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11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드디어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4월, 아소 시의 들판은 벼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땅에 볍씨를 직접 심기로 결정한, 그러니까 직파 방식을 택한 논 중엔 이미 볍씨를 뿌릴 드론을 띄워놓은 곳도 있었다. 볍씨가 가득 든 통을 짊어진 드론이 공중에서 세심하게 땅의 표면을 확인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볍씨를 하나씩 심어 나간다. 생장에 도움이 될 영양분과 농약을 적당히 섞어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전통적인 모내기 방식으로 농사를 짓기로 계획한 논은 물이 대어져 있다. 모종이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게 땅을 축축하게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이다. 모내기 방식은 한 달 동안 모판에서 모종을 키운 뒤에 논에 옮겨 심으니 품은 좀 들어가도 벼의 생육이 안정적이다. 잡초들이 위세에 눌려 감히 옆에서 자라지 못한다. 물을 가둬 만들어 낸 직사각형의 연못에 파란 하늘과 아소산이 힐끗힐끗 비친다. 바람이 불어 수면이 일렁이는 모습이나 벌레 때문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광경은 썩 동양적이다.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탄수화물은 이제 바다에 사는 해조류에서 나온다. 채취한 해조류를 원료로 공장에서 단당류 탄수화물 필름을 만들어내고, 이후 인공 쌀, 밀, 옥수수 등으로 가공되어 쓰인다. 햇볕만 있어도 무한정 자라나는 해조류는 매우 저렴하고 공해도 덜 일으킨다. 물론 돈이 더 들어가도 아직도 전통 농업의 방식으로 재배된 농산물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일정 면적 이하로, 소규모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기에 비제조식 먹거리의 가격은 예전에 비해 많이 오른편이다. 세계 정부에서는 기후 위기의 한 원인으로 대규모의 기업형 농업을 지목했고, 이제 예전처럼 헬기로 농약을 뿌려대는 거대한 농장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소 쌀은 화산재가 내린 땅에서 재배된 쌀이라 하여 제법 인기가 있다.
J는 아소시의 논 사이로 곧게 내어진 길을 오토바이로 지나고 있다. 시속 50km,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다. 오른손의 엄지 두덩으로만 그립에 아주 약간의 마찰을 걸어두어 엔진이 쉬지 않게 만들어 두었다. 몇 분 전 5단으로 기어를 올린 것 말고는 아무 조작도 한 게 없을 만큼 평온한 길이다. J의 마음은 완전히 느슨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오토바이에 타 있으니 꼭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용기를 내어 힐끗 발 밑을 내려다보면 지면이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왠지 발을 내려도 발이 끌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립 : 오토바이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뜻합니다. 오른쪽 핸들에 있는 스로틀을 돌리면 엔진으로 연료와 공기가 공급되어 가속이 이루어집니다.
A는 J를 배려하려 한 것인지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곧게 뻗은 길을 선정해 두었다. 호텔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아무래도 좁고 구불구불한 터라 어쩔 수 없이 양발을 내린 채 엉금엉금 지나와야 했지만, 곧 오토바이에 적응하기에 적당한 길이 나왔다. 비록 아스팔트는 오래되어 짙은 감을 잃어버렸어도 갈라지거나 움푹 파인 곳은 없었다. 길가에 사람이 다니지도 않고 사거리도 없고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그 길을 지나며 J는 A의 몸과, 혼다 오토바이에 제법 익숙해졌다.
'여기 진짜 좋네'
그렇게 곧은 길을 하염없이 지나던 중, J는 자신이 이 길이 끝나가는 것을 몹시도 아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별것 없는 평범한 농촌의 풍경이 어느새 J의 마음에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벼농사를 짓는 동아시아의 이국적인 풍경이 그에게 생소해서만은 아니다. 아소산의 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오토바이로 여행을 온 덕에 주변의 풍경이 이토록 살갑게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J는 깨달았다.
흘러가는 풍경 전체가 가리는 것 없이 시야에 가득 차서 들어온다. 자동차로 운전했다면 천정도 가리고 A필러도 가리는 터라 이만큼의 개방감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토바이는 방금 전에 봤듯이 발밑도 보인다. 그리고 이 공간을 음미하는 방법이 다만 시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흐르는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허리를 세우면 그 정도는 더 강해진다. 얼굴과 살갗에 닿는 공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맡는 짙은 풀 냄새가, 한기가 서린 신선한 공기에 섞여 J의 코로 스며든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들은 느릿느릿 걷거나 멈춰서야 느껴질 긴밀한 정취인데,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오고 가고 있다. 미련이 남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순간순간 변화하는 풍경이 애틋하다.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면 이 풍경이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타고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길을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해, 여행을 시작하고 싶은 조급증에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별다른 것도 없고 금방 지루해질 만한 곧게 뻗은 길이니까. 졸음운전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일 일이다. 하지만 오토바이에 올라타니 이리도 아쉽다. 방금 맡은 꽃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찾아보고 싶은 욕구를 참고 목적지로 향한다. 방금 지나간 곳에서 멈춰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간다. 이쯤 되니 목적지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오토바이에 오른 덕택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어쩌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이 길을 끝없이 달리는 것이 진짜 여행일지도 모르겠네”
여행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음에도 J는 벌써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농지 사이에 난 길을 하염없이 가다 보니, 어느새 차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이르렀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아소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J는 약간 흥분한다.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고 이어질 경로를 확인한다. 다행히 오토바이를 몰고 있어서 그런지 교통 체계가 썩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토바이엔 핸들이 좌측과 우측 중 하나를 선택해서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J는 통행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신호를 받고 교차로를 통과했다.
아소시는 찾아본 것처럼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어디를 봐도 아소산이 눈에 들어와, 마치 자신이 아소산의 품에 안긴 느낌이 들었다.
시내지만 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 운전이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운전이 조심스러웠으며 배려심이 있었다. 그리고 다들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오래된 오토바이에 대한 존중이 있는 듯 J가 모는 혼다 오토바이에 양보를 해줬다. 몇 번의 교차로를 지나면서 J는 이제 오토바이를 멈추고 서는 것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양손으로 꼭 쥐고 있던 핸들에서 팔을 내려 편안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긴장이 풀렸다.
그러던 중 문득 옆에 선 차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는 J는 자기도 모르게 "오"하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2020년식 혼다 오토바이 위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이 제법 근사하다. 실은, J가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씬하면서도 다부진 체격의 A는 거칠고 투박한 곳으로 모험을 떠날 것 같은 혼다 오토바이와 너무 잘 어울렸다. J는 '아, 확실히 꽁지머리가 더 어울리는 장면이긴 하네.'라는 생각이 들어 헬멧 안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20분쯤 달렸을까? 표지판에 다이칸보 전망대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소시 북쪽에 위치한 다이칸보 전망대는 아소산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약 900미터 높이의 외륜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외륜산은 현재의 아소산을 중앙에 두고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맥을 뜻한다. 실은 외륜산까지를 포함한 지역이 9만 년 전 최초의 화산활동의 범위다. 외륜산을 포함한 아소 화산지대의 모습은 큰 냄비 가운데에 넓적한 두부를 담아 놓은 형상을 상상하면 된다.
십만 년 전 어마어마한 규모로 화산이 폭발하고 분출된 마그마가 수십 km의 직경에 걸쳐 둥그렇게 퍼졌다. 시간이 흘러 뜨거웠던 용암이 식고 공기가 빠져나가고 나니, 끝의 테두리 부위를 빼고는 폭삭 주저앉아 평평한 땅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칼데라 지형이라고 한다. 남아있는 끝의 테두리 부분이 외륜산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백두산의 천지도 칼데라 지형이다. 차이가 있다면 백두산의 칼데라에는 물이 고였고 아소산의 칼데라엔 도시가 생겼으니 그 규모가 사뭇 다르다. 천지의 둘레는 13km이고 아소 화산 지대의 둘레는 130km를 넘으니 10배 차이다. '아소산이 터지면 세계가 위험하다'는 일본인의 말은 유난스럽지만, 세계 최대 규모라는 말은 허풍은 아니다. 식어서 평평해진 곳에 현재의 아소시와 미나미아소무라 시가 들어섰다. 사는 사람들의 수만 5만 명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 평평해진 땅의 중앙 부위엔 또 다른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다시 마그마가 분출되고 한데 뭉쳐 산을 이뤘다. 그것이 지금의 아소산이라고 부르는 고원지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냄비 안에 든 넓적한 두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두부의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 직경이 10km에 가깝고 둘레가 24km에 이른다. 큰 화산활동이 있었던 봉우리 5개를 일컬어 아소오악이라고 부른다. 그중에 한 봉우리는 아직도 화산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이 나카다케 분화구다. 외륜산, 즉 냄비의 테두리에 올라서면 중앙에 놓인 넓적한 두부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서 본 아소산은 누운 부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알려졌다. 외륜산 곳곳에는 아소산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유명한 곳들이 많았으나 오토바이 라이더들에게는 특히나 다이칸보 전망대가 유명했다.
슬그머니 J의 앞뒤로 오토바이가 한 대씩, 두 대씩 합류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엔 오토바이가 차보다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동영상에서 봤던 그 장면이다. 요란하고 산만한 옷들을 입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과장된 몸짓, 입에 문 담배,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운전자와 그의 등에 기댄 채 웃으며 뭐라고 말하는 머리가 긴 여자, 쌀쌀한 날씨임에도 문신한 팔을 훤히 드러낸 남자, 어깨높이보다 더 높게 핸들을 개조해서 마치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성, 각양각색의 정겨운 사람들이 전부 나온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고물 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 자극적인 매연의 냄새, 안전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불량한 탈 것, 손을 대면 시꺼먼 찌꺼기가 묻어 나올 것 같은 구형 오토바이들을 보고 J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0년 전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가슴이 울컥했다. J는 지금 이 장소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이 장소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이 장소에 어울리는 '오토바이'를 몰고 온 것이 뿌듯했다.
J가 잠깐 감상에 젖은 사이, 신호가 바뀌고 다이칸보 전망대로 오르는 본격적인 산길이 열렸다. 철컥하고 기어를 넣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더니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진다. 짐짓 비장한 표정이 된 사람들이 헬멧의 바이저를 손으로 내리고 하나둘씩 출발하기 시작했다. J도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서둘러 왼발로 1단 기어를 넣어 앞으로 나아갔다. 위세에 눌린 전기자동차는 비상등을 켜고 길 한편으로 쓱 자리를 내어준다. 오토바이 라이더들은 오른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동차를 추월하며 길을 오른다. J도 자동차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무리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쭐했다.
그리고 J는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경로를 확인했다. 그런데 맙소사, 전혀 평범한 경로가 아니다. 이미 출발을 해버린 터라 경로 전체를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커브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J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첫 번째 코너가 눈앞에 나타났다. 왼쪽으로, 길게 90도로 꺾인 것으로 나온다. 끝이 둔덕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제법 가파르게 휘어진 길이다. 그런데 대열의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정도의 커브라면 못해도 시속 20km 밑으로 속도를 줄이고 거북이처럼 천천히 올라가야 할 터인데 절벽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기세로 올라가고 있다. J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오토바이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여기서 브레이크를 잡아버리면 뒤쪽에 따라오던 오토바이들이 자신을 덮쳐버릴지도 몰랐다. 분위기에 휩쓸려 아직 오토바이 운전에 익숙하지도 않은 상태로 이 대열에 끼여버렸다는 후회가 든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장갑 안에 손에는 땀이 밴다. 조금 전에 전기 자동차처럼 자기도 뒤로 빠져서 천천히 올랐어야 했다. 풍경도 볼 겸.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속도로 저 코너를 들어가면 분명히 회전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 꼬라박힐 것이란 강한 예감이 든다. 그렇게 사고를 내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회상된다. 아.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도 없는데.
그때 선두에 서 있던 라이더 커플이 커브 길에 진입하는 게 보였다.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아니 되려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오토바이와 함께 멋지게 몸을 좌측으로 누이고 있었다. 커플과 오토바이가 같은 각도로, 마치 피사의 사탑을 보는 것처럼 비스듬하게 서서 중력에 대항하는 모습이 슬로비디오처럼 J에게 느리게 들어왔다.
그것을 본 J는 자신의 몸, 그러니까 일본인 A의 몸도 저렇게 (실은 훨씬 더 깊숙이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무심코 알게 된다. 긴장하지만 않으면, 자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저렇게 멋지게 오토바이를 기울여서 코너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20년 전 J도 오토바이로 코너를 돌려면 핸들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점까지는 알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앞바퀴와 뒷바퀴를 일렬로 유지할때만 꼿꼿히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가겠다고 핸들을 틀면, 돌지 않고 왼쪽으로 쓰러져 버리게 된다. 자동차가 하는 식으로 오토바이를 몰아서는 굽은 길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 무게중심을 옮겨 오토바이가 기울어지는 힘으로 커브 길을 돌아야 한다고 했다. 돌고자 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가해주면 구심력이 생겨난다고 했다. 그래서 오토바이 경주에서 선수들은 죄다 옆으로 누워서 무릎을 긁으며 커브길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실제로 그 행동을 이뤄내는 것은 어려웠다. 무엇보다 움직이고 있는 오토바이 위에서 어떻게 무게중심을 옮겨야 할지가 막막했다. 영상 같은 것을 보면 엉덩이와 무릎을 돌고자 하는 방향으로 내리는 것 같았는데 용기를 내어 시도해 보면 기울어지지 않고 쓰러지기만 했다. 도무지 균형을 잃지 않고 무게를 옮기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J는, 저 선수들은 운동능력이 탁월하기에 자기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세심한 방식으로 몸을 조작하여 무게를 옮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은 안 될 거라며 포기해버렸다. J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핸들을 쭈뼛쭈뼛 돌려가며 커브를 돌아가는 방식으로 오토바이를 몰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커브길로 진입하면 (그때 난 사고처럼) 죽 직진해버려 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 노심초사하며 내비게이션을 지켜보는게 습관이 되었다. 당연히 주변 경관을 볼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몸은 역시나 걱정하지 말라고,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몸을 옮기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아무리 10,000시간에 가깝게 오토바이를 몬 일본인의 몸이라 하더라도 신뢰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점점 대열에 있던 사람들은 코너에 하나둘씩 진입하기 시작하고,
드디어 J의 차례가 되었다.
J는 단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왈가왈부하려 간섭하면 일은 엉망이 된다는 것쯤은 익숙해졌기에 최대한 긴장이라도 풀기로 했다. '사고 나면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되지요 뭐.'라던 A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커브가 시작되는 지점, 아주 약하게 앞바퀴에 제동을 걸어준다. 브레이크의 마찰력이 지면으로 전달되면서 앞바퀴는 조금 더 끈끈해진다. 오토바이는 도로의 바깥쪽으로 옮겨간다. 조금이라도 코너의 곡률을 둔하게 만들기 위한 접근이다. 코너를 시작하는 지점, 일본인의 눈은 직진으로 달릴 때와 달리, 좀 더 먼, 그러니까 코너 끝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시선을 그곳에 두는 것만으로도 오토바이가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다. J는 탄복한다. '와우! 그래 시선, 시선이 중요하다고 했어!' 기억이 난다. 수직으로 서서 지면을 달리던 오토바이는 어느새 각도가 기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고 대신 호기심이 차오른다. (좋아!)
코너가 깊어지는 지점, 몸이 기울어지긴 했지만 아직 부족하다. 이대로는 결국 밖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란 불안감이 든다. 줄에 매달아 빙빙 돌리다가 저 멀리 날려가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구심력이 원심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무게를 옮겨 코너 안쪽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J가 매번 실패하던 그 지점이다. 속도라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얼른 고개를 돌려 낙하하기 적당한 곳을 찾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다치더라도 덜 다쳐야지.
그때 일본인의 왼손이, 잡고 있던 핸들을 오른쪽으로 아주 살짝 밀어 올렸다. J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돌아나가야 하는 방향과 반대로 핸들을 돌린 것이다. 일렬을 유지해야 꼿꼿히 서 있을 수 있는데, 코너에서는 핸들을 쓰면 안되는데! 심지어 그것도 가려는 방향과 반대로 핸들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은 되려 스로틀을 당긴다.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엔진의 RPM을 유지한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망했다, 이건 제 책임이 아니에요. 일본인의 몸이 알아서 움직인 거라구요. 갑자기 백만장자가 억울해 한 것이 이해가 될 지경이다. 넘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핸들을 오른쪽으로 밀어 올리자 오토바이와 몸이 좌측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게, 앞타이어의 좌측면이 지면과 더 많이 닿게 된 것이 오토바이를 자연스럽게 기울어지게 만든 것이다. 이제야 일본인은 엉덩이를 왼쪽으로 옮기며 무게중심을 좌측으로 싣는다. 엉덩이와 연결된 등과 어깨까지도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치우친다. 오토바이는 좀 더 눕는다. 오른손은 여전히 진중하게 그립을 당기며 계속해서 엔진의 회전수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오토바이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접지면적이 조금 전과 비교하면 현저히 줄어들었음에도 엔진에서 전해지는 동력 덕분에 여전히 뒷바퀴가 땅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다. 앞 쪽 타이어를 돌림으로서 줄어든 접지력은 뒷바퀴가 앞으로 밀어내는 힘으로 상쇄된다. 이제 J의 몸은 상당히 불안정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고 코너는 충분히 돌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첫 번째 코너를 성공적으로 돌아나간 뒤 곧 우측으로 더 급한 커브가 나타났다. 그래도 J는 이제 아까 전만큼 긴장하지 않는다. 운동의 방식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원리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게를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옮기는 일은 핸들을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틀어주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될 수 있었다. 한 점에서 지면에 맞닿아 돌아가는 팽이의 방향을 바꿀 때 원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팽이채를 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그리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스로틀을 열어 뒷바퀴의 회전력을 높이면 된다. 속도를 줄이면 넘어지니까! (역시 자이로스코픽 효과!)
예상한 것처럼 더 깊은 코너를 만난 일본인은 핸들을 더 많이 반대 방향으로 밀어냈다. 앞바퀴를 조금 더 기울어뜨리자, 몸과 오토바이는 더 쉽고 깊게 눕는다. 엔진의 회전수는 유지한 채로다. 오토바이가 뒤쪽에서 체인이 걸리는지 드-드-득 소리를 낸다. J는 자신의 얼굴이 땅에 닿지 않을까 눈을 찌푸려트릴 정도가 되었다. 더 깊은 커브 길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커브를 돌아나갔다. 차이가 있다면 '더 예리한 각도로', '더 과감한 무게 이동으로', '좀 더 엔진의 회전수를 유지하는 식으로', 역설을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돌아나갔다. 감탄할 만한 하모니다. 오토바이와 몸이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 놀랍다.
그 뒤로도 커브 길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비틀어서 오토바이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절도 있게 무게를 옮김으로써 둥글게 코너길을 통과하는 행위도 반복해서 일어났다. 워낙 코너가 이어지는 바람에 내비게이션을 볼 짬도 없었다. J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코너 끝을 쫓았다. 어느새 J는 앞쪽에서 돌아나가는 선두가 기울이는 정도를 보고 커브 길의 깊음을 가늠하고 있었다. 대열을 이루던 사람들이 모두 한 시점에서 비슷한 각도로 죄다 기울어지며 곡선으로 주파하는 모습은 마치 군무와도 같았다. 그들의 회전은 마치 굵은 붓으로 그려내는 파도처럼 보였다.
J는 왜 이 길에 이토록 오토바이가 많았는지 깨달았다. 이른바, 와인딩, 오토바이로 커브 길을 오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와 다름없었다.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적절한 속도로, 적절한 각도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일은 스릴이 넘치는 일이었다. 주변을 음미하며 여행을 즐기는 맛도 소중하지만, 오토바이로 코너를 돌아 나가는 것은 어마어마한 흥분과 쾌감을 주는 일이었다.
'오토바이는 이렇게 타는 거구나! 이 맛에 타는 거구나!'
J의 영혼은 A가 보여주는 커브를 돌아가는 법을 배우고 또다시 환희와 쾌감에 휩싸였다. 그 쾌감은 중독적이어서 J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반복되기를 원했다. 커브 길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다행히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끝없이 커브 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J의 영혼의 요구가 과해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더욱더 짜릿하게 느끼기 위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조금 더 깊은 각도로 몸을 뉘라고 지시를 내리던 중, 이 이상은 위험하다는 외침이 들렸다. 본능적인 위험 감지다. 뒷타이어가 더 이상은 접지력이 유지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전해졌다. 미끄러지기 직전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가슴이 덜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일본인의 몸은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오른발로 뒷 브레이크를 사용하며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속도가 늦춰지니 오토바이는 서서히 바로 서기 시작했다. 큰일 날뻔했다는 안도감에 이어 아무렇지 않게 위기에서 탈출한 일본인의 몸에 '경탄'했다. 또다시 J의 영혼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흥분과 성취감, 충만감이 차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J는 웃으며 입에서 일본어로 욕지거리를 했다.
「 うわ、くそ!死ぬかと思った、マジで!」
- 와! 젠장, 죽는 줄 알았네! 진짜로!
J는 일본인 A의 몸을 빌려, 그의 오토바이로, 아소산을 오르기로 결심한, 자신이 뿌듯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완벽한 여행이다! J는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크게!
반대편 차선으로 내려가던 할리데이비슨 부대들이 J의 함성을 듣고 손을 들고 함께 소리 질렀다.
(그때 J의 머릿속에 생전 태워보지도 않았던 담배 생각이 났다.)
그렇게 코너를 즐기며 올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이는 지점이 나타났다.
저 멀리 방금 지나왔던 논도 보이고 사거리도 보였다. 산길의 초입도 보인다. 그제야 이 산을 오토바이를 타고 올랐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다이칸보 전망대에 도착해 보니 스무 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주차장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J도 그 옆에 CRF 300을 조심스럽게 주차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헬멧을 벗어보니 긴장했던 것인지 머리카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었더니 물이 우수수 떨어진다. J는 자기도 모르게 A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A 씨, 덕분에 오토바이 잘 탑니다. 제 몸으론 이렇게 즐기진 못했을 것 같아요.'
전망대에는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들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고 있어 J도 상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계산대에서 눈이 마주친 여자 직원이 볼이 발그레 해지며 얼굴빛이 변하길래 굳이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결제했다. J는 목에 걸린 태그로 계산하면 자신의 얼굴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날지 모를 일이고, 그럴 때 직원이 김빠져 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은) 그리고 이토록 성공적으로 오토바이 와인딩을 마친 데엔 본국에 남겨 두고 온 자신의 늙은 몸은 한 일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득 '자기 몸으로 이 길을 다시 오르라면 오를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는데 썩 자신이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여유롭게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 치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 아키라! 연락도 안 되더니 말도 없이 이렇게 혼자 나오기 있기냐.”
뒤를 돌아보니 통통한 몸매에 안경을 쓴 일본 남자가 서 있다. A와 비슷한 또래다. J는 A의 친구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앗, 죄송합니다. 저는 이틀 동안 A 씨를 빌린 여행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A의 친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J는 잠깐 고민하다 티셔츠 안에 넣어둔 태그 목걸이를 꺼내어 버튼을 눌러 자신의 원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나게 했다.
일본인 A의 친구는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A가 렌탈을 했나 보네요.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1. 아소산 외륜산 곳곳에는 유명한 전망대가 많습니다.
https://blog.naver.com/kyushutabi/220495582442
2. 오토바이를 기울이는 방법 중에 하나로 카운터스티어링이 있습니다. 이는 오토바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자전거에도 마찬가지로 써먹히는 기술아닌 기술입니다.
https://namu.wiki/w/%EC%B9%B4%EC%9A%B4%ED%84%B0%20%EC%8A%A4%ED%8B%B0%EC%96%B4 에서 3. 자전거, 오토바이 등 이륜차에서 를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3. 너무 오토바이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제 오토바이 이야기도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1부도 다음 편이면 끝입니다! 2부에는 드디어 여자주인공이 나오는데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4. 앗, 사진은 구글맵 스트리트 뷰의 사진을 캡처해서 삽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