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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재오 Oct 18. 2024

굉장히 멋진 분으로 렌탈하셨네요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9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오토바이 여행을 위해 빌린 일본인 A의 몸에 적응하려 애쓰는 중입니다.




"와, 여기 너무 좋은데! 나중에 우리 헤어진 뒤에 나한테 연락할 방법이 없으면 여기서 날 찾아! 내가 첫눈이 오는 날 오후 1시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잠시 들린 커피숍에서 엘리자베스가 호들갑스럽게 J에게 말했다. 예보에도 없던 함박눈이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거리가 온통 혼잡해진 날이었다. 어디서 사고라도 난 건지 도로는 양쪽 방향 모두 꽉 막혀버렸고, 오도 가도 못하는 차들 위로는 하염없이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잔뜩 짜증이 난 택시 기사의 얼굴, 길거리를 걸어가는 학생들의 신난 표정, 총총히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창밖으로 보고 있자니, J는 슬쩍 흐뭇한 기분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기억해 둘게. 그런데 리즈, 당신이 연락이 안 되면 찾아오라고 말했던 장소가 여기 말고도 수도 없이 많은 것 알아?"


J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래?"

"응, 지난번에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들어간 오래된 서점에서도 그랬고, 구석진 골목길 안에 작고 허름한 기념품 가게에서도 그랬고, 우연히 들어갔던 손님 없던 핫도그 가게에서도 그랬잖아."


"그랬나? 킬킬킬"

"그래, 연락이 끊기면 그중에 어디로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거야?"


"에…. 또, 그러니까 어디에서든지 나를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면 되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J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헤어지고 난 다음에 어디서 만나자고 말하는 건 사실, 어디에든지 나를 떠올리고 기억해 달라는 이야기지. 그것도 몰랐냐?"


"아~ 그런 거야?"

"그래,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정말 나랑 헤어지고 혼자가 될 때, 어느 순간 문득 느끼게 될 때가 있을걸. 지금 이곳에서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때 말했던 그 시간, 그 장소구나. 그러고 주위를 둘러봐. 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우리가 헤어질 일이 있어?"

"헤어질 일이 없다는 거지, 이 바보야."




J는 차를 홀짝이면서 곁눈질로 호텔 직원을 훔쳐보았다. 직원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아무렇지 않게 예전의 사무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J는 그녀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봐도 직원은 어려도 너무 어렸고, '동양인'이었으며. (J가 찾는) '그것'도 없었다. 두 일본인에겐 미안하지만,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일어난 일에 못 이기듯 끌려갈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J는 직원이 건네준 차를 다 마셨다. 효과가 있었다. 따뜻한 음료가 위를 거쳐 소장으로 부드럽게 향하는 게 마치 작은 탐사선이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며 일본인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J는 자신의 영혼이 그 탐사선의 불빛을 따라 일본인의 몸 안쪽으로 쑤욱 들어가, A의 몸과 정성 들여 결합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렇게 안과 밖 모두에서 단단히 붙들어 매었으니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다리로 일어나 버틸 자신이 생겼다.


J는 A의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깐 아찔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호텔직원이 부축을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생각보다 5cm의 키 차이는 크게 느껴졌다. 혹시 일본인이 키를 속인 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다. 원래 보던 높이보다 낮은 시점에서 보는 세상은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은(일본의) 풍경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약간 어지럼증이 도는 것도 같았다. J는 '이 키로 오토바이를 몰 수 있을까?'하고 약간 걱정이 되었다. 혼다 CRF 300은 시트 높이가 꽤 높아서 20년 전 자신이 타봤을 때도 양발이 땅에 완전히 닿지 않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J는 곧 '뭐, 일본인이 여기까지 타고 온 것인데 큰 문제가 없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키가 작다는 것만 빼고 A의 몸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본인의 몸에 비해서 훨씬 성능이 뛰어나다는 게 (몸의 어디에서든) 느껴졌다. 암벽등반이나, 스킨스쿠버 등의 다양한 취미생활로 단련된 몸은 38세라는 나이가 더해지니 노련한 운동선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J는 조심스럽게 고개와 어깨를 시험삼아 돌려봤다. (놀랍게도) 걸리거나 아픈 부위가 한 군데도 없고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옷이 끼이는 부위도 본인의 몸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팔뚝 부위에 옷이 꽈악 끼이는 느낌은 J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낯설었다. 내려다보니 고동색의 두꺼운 전완근과 팔뚝에 선 굵은 핏대가 근사했다. 항상 바지를 입으면 엉덩이와 배 부근에서 빡빡했는데, 지금은 허벅지에서 여유가 없어져 답답하다. 슬그머니 배를 만져봤더니 복근도 있다.


J는 조심히 발을 앞으로 내디뎌 보았다. 38년 동안 일본인이 만들어온 습관이 자신과 매우 다르다는 건 방금 전에 확인했기 때문에 J는 되도록이면 그의 걷는 방식을 관찰한다는 느낌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걷는 방식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역시나 A의 보폭, 속도, 다리의 각도, 지면에 발을 내딛는 방식의 차이, 전신의 밸런스는 J와 확연히 달랐다. 일본인의 걸음걸이는 J의 방식에 비해 보폭이 길고 유연했다. 주로 실내에서 지내오고 일본인에 비해 고령인 J는, 그동안 자신이 보폭을 짧게 가져가는 식으로 안정성에 더 신경을 써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인은 자신의 무게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던지듯 걸었다. 내디딘 발이 당연히 그 무게를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 주저하는 것 없이 성큼.


J는 그의 걸음이 성급한 행동거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 저돌적인 걸음걸이였다.



역시 사람을 빌려 쓰는 것은 휴머노이드에 들어가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기계와는 비할 데 없이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게 빌린 몸을 내 마음대로, 다 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계를 빌렸을 때 느껴지는, 사람의 몸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이질감만 없다 뿐이지 적응 과정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타인에 몸에 고집처럼 남아있는 미세한 차이를 이해하고 타협해야 했다. 억제하거나 조종하는 식은 통하지 않을 테니 몇몇 사람에게는 더 까다로운 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고 J는 생각했다. J로서는 그런 차이를 발견하는 게 신비롭고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니 다행이었다. J는 일본인의 걸음걸이를 음미하며 앞으로 걸어가 앞에 놓인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A는 무릎보호대가 끼워진 다이네즈 오토바이용 청바지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로바 (LOWA) 회색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입던 것들인지 몸에 익숙한 느낌이 편안했고 구형 모델들이긴 하지만 정성스럽게 관리되어서 그런지 초라하거나 남루한 인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상의엔 프린트가 흐릿해진 할리데이비슨 티셔츠와 붉은색 체크무늬 남방을,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입혀놨다. 비교적 무난하면서도, 일본인과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다만 J는 38세라는 나이에 맞게 점잖은 분위기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거울 옆에 놓인 옷걸이에는 아마도 A의 것으로 짐작되는 래빗사의 라이딩 점퍼가 있었고 그 옆에는 아라이 흰색 헬멧과 가죽 장갑이 놓여있었다. 청바지 주머니에는 반 정도 태운 담뱃갑이 라이터와 함께 들어있었다. 왼쪽 손목에 올려진 구형 카시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을 지나고 있다.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꺼내 입었더니 겨드랑이가 바짝 끼이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일본인 A는 매력적인 외모였다.




“제가 드리는 이 태그는 항상 소지하셔야 합니다.”


이제 완전히 평정심을 찾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호텔 직원이 J에게 말했다. 찻잔이 놓여 있던 나무 쟁반 위에 이번엔 목걸이 하나가 올려져 있다. 평범한 형태의 목걸이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네모난 상자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서 연두색 불빛이 2초에 한 번 점등하고 있었다. J가 쟁반에서 목걸이를 집어 머리 위로 목걸이를 걸었다. 그걸 본 직원은 실례한다고 말하고 카드리더기와 비슷하게 생긴 장치로 상자 쪽에 일직선의 빛을 비추었다. 일본인 A 앞에 J의 얼굴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잊고 있었던 자기 얼굴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J는 잠시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늙어 보여 왠지 민망했다. 그 새 일본인의 얼굴에 익숙해졌던 것인지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의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본국에서는 태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이 태그가 영혼 유지장치 역할을 하고, 영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작동하니 항상 착용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여기에 계신 동안 GPS로 전달되는 위치도 이 태그가 송출합니다. 아, 그리고 계좌를 연결해 놓으시면 상점에서 결제하는 데에도 편리하실 겁니다."


J는 설명을 들으며 직원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직원은 여전히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했다. J는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김이 빠졌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일본 현지 화폐 부탁을 드렸었는데요.”


“네, 맞습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A 씨께서는 본인의 지갑을 써도 된다고 하셨는데, 지갑에서 A 씨의 현금은 따로 빼내어 저희 쪽에 보관하고 이체하신 10만 엔만 넣어서 드리도록 할까요? 본국에서는 임대인의 신분증도 함께 소지하고 계셔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호텔 직원은 서랍에서 지갑을 꺼내 J에게 건네주었다. J는 받은 지갑을 라이딩 점퍼 안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 그 자리가 원래 지갑의 자리였던 듯 주머니가 늘어난 폼이 딱 맞았다. 지갑을 보니 병원에 맡겼던 자신의 소지품 생각이 나서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던 간호사의 말이 기억났다.


“혹시 핸드폰도 빌릴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핸드폰 대여 서비스는 저희 쪽에서 제공해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신은 안 되지만 태그로 수신이 가능합니다. 알람도 울리고, 방금 보신 것처럼 홀로그램으로 내용을 문자메시지로 전달받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아 그러면 호텔로 연락이 들어오면 제게 전해주시나요?”

“네, 물론입니다.”

“혹시 메타버스 접속이 가능한 단말기가 있을까요?”

“네,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실까요?”


직원을 따라 밖으로 나서던 J는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본인의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다시 또 어색해지려는 것 같아 다른 생각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J는 메타버스 접속이 가능한 비즈니스 라운지로 안내받았다. 단말기 앞에 앉아 목에 걸린 태그를 비추니 J의 신원으로, 자동으로 접속이 되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이용해 J의 몸이 맡겨진 병원 주소로 방문했다. 잠시 뒤, 몇 분 전에 만났던 간호사가 화면에 나왔다.


“어머, J 님, 굉장히 멋진 분으로 렌탈하셨네요. 잘 도착하셨나 보아요.”


간호사는 화면에 뜬 A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 앞으로 다가선다. 호들갑을 떠는 간호사를 보며 J는 다시 씁쓸해졌다.


'나한테는 사무적이더니만.'


“하하하···.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일본에 잘 도착했습니다.”

“네, 와우. 진짜 미남이신데요. 영화배우 같아요. 호호호 여기는 별일 없습니다.”

“호텔로 연락해 주시면 저에게 알려줄 거라고 하네요.”


“네, 저희 쪽에도 정보가 뜨네요. 세이후소 호텔이라고 되어 있네요?”

“네 맞습니다.”

“혹시라도 묵으시는 곳이 바뀌거나 하면 연락 한 번 더 주세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좋으시겠어요.”


간호사는 영상통화를 마치려다 뭐가 아쉬운지 일본인의 얼굴을 한 번 더 빤히 들여다보고 통화를 끝냈다. J는 무심코 A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볼을 쓰다듬었다. A가 자르지 말아 달라던 수염이 만져졌다. J는 까슬거리는 느낌이 무척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객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J는 잠시 고민하다가, 무엇보다 오토바이를 먼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씨가 준비한 짐을 먼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를 맡겨두었을 텐데. 아, 그리고 제가 배낭을 하나 보냈는데 도착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네, 오토바이는 주차장에 있고 J 님이 보내신 배낭은 객실에 옮겨 두었습니다.”

“A 씨가 남긴 물품을 먼저 봐야 제 짐을 정리할 수 있을 거 같으니 일단 오토바이부터 보고 올게요.”


"오토바이 키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차장은 건물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다녀오시면 객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이 두 걸음 정도 앞서 걸어갔다. 직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A의 눈웃음을 보고 그렇게 긴장하던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흥을 보이지 않았던 게 다시 생각났다. 볼이 붉어지던 호텔 직원의 모습과 일본인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던 간호사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J는 갑자기 울적해졌다. J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뱉았다. 이런 식이라면, 여행 중에 스미스가 말한 '연애할 기회'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왠지 내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날씨가 정말 화창했다.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을 정도였다. J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부가 최신식으로 꾸며진 것과 달리 밖에서 본 호텔 전경은 수수했다. 호텔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실은 리조트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노천탕이 잘 관리된 정원 사이사이로 보였다. 언덕길을 따라 아마도 객실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슬쩍슬쩍 보이고 있었다. 현대적으로 지어 통창을 크게 내고 그 사이로 풍경이 시원하게 들어오게 만든 본관 건물만 빼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일본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멀찍이서 한 바퀴 둘러본 J는 진부한 풍경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호텔은 아소산의 남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북쪽으로는 능선에 가려 아소산의 주봉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은 객실 방향과는 반대로 본관에서 내려가는 방향이었다. 따로 마감을 하지 않은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널찍한 주차장 한편에 A의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J는, 주변에 기름과 윤활유 냄새가 떠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다. 환경오염 탓에 요즘 나오는 탈 것들은 전부 전기 모터로 작동하는 것뿐이다. 15년이 젊어진 몸, 고리타분한 숙소, 그때 그 시절의 오토바이, 왠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어 J는 잠시 현기증이 났다. 시간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흡족했다. '그래, 무슨 여자 눈치를 봐' J는 원래의 여행 목적을 떠올렸다. '갱년기를 위로받기 위한 숙명의 여행지, 아소산, 이제 오토바이만 몰고 떠나면 완벽한 여행이 될 거야'


오토바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A의 오토바이는 좀 더 크고, 사나운 인상이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기억을 보정하는 것과 바로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혼다(HONDA) 사의 2020년식 CRF 300이다. 오토바이는 화가 난 것 같이 새빨갛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새 부리처럼 생긴 흙받이(휀더)가 난폭하게 느껴졌다. 트레드의 간격이 넓고 블록도 드문드문하게 만들어진 오프로드 타이어도 투박하다. 듬성한 타이어 틈 중간중간엔 아직 빠지지 못한 작은 돌들까지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스팔트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토바이처럼 보였다. 점프 묘기를 하고 물웅덩이를 지나는 곳에서나 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J는 금세 풀이 죽었다.


'어라, 내가 기억하던 그 모델이 맞나?'


최근에 유순해진 외양의 오토바이들만 보다가 기계적이고 조잡한 느낌의 CRF 300을 본 J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이 되어 옆으로 돌아가 살펴보니 팔뚝만 한 엔진이 보이고 뒷바퀴에 체인으로 연결된 모습이 여전히 낯설다. 시트에 앉으면 자신의 바로 아래에서, 엔진 피스톤의 상하운동이 일어나고, 그 힘은 크랭크의 회전운동으로, 그리고 체인으로, 뒷바퀴로 전해질 것이다. 한 뼘도 안 되는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일련의 기계 작용이 전개된다는 것이 다소 두렵게 느껴졌다. 심지어 금속 재질의 주요 부품들은 덮개 같은 것도 없다. 혹시라도 거기에 닿아 화상을 입거나, 어디에 끼여 다치지나 않을까란 걱정이 들었다. 안락을 위한 장식 하나 없이 그냥 털썩 올려진 얇은 시트는 또 어떠한가. 불안정한 저 시트 위에 타고 있다가 미끄러지면 큰일이다. (몸이 15년 젊어졌거나 말거나 J의 영혼은 53세인 것이 확실하다)


이쯤 되니 J는 괜한 일을 벌인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20년 전 몇 번 크게 넘어진 적이 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커브 길을 돌아나가지 못하고 관성에 따라 직진으로 죽 달려 나가는 바람에 도로 연석을 밟고 올라가 화단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고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쫓아온 엘리자베스 앞에서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부끄러워했던 기억도 났다. 몇 번에 사고 끝에 그나마 적당히는 몰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커브 길은 잔뜩 긴장한 채 뻣뻣하게 '통과'하듯 몰아야 하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져 오토바이를 팔았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오토바이는 그때 그 시절의 오토바이보다 훨씬 높고, 타이어도 얇은 데다 모양도 보통의 것과는 다르고 심지어 오래된 오토바이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옆에는 엘리자베스도 없을뿐더러 연락할 사람도 없는 일본이다. 사고가 나면 낭패다. 아찔하다. 심지어 자기의 몸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걷는 것조차 어색했단 다른 사람의 몸이다. 이걸로 어떻게 이 오토바이를 타지? 자기 몸으로도 못했던 일을?







1) 사진은 소설을 쓰면서 일본인 A의 이미지를 상상할 때 참고한 가상 캐스팅 모델, 일본 영화배우 아베 히로시 씨입니다. 앗, 아베 히로시 씨는 키가 많이 크긴 하십니다. (190cm)

https://namu.wiki/w/%EC%95%84%EB%B2%A0%20%ED%9E%88%EB%A1%9C%EC%8B%9C

2) 5화 '자기 몸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잘 준비해서 보내놓을걸?' 에 살짝 나왔듯이 주인공 J는 톰 행크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글을 썼습니다.

3) 에, 또 그러니까 '파묘' 장재현 감독님이 그런식으로 상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한 것이긴 합니다.

https://v.daum.net/v/20240321082722886

 * 전 뉴스로 들은 것은 아니고 배철수의 음악캠프, 김세윤의 영화음악에서 들었습니다. 배캠 광팬입니다.

4) 세이후소 호텔은 없지만 아소산에 같은 이름의 료칸이 있습니다. 해당 숙박업소를 참고하였습니다.

 * 언젠가 꼭 가보고 싶습니다.  * 홈페이지 https://jigoku-onsen.co.jp/ 


5)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브런치스토리의 작가님들이 전해주신 따뜻한 격려가 없었다면 이 소설에 다시 열정을 품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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