노이드 친구는 '화산재' 라테 3 잔을 사 가지고 올라왔다. 정말로 커피 속에 화산재가 들어 있나 싶어 모두들 잔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냥 이름만 붙인 거란걸 알고 실망했다.
J가 시킨 일인용 나베세트는 팔팔 끓는 냄비에 전골요리가 담겨 오고 밥 한 공기, 두세 가지의 반찬이 올려져서 나왔다. 맛이 썩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추운 산길을 한참 올라온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기에는 충분했다.
P가 시킨 카레덮밥은 밥의 양이 꽤 많았는데 P는 금방 한 그릇을 비워냈다. 허겁지겁 식사하던 P와 J가 눈이 마주쳤고, J는 되도록이면 최대한 눈웃음을 짓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 채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본 P가 피식 웃길래 J는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보니 P 도 자기 몸이 아니라 낯선 일본인의 몸에 들어간 처지인건 똑같단 걸 J는 깨닫는다. 자기가 느끼는 불안함처럼 그녀도 자기를 보고 비슷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을까. 이 남자가 왜 같이 식사하자고 하지, 마르고 창백한 젊은 동양인이 취향인 건가. 사실 안에 들어 있는 나는 전혀 다른 인종에, 다른 사람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J는 왠지 그녀가 측은해 보인다.
식사를 다 마친 P가 입을 쓱 닦고 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휴머노이드 친구들에게 말했다.
“너희, 저 휴머노이드용 드론 타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난 여기 있어도 되니까 니네 끼리 다녀올래?”
그 말을 들은 세 명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얼굴이 모니터에 띄워지)며 고개를 홱 돌려 모두 P를 쳐다보았다.
“어머? 그래도 되겠어?”
“그래, 너희가 하도 나만 사람으로 놀러 왔다고 뭐라 그러니까 좀 미안하기도 하고, 보니까 재밌을 것 같던데, 너네끼리 다녀와도 돼.”
J는 그렇게 '드론 관광' 타령을 하더니 그 뜻을 이뤘네 하고 생각했다. 하기야 자기가 봐도 재밌어 보이긴 했으니까. 휴머노이드로 와야만 타볼 수 있는 것이니 그냥 가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P가 다녀오라고 하니 세 명의 친구는 그제야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P만 혼자 떨어뜨려 놓고 자기들끼리만 관광을 가려고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P는 괜찮다고 하였지만 휴게소 안엔 식당 말고는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기엔 사실 지루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J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했던 노란색의 휴머노이드 친구가 또 다시 J를 보며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J 씨, 그러면 저희가 다녀올 동안 얘랑 좀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돼요?”
J는 힐끗 P를 바라보고 눈치를 본다. P는 일부러 눈빛을 피하고 못 들은 채 하는 것 같다. 다 먹은 접시를 수저로 뒤적거리고 있다. 아마 자기가 있어 주기로 하면 친구들이 맘 편히 타러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까 전에 P와 이야기 하다 만 '신체 교환 커뮤니티' 생각이 났다. 그걸 핑계로 삼으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말을 하기 직전 급히 생각해봤다. '같이 있고 싶은 것 맞나?' J는 마음을 정하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되도록 쉬운 말을 해야 했다. 아직 긴 말을 A에게 시키기엔 무리였다.
"Ifu Misso Porīnu izu okei wizzu itto, Aido akuchuarī raiku tu asuku haa samushingu tu."
- 네, P 씨만 괜찮다면, 저도 여쭙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어이쿠, 발음이 엉망진창이었다. 일본어로 말하던 J가 갑자기 영어로 웃기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P와 3명의 휴머노이드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쳐다봤다. 부끄러운 와중에도 J는 왠지 A에게 골탕을 먹인 것 같아서 통쾌하다. 그리고 J는 P를 쳐다보며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푸담갖지 마아세요호. 조큼 천에 말씀하신 커뮤니티에 대해서 여쭤보고 시픈게 있어서 그래요. 그것만 묻고 저도 금방 갈게요."
P도 어색한 영어 발음 때문인지 피식 웃고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들었지? 난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여기 있을게."
초록색 휴머노이드 친구와 P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슬며시 웃는 것이 J의 눈에 띄었다. 휴머노이드 친구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하게 휴게소 밖으로 나갔다.
로봇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식기를 정리했다. 그 사이 J는 일본인의 영어 발음을 교정하는 데 집중했다. 자음만 홀로 발음해내지 못하고 어떻게든 모음을 붙여야 성에 차는 습관을 버리게 했고, L과 R 발음을 할 때 굳은 치즈같이 딱딱해져 버리는 혀의 긴장을 푸는 법을 가르쳤다. 단어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읽어내지 못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한 강박을 떨쳐도 괜찮다고 알려줬다. 다행히 A의 몸은 아직 유연하고 고집이 없어서 J가 내리는 지시를 금방 따랐다. (아마라 존슨 양이 돌도 되기 전에 티베트어를 유창하게 쓰게 된 비밀을 드디어 J도 알게 되었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J를 보고 P가 휴머노이드 친구들이 남긴 음료를 쓱 밀어 주었다.
“이거, 어차피 손도 안 댄 거라서요. 한 번 드셔보세요.”
J는 영어로 말을 할 준비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받아 마셨다. 화산재는 안 들어갔어도 의외로 라테는 꽤 맛이 괜찮았다. 그제야 정신이 든 J는 P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을 따라 보았다. P의 친구들이 신이 나서 폴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J도 P와 함께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P가 느릿느릿하게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J에게 묻는다.
“혹시 J 님은 그 일본인으로 렌탈한 이유가 있으세요?”
“아, A 씨요? 렌탈 사이트에서 오토바이를 몰 줄 아는 분이 이분 외에는 없었어요.”
오, 아직은 어색하지만 금세 나아졌다. J는 뿌듯하다. 그리고 영어가 익숙하지 않다보니 말이 나오는 속도가 확연하게 느려진 게 마음에 들었다. 도중에라도 눈치를 보고 아니다 싶으면 말을 바꿔도 될 정도다.
“아 그렇구나.”
P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J는 그녀의 표정이 신경쓰여 약간 긴장을 한다.
“왜요?”
“아, 별건 아닌데 A 씨 외모가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타입인가 봐요.”
“네?”
“아까부터 S 씨가 좀 흥분한 것 같아요. 몸의 반응을 보면요.”
“네?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P의 뜬금없는 말에 A의 몸이 결국 반응했다. P가 혹시라도 바지 앞섶을 보게 될까 봐 J는 급히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난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A 씨는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P는 턱을 괴던 손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꿔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 그러시구나.”
“음, 실망하신 건 아니죠?”
“물론이에요. 제 얼굴도 아닌데요.”
“저도 잘 모르지만, 클럽 같은 곳을 가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하하하, A 씨 외모에 끌린 사람들이 저와 대화해보면 늙은이인 거 눈치채고 다들 도망칠걸요.”
민망해 하는 J의 얼굴을 P가 유심히 쳐다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아참, 그 커뮤니티 보여드릴게요.”
라며 핸드폰을 꺼내 J에게 보여주었다. 작은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느라 자연스레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려 그녀는 자주 귀 뒤로 머리를 넘겨야 했는데, 그때마다 쿠사센리의 세찬 바람 냄새와 섞여 옅은 샴푸 냄새가 났다.
A가 보여주는 커뮤니티 머릿글엔 '우리의 영혼은 다 해낼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P가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니 사람들이 글을 올려 둔 게 보인다. P의 말대로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 특이한 것은 게시글마다 자기 신체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다양한 자료들을 같이 올려 두었단 점이었다. '요리를 잘해요', '수영이 능숙해요', '피아노를 잘 쳐요', '그림을 잘 그려요' 등등. 나이와 비용 두 가지가 가장 큰 요소였던 렌탈 사이트에서와 달리 커뮤니티에서는 교환을 통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J는 A의 뇌에 영어를 가르쳐 주고 있고, 자신은 A에게서 오토바이 운전을 배운 것이긴 했다.
'왜 세계정부에서 사람의 몸을 바꾸는 걸 그냥 놔 두는 건지 알 것도 같네.'
J는 회원들이 올려놓은 다양한 재주를 구경했다. '양손으로 동시에 서로 다른 그림 그리기', "얼굴 근육으로 온갖 표정이 가능함', '기타 줄이 하나 끊어져도 공연이 가능' 같은 능력을 써놓은 게시물도 있었다.
"그런데, 이 커뮤니티 말이에요. 가입하고 바로 몸을 바꾸지는 못해요."
"아, 그래요?"
"네, 교환하려면 일정 기간도 지나야 하고, 보내야 하는 서류도 몇 가지 있어요. 좀 번거롭죠?"
"제법 까다롭긴 하네요."
“이게 몸을 서로 교환하는 거다 보니까 더욱 조심하려고 해서 그런 거 같아요.”
P가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J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맞아요.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몸이 미치는 영향이 크더라고요. 가끔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뭘 하려고 할 때도 있는 것 같고."
“네, 맞아요. 처음엔 그렇더라고요. 그럴 때 괜히 몸이랑 싸우려고 하지 마시고 그런 어색한 감정을 말로 표현해서 내뱉어 버리면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아 조금 전에 S의 몸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신 거처럼요?”
"네 맞아요”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마주 보고 웃는다. 그제야 A의 몸도 가라앉는다. J는 다리를 풀고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기억도 그래요. 몸이랑 연결이 끊기니까 뭔가가 기억날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그러네요."
"아, 맞아요. 그런 경험을 한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네"
"영혼 상태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 거래요. 그러니까 그걸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큰일이 생기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J는 드디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딘지 모르게 이곳 쿠사센리 휴게소에서 느껴지던 위화감이 간단하게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다. J는 입속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P가 미소를 띄며 말한다.
"아마, 방금 J 씨가 일본어 대신 영어로, 말하기로 한 것도 일부러 그러신 거지요?"
"네, 이분이 워낙 활동적이어서 그런지 행동으로 옮기시는 게 엄청 빠르더라고요. 오토바이를 탈 때는 도움이 되었지만…. 잘 못하다가는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전 그게 훨씬 낫네요. 뭔가 점잖아진 거 같아요."
P에게서 '훨씬 낫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J는 일본에서 무너졌던 자존심이 처음으로 회복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래, 비록 오토바이도 잘 못타고, 매력적인 눈 웃음도 못 짓고, 음침할지는 몰라도 난 '점잖하다고'라며 크게 외치고 싶었다. 일본인의 몸 안에 숨겨진 자기를 알아봐주고 지지해주는 P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J의 목걸이에서 작은 알람 소리가 났다. 티셔츠 안에 들어 있던 목걸이를 빼내 보니 “배낭을 휴게소 안내소에 맡겨 두었습니다. 찾아가시면 됩니다. – 세이후소 호텔”라는 메시지가 홀로그램으로 떠서 보인다. J는 P에게 가방이 왔음을 이야기하고 일어나 안내소로 갔다. 드론을 통해 배달된 배낭은 차갑게 식긴 했어도 그 안에 패딩과 비옷은 그대로 잘 있었다.
J는 손목에 올려진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벌써 두시가 한참 넘었다. J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니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J는 고개를 돌려 P를 본다. 자신이 저 사람에게 끌리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어떻게 할 건데' 라고 생각하니 여태 그랬듯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여행을 온 상태다. 덧붙여서 프랑스에 사는 여자다. 역시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일이다. 금방 서글퍼지고 고단해지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여태 그랬듯이.
그러지 말고, 혼자만 진지한 척 하지말고, 간단하게 여행지에서 짧고 강렬한 인연이 되는 것도 J는 고려해 봤다. 그런데 호텔 직원의 상기되던 볼을 떠올리니 그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원래 얼굴을 보고는 무덤덤해져서 본 척 만척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만약 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해도 비참해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돈이 많은 노인들이 젊은 몸을 빌려서 벌이려는 짓들을 상상하고 진저리가 났었는데 자기가 A의 몸을 이용해서 똑같이 따라 하려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헤어지는 게 깔끔하다고 J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늙은 언어로 사고하느라 이젠 머리마저도 함께 늙어버렸는지 A의 몸에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덕분에 가방이 벌써 왔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만 하고 돌아서자. 깔끔하게. J는 단단히 마음먹고 P에게 다가섰다.
“Happy Days Are Here Again! 다행이네요. 이제 출발하셔야죠?”
P는 눈을 반짝이며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해 주며, 마중을 나가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J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맙소사.' J는 자기도 모르게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P도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어색하게 자리에 앉는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네, 스타탄생의 Babs,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예요."
J는 어쩔 수 없이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P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곡 제목을 이야기한 것이 마치 암시나 조짐처럼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아소산으로의 여행에 P가 마지막 조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여행 오기 직전에 들었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아닌가. 결국 그 가수는 따지고 보면 아소산으로 여행을 오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친근하게 여겨진 것도, 이유 없이 끌렸던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될지 모른다고 J는 생각했다. 사실 뜬금없이 아소산에 와서 오토바이를 타기로 한 것이 마치 숙명처럼 느껴져 시작한 여행이 아니던가. (알다싶이 J는 미신을 신봉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아직 3시도 안 되었는데요. 뭐”
P는 그런 J를 보더니 피식 웃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3월에 말이에요. 쿠사센리 이쪽을 다 불태워 버리는 거 아세요?”
“아 그런가요?”
“네 노야키라고 부르는데 겨울 동안 지저분하게 자란 억센 풀들을 다 태워서 말과 소가 먹기 좋은 순한 풀이 다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거래요.”
“아아··· 그러면 원래 이렇게 깔끔한 초원은 아니네요. 저는 어쩜 여기는 풀들도 다 얌전하게 잘 자라나 하고 신기해했어요."
“오토바이 타고 오시면서 삼나무 숲 되게 신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요. 그것도 꼭 일부러 심은 것처럼 너무 빽빽하더라고요.”
“네 맞아요. 그것도 산사태 때문에 일본에서 일부러 그렇게 줄을 딱딱 맞춰서 세운 거래요.”
“일본은 참 열심이네요. 신기하다."
J는 속으로 저 넓은 땅을 태우고 저 많은 나무를 심으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야 할지를 생각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면서 지나쳤던 아소시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P 씨는 일본에 자주 오셨나 봐요.”
“아니요. 하하하 그 요즘에 일본 휴머노이드는요”
“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면 머릿속에 막 여행지 정보가 들어오게 되어 있데요.”
“아하!”
“제 친구들은 완전히 일본 전문가가 다 되었잖아요. 차 타고 오는데 무슨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랑 같이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재잘재잘”
“괜찮네요. 그건.“
“어휴 안 괜찮아요. 기계에 올라타니 눈치가 없어져선···. J 씨한테 민폐나 끼치게 하고”
그때 P의 목에 걸려 있던 태그에서 알람 소리가 났다. 내용을 확인한 P가 말한다.
“잠시만요. 얘네가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전화 한번 하고 올게요.”
P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J는 전화기를 귀에다 대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P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느새 쿠사센리 휴게소의 주차장은 자리가 꽉 차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우측의 능선 너머까지 꽉 채운 차들은 얼른 주차장에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은 여전히 많이 불었지만, 건너편 평야에 관광을 즐기려는 휴머노이드들은 되려 더 늘어났다. 그에 반해 J와 친구들이 자리를 비운 휴게소는 다시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말고기 회 카드를 파는 상점도 한적하다.
J는 드론이 날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며, '얼마나 재밌어 보였으면 친구를 혼자 두고 갈 정도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실히 어디선가 P를 본 적이 있는 건 맞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는 P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기억을 더듬는 건 인제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럴 리는 없을 테고' 말이다.
J는 남아 있던 화산재 라테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Barbra Streisand - 1965 - My Name is Barbra - Happy Days Are Here Again
24년 12월 16일. 글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혹시 몰라 이전의 글들도 남겨놓았습니다.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