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12 (1부 완결)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다이칸보 전망대에서 일본인 A의 지인을 만났습니다.
두통이 좀처럼 가시질 않아 큰맘을 먹고 찍어 본 뇌 MRI에서 나온 '낯선 둥근 덩어리'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저만한 게 자궁에 들어왔다면 훨씬 행복할 텐데'라는 말을 내뱉었다. J는 '오늘 당장 입원해서 이게 어디서 온 건지 검사를 해야 한다'라는 의사의 말에 아득해지다가, 엘리자베스가 난데없이 아이 이야기를 꺼내서 충격을 받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니 혀를 날름 내밀며 웃어 버린다. J는 어이가 없어 엘리자베스를 잠시 노려봤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엘리자베스의 뇌 안에 들어선 2cm 정도의 작고 동그란 그것은 정말 태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작은 덩어리는 결국 폐에서 옮겨 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두사람은 폐에서 자란 덩어리가 어떻게 머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상상해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폐에서 몹 쓸 것이 생긴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흡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엘리자베스는 대학생 때 3갑 정도 피우다 만 담배 때문이라며 자책했고 J는 자신이 묻혀왔을 담배 연기와 밖에서 사먹어도 충분했을 스테이크를 의심했다.
병원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일단은 뇌에 전이된 종양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깨어지기 쉬운 항아리를 포장할 때 쓰는 스티로폼 같은 걸 머리에 뒤집어쓰고 엘리자베스는 방사선 치료를 꿋꿋이 잘 받아 냈다. 그동안 J와 병원은 엘리자베스의 폐암에 대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슬프게도 엘리자베스에게는 운이 썩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효과가 좋은 표적항암제나 면역항암제 중에서 엘리자베스에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J는 뭔가 마법의 치료법 같은 이름의 사이버 나이프나 양성자 치료도 알아보았으나, 엘리자베스는 그런 범상치 않고 비싼 치료법은 J로 하여금 할 만큼 해'줬'다는 안도감을 줄지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이제 머리 쪽은 말짱해졌는데 뭐, 다른 쪽은 굳이 사이버 나이프나 양성자 치료를 할 만한 곳이 있지도 않잖아. 지금 난 암들이 게릴라 전술을 피는 바람에 PET CT를 찍으면 달마티안 강아지처럼 사진이 나온다고. 킬킬킬”
그렇게 의연했던 엘리자베스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카드가 고식적인 항암요법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화학요법을 받고 나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항암치료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데 치료를 받지 않고 임신이나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의사가 항암치료를 하든 안 하든 현재의 몸 상태로 임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J가 '나를 닮은 자식을 보면서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에서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며, 실은 자신이 '비출산 주의자'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나서야 엘리자베스는 못 이기듯 치료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그동안 임신을 미뤄왔던 것에 대해 무척 후회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에 아이를 가지기로 한 것은 두 사람이 합의한 결정이었음에도, 그 약속을 어기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이라도 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매번 죄지은 것처럼 미안해할 때마다, J는 자신이 무심코 엘리자베스에게 자식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쳐 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아이 없이도 충분히 즐거웠고 이상적이었다고 평가한 것이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싶어 내심 씁쓸했다.
2024년 겨울, 엘리자베스는 총 6번의 항암치료를 마쳤으나 허무하게도 암이 더 커져버렸다고 통보받는다. 면목 없어 하는 의사와 얼굴을 감싸쥔 J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밝은 얼굴로 '이제 발이 더 이상 안 아플 테니(1차 항암요법 때문에 발이 저리다며 잠도 잘 못 이뤘었다) 이쁜 신발도 신을 수 있겠네요'라며 농담했다. 순간 J도 무심코 머릿속에 예쁜 구두를 떠올렸다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2025년 봄이 되었다. 3주에 한번 맞는 항암제는 굳이 입원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더 이상 손과 발이 저리지도 않았다. 다만 여전히 머리는 빠졌다. 겨울이 지났건만 엘리자베스는 민머리를 감추려 털모자를 쓰고 있다. 곧 맞게 될 한 시간짜리 항암제를 기다리는 중에 엘리자베스 앞으로 꼬마들이 장난치며 지나갔다. 그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J,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그때 항암제 하지 말고 애나 가질 걸 그랬어. 어차피 효과도 없는 걸로 나왔는데 말이지.”
"에이, 왜 또 그래. 난 애 안 원한다니까~ 나랑 닮은 애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니, 그냥. 아쉬워서. 내가 죽고 나면 당신한테 남겨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 같잖아.”
그 말을 들은 J는 아찔했다. J는 그제야 그녀가 왜 아이에 미련을 가진 건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J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말끔히 지워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우울해하는 것 처럼 보여 J는 일부러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글쎄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전부 당신이 만들어 준 것밖에 없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엘리자베스가 J의 말을 듣고 혀를 날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 기억 사용료라도 내야겠네."
"앞으로도 안 받을 테니 걱정 말고 오래오래 쓰세요."
J의 품 안에 엘리자베스가 안겨 왔다. 그녀의 등이 눈에 띄게 작아진 게 느껴져 J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막느라 혼났다.
J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절대 잊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다이칸보 전망대에서 보는 아소산은 정말 명불허전이네요. A 씨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경치를 다 보고,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안경을 쓴 통통한 남자를 만난 뒤 A의 몸에서는 반가움과 안심, 친밀감과 관련된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동공이 커지고, 안와 근육이 수축하고, 입꼬리는 올라가고 말의 톤이 평소에 비해 조금 더 올라가 흥분을 표시했다. 심장의 박동은 낮아지고 긴장했던 어깨가 부드럽게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빌린 몸의 해마(기억이 저장된 뇌의 장소)에는 접근이 막혀 있어 J의 영혼은 열람할 수 없었지만, J는 두 일본인이 제법 막역한 사이임이 분명하다는 짐작이 들었다. 그래서 J는 일부러 대화를 좀 더 이어갔다.
“네, 다이칸보 전망대는 저와 A가 자주 다니던 곳입니다.”
J의 호의에 친구의 표정도 밝아졌다. J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앞에 있는 통통한 남자가 묘하게 스미스와 닮은 것 같이 느껴졌다.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J는 앞에 있는 일본인과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J의 영혼에 그의 얼굴이 무척 낯익게 느껴지는 것은 기시감(데자뷔)과 흡사했다. 사실 이런 현상은 뇌에 기억된 것과 영혼에 저장된 기억 간에 혼선이 발생할 때 원활하게 조율하기 위한 인체의 적응 방식 중에 하나다.
더불어서 J의 영혼이 다이칸보 전망대의 오르막길을 오르며 성취감에 기분이 상승한 탓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왜, 원하던 대로 일이 잘 풀리면 옆에 지나가는 아무나라도 붙잡고 뭔가 떠들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결국 J는 한술 더 떠 A가 준 핸드폰까지 보여주며, 푼수처럼 큰 소리로 자랑하듯 친구에게 말했다.
「はい、彼が経路が保存された携帯まで貸してくれて、本当に気軽に観光させてもらって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 네, 경로가 저장된 핸드폰까지 빌려주셔서 너무 편하게 구경하고 있습니다.
한데, 핸드폰을 본 A의 친구는 금세 티가 나게 안색이 어두워졌다. J는 그 친구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이 핸드폰에 둘이서 나눈 비밀 대화라도 있는 건가?' J는 어색하게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앞에 있는 일본인의 친구는 더 이상 스미스처럼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A의 친구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J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A가 혹시…. 그러니까, 어디로 간다는 말을 선생님께 했나요?”
“아, 저도 따로 여쭤보진 않아서, 그런데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하면 된다는 메타버스 주소를 하나 받은 것이 있습니다. 알려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알 것 같네요.”
메타버스 주소 이야기를 하자, 친구의 얼굴이 침울해지더니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J는 마음이 복잡하다. 괜히 아는 척을 한 것 같다. 어쩌면 A가 돈을 빌리고 연락을 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친한 사이인 것 같긴 한데 왜 A가 몸을 빌려준 것도 모르고 있는 거지? 이 사람이 친구는 맞나?
“그럼…. 반가웠습니다. 모쪼록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러다가 A의 친구는 J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온 무리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J는 뭔가 썩 개운치 않은 기분이 남았지만 자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곤 애써 걱정을 털어냈다. 그러고 보니 만약 늙은 몸에 들어가 있었을 때의 자기라면 아무리 기분이 좋았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솔하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오토바이를 타야 한다는 핑계로 너무 일본인의 몸이 하려는 대로 다 놔두는 건, 문제겠네'
J는 A의 핸드폰을 조작해 다음 목적지를 확인했다. 쿠사센리 휴게소다. 45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훨씬 넘었다. 다이켄보 전망대에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늦을 것 같긴 해도 쿠사센리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오토바이에 탄 채로 흐르는 풍경을 구경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J는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멧을 쓰려고 하는데, 조금 전 헤어졌던 A의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에, 선생님, 여행 중에 난처한 상황이 생기거나 하시면 저한테 꼭 연락해 주셔야 합니다.”
J는 당황해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헬멧을 잡으려고 하는데, A의 친구가 헬멧 위에 턱 하고 손을 얹는다.
“그 친구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을 충동적으로 처리하는 편이라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결례인 줄은 알지만, A가 선생님께 드린 핸드폰으로 제게 연락하시면 되실 텐데요. 아마 우동집 사장으로 저장되어 있을 거 같은데 지금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J는 슬슬 불쾌해졌다. 아무리 자기가 실수를 했다고 해도, 돈을 주고 이 몸을 빌린건데. 하지만 우동집 사장이라고 하는 친구는 마치 '지금 당장 해보지 않으면 안 갈 겁니다.'라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쩔 수 없이 J는 A의 핸드폰에서, 페이스타임 앱을 클릭해, 우동집 사장으로 저장된 연락처를 찾아내 그에게 보여줬다. 우동집 사장은 전화기를 뺏아 들고 통화버튼을 눌러 자기의 전화기로 연락이 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A의 추천 여행경로'에 자신의 가게(우동집) 위치까지 추가하고서야 핸드폰을 돌려줬다.
우동집 사장은 "실례했다"며 연거푸 사과를 하더니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여행 중에 꼭 식사하러 오십시오.” 신신당부하고서야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게 돌아갔다.
J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심 혼자 잘 여행하고 있었는데 일이 꼬여버린 것 같았고, 둘이 어떤 사이인지도 잘 모르면서 주책맞은 짓을 해 A가 불쾌해할 것도 같았다. 그냥 A가 '아닙니다'하고 가시지 그랬어요.라고, 타박할 것 같았다.
‘이 몸으로 오토바이를 탔다고, 일본어를 한다고 A가 된 것은 아닌데 말이지.’
J는 남은 여행 동안 더 이상 A의 지인과 만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만나더라도 길게 대화하지 않으리라. J는 한숨을 내쉬며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아소시를 지나 쿠사센리 휴게소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될 무렵에 작은 공동묘지가 나왔다. J는 공동묘지를 지나며 '최근 망자와 유족 간에 영혼을 거치하는 문제로 잦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망자는 자기 영혼이 되도록 오랫동안 남아있길 바랐지만, 유족은 그 돈이 낭비라고 생각해서 생기는 문제였다.
영혼의 존재가 알려지고 난 뒤 장례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신체보다는 영혼이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 부패할 시체에는 예전보다 관심을 덜 들이게 되었다. 게다가 주인공이 참석하는 장례식은 이전처럼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망자와 대화할 수 있게 된 탓에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마치 이민이나 긴 여행 정도로 생각했다. 사망은 다소 개인적인 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전기적 사망도 생물학적 사망과 같이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영생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 소수였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영혼에 전력을 꾸준히 제공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신체가 사망한 영혼은 법적인 지위가 모두 상실되므로 죽은 이들에게 머물 공간을 제공하는 데 들어가는 구독료는 오롯히 세상에 남은 유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 구독료는 세상에 남은 유족들에겐 절약할 수 있는 항목 1순위가 되기 쉬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슬픈 사실은 오랫동안 존재하게 되었다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도 오래 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잊혀지고 외로워진다는 건 영혼이 된 이후에도 생각보다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정부는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는 있되 현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어떠한 행위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많아 수십 년 치 구독료를 선납한 영혼이라도, 혹은 아예 자신만의 서버를 구축해서 영원히 지낼 방도를 찾아낸 갑부라 하더라도 결국은 좁은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죄수나 다름 없어져 갔다.
엘리자베스는 영혼 분리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 사망한 터라 영혼은 없고 작은 묘지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J는 가끔 엘리자베스 영혼 일부를 자신의 영혼 데이터 어딘가에 보관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기억을 해주고 있으니까, 기억이 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는 엘리자베스에게 제대로 된 구독료를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J는 쿠사센리로 올랐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다시 시작되자 J는 반가웠다. 코너가 굽어지는 방향을 지긋이 노려보며 몸을 눕혔다가 세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차들이 많아서 다이칸보 전망대를 오르는 길만큼 코너를 즐길 수는 없었다. 차들의 주행에 맞춰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피곤했다. J는 움직일 때는 몰라도 가만히 있을 때는 확실히 차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고개만 돌리면 동영상에서 봤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다. 최근까지도 화산활동이 이어진 곳이라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말과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초원이 한동안 펼쳐지다가, 갑자기 땅이 뚝 끊어져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골이 나오고 그 틈새로 작은 폭포들이 흐른다. 나무가 하나도 없이 낮은 풀만 자란 언덕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더니 땅속에서 거대한 칫솔모가 솟아오른 듯 빽빽한 삼나무 숲이 갑작스레 등장했다. 군데군데 속살을 드러낸 땅들은 까만 흙 때문에 꼭 녹차 가루를 뿌린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아 보였고, 유난히 두껍고 거창한 옹벽은 이곳이 언제 산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임을 알려줬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봤더니 한 시 반이 훌쩍 넘었다. J는 먹은 게 없어서 더 춥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비게이션에는 쿠사센리 휴게소가 1km가량 남았다는 표시가 나왔다. '도착하면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지' J는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 놔둔 배낭 생각이 났다. 본국에서 애써 두꺼운 패딩을 보냈는데 챙겨 왔으면 더 좋았을걸, 가방에도 충분한 여유가 있었는데…. J는 호텔에서 배낭을 안 챙겨 나온 것을 후회했다.
쿠사센리 휴게소에 도착하니 바람이 엄청났다. 4월인데도 불구하고 흡사 한겨울 같은 날씨다. J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서둘러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휴게소 안은 따뜻했다. 창을 시원시원하게 크게 내어놓아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J는 창문 곁에 서서 풍경을 구경했다. 좌측에는 흰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소산 화구가 보였고 우측에는 상당히 넓은 고원 지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밖엔 제법 많은 수의 휴머노이드 관광객들이 있었다. 짙푸른 초원 위에 하얗고 매끈한 일본산 휴머노이드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은 꼭 항구에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갈매기 같아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고, 말을 타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관광객도 있었고, '아소산 드론 관광'을 하려 긴 줄을 선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추위와는 상관없이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그네들의 처지가 내심 J는 부러워졌다.
특히 휴머노이드만 탈 수 있는 드론 관광이 꽤 재밌어 보였다. 4명의 휴머노이드를 태운 작은 드론이 힘차게 하늘로 올라가 쿠사센리 상공을 한 바퀴 돌더니 회색 연기가 올라오는 화구 방향으로 슝 하고 날아갔다. J는 어차피 사고가 나더라도 영혼이 다치지는 않을 테니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맹렬히 불었지만, 하늘은 맑았다.
-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