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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재오 Oct 25. 2024

혼다 CRF 300 (2020년식)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10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일본인 A에게서 빌린 오토바이를 확인하였지만 탈 자신이 없습니다.




디파크 사티(Dipak Sati) 박사와의 대담 2.


- 영혼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영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네, 전기만 제대로 연결된다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영혼 상태로 생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혼만으로 지내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단순히 더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 저는 과학자로서, 영혼을 분리하게 된 것은 인류가 다른 형태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유기체로서 생존하기 어려울 만큼 지구의 환경이 급격히 나빠지는 상황에서, 인류는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최적의 진화 방법을 찾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백하자면 영혼 분리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신의 숨결을 느꼈을 정도입니다. 물질계를 넘어 전기적인 의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라니요!


- 그렇군요. 박사님은 개인의 시각이 아니라 인류의 시각으로 해석하시려는 쪽이시네요.


-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의 인류는 신체를 지닌 채 생존하는 방식을 선택한 구-인류와 신체 없이 영혼만으로 지내기로 한 신-인류로 분리되어서, 진화론적 경쟁을 벌일 거라 예상합니다. 마치 4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인이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그렇다고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식의, SF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웃음) 다만 그 경쟁에서 구-인류가 살아남을 확률이 결코 높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하실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아! 그리고, 진화론적 경쟁에 참여하는 게 그 둘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프랑스의 AI 연구팀이 영혼 데이터와 AI를 융합하는 실험에 대한 허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I와 융합된 사람의 영혼이라니….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정의해야 할 겁니다.


-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조금 무서워지네요. 그렇다면 저도 이제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구 인류로 살 것인지, 신인류의 생존방식을 택할 것인지?


- 하하하, 아직 그럴 필요는 없고요. 당분간은 생존해 있을 때는 구 인류의 방식으로 지내고, 사망 이후에 신인류의 방식대로 살아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개인의 선택보다는 어쩌면 사회정치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질 강제적인 진화의 형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마음의 준비만 해두면 어떨까 싶네요.


- 그건 더 무서운 말씀이네요. 여하튼 신-인류적 방식인지는 몰라도 요즘 신체를 '그저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풍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돈을 받고 자기의 몸을 남에게 내어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종교단체에서는 영혼으로만 지내야 좀 더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되도록 신체를 버리고 살라는 식의 교리를 설파하기도 한다네요. 저로서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제 몸을 선뜻 내어놓을 자신은 들지 않습니다만….


- 저도 그런 변화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뭐, 메타버스라고 하는 '인간이 전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이상 어쩔 수 없는 흐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과감하게 신체를 버리고 영혼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하신 분들이 후세에 선각자로 평가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대륙을 찾은 탐험가들처럼 말이죠. 물론 그들이 존재하게 될 세상은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매우 다른 가치들을 좇으리란 예감이 듭니다만….


- 그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 아, 하하하! 이 부분은 제가 철학 쪽으로 전문가는 아니라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많이….




J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오토바이를 보고 있다.


호텔과 이어진 길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은 아니었다. 한적했다. 넘어져도 혼자 다칠 곳이지, 큰 사고로 이어질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J는 눈앞에 서 있는 '화가 나 보이고, 아스팔트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토바이를 몰고 '사고 나면 연락할 사람도 없는 나라의' 거리로 나갈 자신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차를 빌려 볼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J는 운전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게 일본의 교통 법규부터 익숙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J는 자신이 A의 몸에 들어가면 저절로 일본인이 '되어 버릴'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됩디다'라고 적어놓은 글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자기에게도 '신기한 방식으로' 당연히 될 것으로 기대했다. 안일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살던 곳이랑 교통 체계가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고, 운전을 조심히 하면 괜찮지 않겠냐 싶었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일본인의 운전 습관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호텔 직원과 있었던 해프닝처럼, 일본인의 무의식과 자신의 의사가 배치되는 상황이 '운전 중'에 일어나면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A가 위험을 맞닥뜨리면 차라리 속도를 내어 그 상황을 빠르게 벗어나는 방식으로 대처해 왔다면(충분히 일리 있는 추리다), 그 습관대로 몸은 무의식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더 밟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J가 뒤늦게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몸에 개입한다면(이 또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만들어져서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정부에서는 왜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채로 운전할 수 있게 해 놓은 거지?'


차라리 기계에 들어간 몸으로 운전하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반응속도(latency) 때문에 브레이크를 늦게 밟을지는 모르지만, 기계는 제 멋대로, 주인의 의지와 배치되어 액셀을 밟을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쯤 되니 J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세계정부의 음모'가 신빙성있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전은 무리일 것 같고, 다른 계획을 세우는 게 낫겠는데….'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것 말고는 딱히 할 만한 게 떠오르는 게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미 여행 전에 알아봤듯이, 아소산 근처엔 가볼 만한 여행지가 마땅히 없었다. '고요하고 지루해서, 더 자유롭게 느껴질 것 같아서' 선택한 곳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예약한 이 호텔은 깊은 산 중턱에 있어서 차가 없으면 어디로 나가기도 어려웠다. 돌이켜 보니 준비가 너무 허술했다. 스미스의 말대로 갱년기에 빠져 사고를 쳤다. 그저 오토바이를 타겠다는 생각에만 매몰되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결국 호텔에서 온천이나 실컷 하고 쉬는 게 그나마 나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몸을 바꾸기로 한 건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소한 지금 당장 어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돈은 많이 썼지만. '그러게, 돈은 또 얼마나 들인 거야' 들인 돈을 생각하다 보니 속이 쓰렸다. 눈 앞에 있는 저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말이다. 억울했다. 아까웠다.


그래서 J의 머릿속에 '사고 나면 입원하면 되지요, 뭐'라며 A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게 떠올랐다. 아니 빌린 사람이 걱정 말고 타라고 했는데 왜 네가 지레 겁먹고 그러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걸 타 보려고 이 먼(?) 길을 와 놓곤, '불안해 보여서 안 탔어'라고 고백한다면 스미스는 또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갑자기 울컥했다. 왠지 오기가 났다.


'올라타 보기라도 하자.'


J는 앞에 놓인 오토바이를 다시 살펴 봤다. 그래 까짓것 넘어뜨려서 망가지면 수리해 주면 되지 뭐, 20년 된 오토바이가 뭐 얼마 하겠어? 몰고 나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타보겠다는 건데. 가만히 서 있는 걸 넘어뜨려 봤자 큰 고장이 나진 않을 거야. J는 눈을 질끈 감고 오토바이 위로 오르기로 한다.


하지만, 이놈의 오토바이는 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J는 오른 다리를 최대한 들어 허벅지를 시트 위에 놓고 왼쪽 다리로만 엉거주춤하게 선 채 엉덩이를 조금씩 옮겨가는 식으로 해서 겨우 올라탔다. 일본인의 짧은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자기였다면 훌쩍 다리를 넘기면서 멋있게 탈 텐데. 혹시나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신경쓰였다. 오토바이도 겨우 올라타면서 설마 그걸 몰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죠? 라며 뭐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시트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도 없었다.  


'어휴 오토바이랑 같이 넘어질까 봐 엄청 긴장했네.'


J는 오토바이에 오른 것만으로도 뭐라도 해낸 것 같아서 뿌듯했다.


막상 오토바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니 밖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작고 가냘팠다. J는 슬그머니 마음이 놓였다. 올라탄 상태로 오토바이를 찬찬히 들여다 본다. 요즘 오토바이와 비교하면 구성은 소박하다. 계기판부터 손바닥만 했다. 거기에 20년이란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는 없었던 듯, 기름 탱크는 움푹 파인 곳도 보였고,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서 녹이 슬기도 했다. 화가 난 듯 새빨갛게 보이던 휀더 부분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햇빛에 바래 허옇게 변색하기 시작한 상태다. '너도 역시 나처럼 늙었구나' J는 문득 애처로워졌다. 처음 그 난폭한 인상에 주눅 들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애잔한 감정이 들었다.


슬쩍 양발을 내리고 오토바이를 세워보았다. 가볍다. 세우는 것 까지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높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인의 다리로 충분히 서 있을 만하다. 서스펜션 스프링이 무른 덕에 A의 체중을 온전히 실으면, 그러니까 푹 주저앉으니, 시트가 쑥 내려갔기 때문이다. 발이 다 닿는 건 아니라서 불안하긴 했지만 두 발로 서 있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


편안해진 J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는, 좌우로 몸을 조금씩 기울여 봤다. 알려진 대로 무게가 가벼워서 다루는 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혹시 균형을 잃더라도 왠지 한쪽 다릿심으로 지탱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조금 과장한다면, A의 근육이라면 오토바이를 들고 휘두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은근히 만만했다.


'시동 정도는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J는 잠시 망설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키를 꽂아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단출한 계기판에 몇 가지 숫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오랜만에 오토바이가 깨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니 기분이 설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J는 침을 꿀꺽 삼키고 키를 한 칸 더 옆으로 돌리고, 떨리는 손으로 마침내 시동 키를 눌렀다.


"파다다다다당-"


엔진 진동이 J의 명치 부근을 자극했다. 엔진 오일이 섞인 가솔린 냄새가 코로 확 들어왔다.




시동을 걸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보니 J는 기분이 제법 나아졌다. 이미 일본엔 와버렸고, A의 몸엔 들어와 버렸는데 저질러 버린 일을 인제 와 어쩌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달달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오토바이를 보니 걱정한 것처럼 밑에서 폭발할 것 같지도 않았다. A가 신경을 많이 쓴 것인지 20년 된 엔진 치고는 매우 조용했다. 시험 삼아 스로틀을 당겨보니 애애앵- 소리를 내며 엔진이 돌아가는 게 당차다. 그렇다고 버겁거나 두려운 느낌은 아니다. 사실 배기량이 겨우 300cc 남짓밖에 되지 않은 작은 엔진 (CRF 300의 300은 배기량을 의미한다)이므로, 차라리 에게? 겨우? 싶은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몸을 싣고 언덕을 잘 오를 수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다.


무게가 가벼워 다루기도 버겁지 않을 거 같고, 엔진도 작아 속도도 많이 안 날 것 같으니 내심 용기가 생겼다. 주차장에서라도 한번 몰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J에게 뭔가가 전해졌다. 난데없이 '몰 수 있어, 당연히'라는 자신감이 불쑥 들기 시작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다. J가 논리적으로 생성해 낸 자신감의 주파수가 아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고 일본인의 몸에 집중했다. A의 몸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듯이, '그래? 그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오토바이를 몰려고 하는지 보여줘'라는 듯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게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그러니까 일본인 A가 항상 해왔던 절차가, 영상처럼 떠 올랐다.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잡아둔 상태에서 왼쪽 발끝으로 킥 스탠드를 뒤로 밀어 세워 올린다. 방금 스탠드를 밀어 올린 왼발로 풋 기어를 밟아 내리며 중립에서 1단으로 변경하면 엔진의 회전이 뒷바퀴로 전달될 준비를 마친다. 양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서서히 풀면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는 브레이크 레버 위에 그대로 둔 채로 오른 손바닥을 밀어 내리듯 스로틀을 당기면 출발, 간단했다, 매우. (와우!)


물론 J도 수없이 (십 수년 만에 다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니만큼 영상으로나마) 이미지 트레이닝해 보긴 했으나, 일본인의 머릿속에 저장된 것은 J가 사전에 준비한 것과 그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달랐다. 1을 하고, 2를 한 뒤, 3을 하는 식의 단계가 없었다. 그냥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것까지가 '한 컷'이었다. (그렇게 출발하고 난 다음엔 앞바퀴를 들어 올리는 (윌리) 묘기 같은 선택이 있었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방정맞게 운전하는 방법이 있었다. 아, 물론 정상적이고 조용한 운행 방식도 있었다.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지)


들여다보니 일본인의 몸은 자신에게 익숙한 그 '절차'가 일어나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수없는 연습에 질려버린 체조선수가 시합장에서 얼른 공연을 펼쳐버리고 싶은 것처럼 안달이 나 있었다.


오토바이 윌리, 앞바퀴를 들어 올리고 뒷바퀴만으로 달립니다.


하지만 J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그러니까 J의 수준에서는 오토바이 운전이라는 게 그렇게 '한 컷'으로 이루어질 수준의 만만한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맞다. 오토바이 운전은 J의 생각대로 단순하지 않다. 나누어 보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과정을 통해 처리되는 극히 복잡한 행위다. 후두엽은 눈으로 들어온 전방에 대한 시각 정보를 처리하고, 전정 기관은 기울어지는 정도를 감지한다. 소뇌는 시각 정보와 전정 기관에서 들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몸의 근육을 정교하게 조정한다. 전두엽은 정보를 종합해 멈춰야 할지 속도를 더 내어도 될지, 목적지로 가려면 여기서 어디로 빠져야 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교감 신경은 팽팽하게 긴장해 있어야 한다. 심지어 우리는 아직 변속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엔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긴장하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감정의 동요는 눌러야 한다. 두 바퀴로 균형을 유지하려면 역설적으로 속도를 '더 내어야' 하므로 (이걸 두고 자이로스코픽 효과라고 부른다는 걸 J는 동영상을 보고 배웠다) 차라리 무모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걸 못하고 겁을 먹고 브레이크를 꽉 잡아버리면 오토바이는 넘어져 버린다. 네 바퀴로 다니는 차와 달리 두 바퀴로 움직이는 탈 것이므로 멈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 버린다. 특히나 A의 CRF 300은 20년 전 오토바이이므로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다. 위에서 말한 과정 중에 한순간이라도 오류가 나거나, 판단하는데 지체가 생기면 얄짤없이 몸은 도로와 부딪히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 고통을 상상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건 악순환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속도를 높이라니!


그러니까 이것은 J의 수준이다. J의 수준에서 J의 영혼은, 방금 A의 뇌에서 전달받은 그 '한 컷'의 연속된 동작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알 수가 없어서 겁이 났다. 과연 무사히 실행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J는 입술을 깨물고, 자기도 모르게, 스스럼 없이, 실행하기로 결단했다.


'에라 모르겠다.'


J에게 전에 없던 베짱이나 대담함이 생긴 것은 아니다. 본전 생각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J가 갑자기 운전을 해 보기로 결단한 이유는 방금 A의 뇌로부터 들어온 신경 서킷에 시간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고 J의 영혼이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컷'으로 보일 정도로 노련하게 오토바이를 모는, 마치 습관과도 같은 수준의 숙련된 신체행위를 만들어내는 A의 시냅스 데이터 덩어리엔, 해당 서킷이 몸 안에서 운용된 것이 최소 9,880시간은 넘었다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A가 근 20년 동안 하루에 2시간씩, 못해도 일주일에 5일 이상 오토바이를 타고, 수많은 오류를 교정하며(그것은 사실 학습으로 뇌의 신경이 강화되고 최적화되는 형태로 일어난다)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신뢰도 높은 데이터는 J의 영혼이 자신감이라 불리는 '주파수'를 발생시키기에 충분했다.


J가 마음먹자, 일본인은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역시나 그 동작은 영혼이 어느 부위를 이용해 어떻게 움직이라고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아니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마치 뇌의 어딘가에 '오토바이를 출발시키기'라는 단축키가 저장된 것처럼 그냥, 알아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러한 습관적인 행위에 대한 단축키는 뇌의 기저핵(Basal ganglia)에 저장되어 있다) 킥 스탠드를 올리고 왼발로 기어를 경쾌하게 내리며 양손에 힘을 빼고 전방을 바라보며 출발, 간단하고 명쾌하고 명료하다. CRF 300과 일본인의 몸 사이에는 단 한순간도 조화로움이 깨어지는 순간이 없다.


아쉽게도 MIT 앤 그레이비엘 교수팀은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딱 한 번, 출발하자마자 J의 영혼이 어어어어- 하며 긴장감을 몸에 전달한 그 순간만 빼고. 극히 자연스럽게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난 J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 몰 수 있겠네'


J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동을 끄고, 오토바이에 올라탄 채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앞으로 풀썩 엎드렸다. J는 실없이 웃음이 났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진짜 사람들의 말처럼 그냥 저절로 돼버렸다. 왜 단 한 명도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다들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써놓은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냥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빌린 몸에다가 '이렇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저렇게 내쉬어'라고 명령하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일본인에게는 오토바이 운전이 숨 쉬는 것만큼 반복된 일이므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다. 주인(영혼)이 자주 원하는 행동은, 우리의 충직한 뇌가 따로 갈무리해서 어디엔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몸을 빌리면 그 보물을 엿볼수 있는 것이었다. 실로 경이롭지 않은가.




그리고 J는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였다. A에게서 '수년간 누적된 경험'이 전해지며 처리된 데이터 변동이 너무 큰 탓에 마치 자신이 순식간에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인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년간에 걸쳐 숙련도를 향상하며 서서히 얻어져야 할 성취감이, 그에게 단박에 폭발하듯 밀려왔다. 내부에서 작은 폭발이 펑펑펑하며 일어나는 듯 느껴졌다. 굉장한 쾌감이다.


J의 영혼 데이터가 급속하게 확장되면서, 그의 내부에서 충만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차올랐다. 힌두교식으로 표현한다면, J는 A의 경험을 전달받음으로써 그의 아트마(ATMA)가 순식간에 성숙해 버린 셈이었다. 오토바이 잘 타는 법을 두고 진리, 즉 브라흐만(Brahman)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될 테지만, J가 염원했던 분야에서 급격히 자신감이 고양되는 이 경험은 거의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영혼이 느끼는 극치의 감각이 다름 아닌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J의 내면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욕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토바이를 모는 경험'을 좀 더 전수하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경험은 자신의 자아를 더욱더 확장하고 한계 너머를 엿보게 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J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얼른 출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고. 일본인은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방식도 J와는 달랐다. 우스꽝스럽게 까치발로 몸을 버티며 다른 쪽 발을 시트 위로 올리려고 낑낑대며 내려오지 않았다. 정지한 뒤 왼발로 킥 스탠드를 세워 오토바이를 땅에 고정한 다음, 바로 내려오지 않고 양발로 풋 페달을 밟고 오토바이에서 먼저 완전히 일어섰다. 그 상태에서 핸들을 잡고 오른 무릎만 살짝 굽힌 채 몸을 회전하며 시트를 넘어가며 몸을 내렸다. 훨씬 수월하고 보기에도 나았다. J는 A의 몸에서 전수된 오토바이에 대한 경험치에 또다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J는 A가 챙겨 준 짐을 살펴보았다. 오토바이 뒤쪽 편에는 탑 박스가 달려 있었고 검은색 방수 가방이 탑 박스 위에 고무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방수 가방 안에는 일본인이 J를 위해 준비해 둔 짐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깨끗하게 세탁된 내의 두 벌과 양말 세족, 올인원 화장품 하나와 여행용 칫솔 세트 하나, 흰색, 검은색 티셔츠 각각 한 장씩, 회색 트레이닝 바지, '속이 쓰릴 때 먹으라'는 메모지를 붙여둔 짜 먹는 위장약 네 개, 핫팩 두 개.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하라며 메모지에 쓰인 ‘메타버스 주소’와 ‘드라이브 코스를 핸드폰에 저장해 뒀어요! 내비게이션으로 쓰세요!’라고 쓰인 메모지가 붙은 구형 아이폰.


다른 것들은 몰라도 핫팩을 어디에 쓰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알차게 준비해 준 것 같아 J는 흡족했다. 방수 가방을 들어내고 탑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일본인이 말했던 여분의 헬멧과 장갑, 오토바이 펑크 세트, 비옷이 들어 있었다. 다만 여분의 헬멧은 크기가 작아서 남자는 못 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걱정할 게 없겠는걸.'


J는 방수 가방은 그대로 놔두고 안에 든 옷과 세면용품 등만 챙기고 본관에 들러 기다리고 있던 직원과 함께 객실로 올라갔다. J가 예상한 대로 객실은 주차장과 반대 방향, 그러니까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객실로 올라가는 길은 노천탕에서 올라온 수증기 때문에 희뿌옇다. 조경수 너머로는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도 들렸다. 더운 열기가 전해지고 계란이 썩는 듯한 매캐한 냄새도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문득 J는 오토바이를 타기 전에 일본인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눈치를 챘는지, 호텔 직원이 J에게 넌지시 말했다.


“몸이 바뀌시고 난 다음, 3시간 이내로는 온천에 들어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천에 가셨다가 바뀐 몸이 다시 어색해지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자주 있어서요.”


호텔직원의 설명을 듣고 J는 놀랐다.

"아, 그렇습니까?"


"네, 아무래도 체온이 오르면서 노곤해지는 기운이라든지, 혹은 온천에 있는 유황 성분 같은 것들이 그런 작용을 하는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환각 같은 걸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으셨어요."


온천에 뭘 섞은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오토바이를 타러 나가기로 결심한 이상 A의 몸과 연결이 약해져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사 몸이 불편하더라도 일본인의 몸을 어찌할 게 아니라 자신이 맞춰가야 한다는 걸 J는 알게 되었다. J는 당분간 일본인이 하자는 대로, 그러니까 무의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너그러워지기로 결심했다.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J가 일본인을 이전과 전혀 달리 썩 존중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중하지 못한 성급한 성격도, 자기 몸을 아무에게나 내어주는 부주의한 점도 더 이상 J에게는 흠이 되지 않았다. 최소한 오토바이를 모는 동안은 말이다. 어느새 J의 영혼은 A의 뇌에서 전달되는 일본어로 된 사고 또한 영어로 해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최대한 본래의 뉘앙스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객실에 도착해 보니 다다미 위로 퀸사이즈 침대가 하나 있었고, 남색의 유카타가 침대 위에 단정히 놓여있었다.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 TV 한 대, 냉장고가 놓인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다. 썩 최신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단정했다.


"식사는 리셉션 건물로 오시면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점심은 따로 예약하지 않으셨고, 저녁은 코스요리(가이세키)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직원은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았고 J는 팁으로 지갑에서 천 엔을 꺼내어 직원에게 전해주었다. 호텔에서 천 엔, 만 엔 지폐로 나누어서 지갑에 넣어 놓은 걸 보고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직원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감사하다.'라고 말하곤 방을 떠났다. 문득 J는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J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바지를 풀고 소변을 보았다. 스미스가 걱정했던 성병 같은 건 없는지, 오줌 줄기는 시원하게 쏟아져 나왔다. J는 본인이 이틀 동안 써야 할 부분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 부분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민망하긴 했지만 J는 '일본인의 몸 중에 자신이 우위인 부분'을 '드디어' 찾아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이는 컸다.


화장실에서 나와보니 낡은 배낭이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J는 자기가 가져온 등산배낭이 일본인과 썩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J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쓰기에는 너무 노티가 난다고 생각했다. 씩 웃고는 오토바이 키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J는 A의 흰색 아라이 (Arai) 헬멧을 썼다. J는 이제 의식하지 않고, '능숙하게' 턱끈을 매고 '자연스럽게' 구형 아이폰의 전원을 켰다. 전원이 들어온 핸드폰의 바탕화면엔 A가 한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덧니가 귀여운 인상을 주는 꽤 미인형의 일본인 여성이다. 아마도 A의 여자 친구일 것이다.


J는 ‘혹시 나로 바뀌는 걸 말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하는 걱정이 잠시 스쳤지만, 곧 ‘설마, 함께 여행이라도 갔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았다. 지도 앱을 열어보니 메모지에 적힌 대로 "J 선생님을 위한 A의 추천 여행 코스"라고 이름 붙인 폴더가 있었다. 폴더 안에는 아소산 주변 오토바이 경로가 1일 차, 2일 차로 나누어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생각보다 세심하게 준비한 A의 배려에 J는 감탄했다. J도 사전에 어디 어디를 가야겠다 하고 생각해 둔 곳들이 있었지만, 성의를 봐서 그냥 A가 저장해 놓은 경로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A가 추천한 1일 차 일정은 호텔에서 나간 뒤 북쪽으로 올라가 다이칸보 전망대를 갔다가 쿠사센리 전망대. 나카타케 화구, 아소 파노라마 라인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1. 또다시 머스크 : 일론 머스크는 2016년에 “미래 인류는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살 확률이 10억 분의 1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https://v.daum.net/v/20230605204857362


2. 뇌의 기저핵 (Basal gaglia)에 대하여 : 기저핵은 습관이나 훈련, 보상 등을 관장하는 뇌영역이라고 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강화된 시냅스들이 저장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운동의 시작이 어려운 파킨슨병이 기저핵의 이상과 연관됩니다. 사진으로 첨부한 것처럼 MIT의 앤 그레이비엘 교수팀은 기저핵에 대한 연구로 강력한 노벨상 후보로 점쳐졌습니다.


동영상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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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사도 흥미롭습니다!

https://www.brainmedia.co.kr/BrainScience/22320

https://www.brainmedia.co.kr/NEW/15615


3. 힌두교에 대한 비유 : 사실은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스승에게서 육십갑자의 내공을 전해받은 수제자를 상상해 봐도 적절하다'라는 문구를 넣었다가 아무래도 힌두교의 비유가 좀 더 '있어'보이는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넣었습니다.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4. 오늘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10회! ㅠㅠ감격 모두 브런치 작가님들 덕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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