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8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기 위하여 일본으로 자신의 영혼을 보냈습니다.
「 意識が新しい身体に落ち着き共鳴するまでには約 15 分かかりますので、その間は動かずに落ち着いてください。 」
본인의 의식이 타인의 신체에 안착하여 감응하는 데 15분가량 소요되므로 그 시간 동안에는 되도록 움직이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세요.
"It will take approximately 15 minutes for your consciousness to settle and resonate with your new body, so remain motionless and calm."
눈을 동그랗게 뜬 곰 캐릭터가 화면에 떠 있다. 익살스럽게 몸을 좌우로 흔드는 애니메이션만 봐도 이곳이 어디인지 누구라도 한 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곰의 얼굴 옆엔 말풍선도 달려있다. 두꺼운 테두리를 두른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J는 뜬금없이 커다란 생일 케이크를 떠올린다. '누구누구야 생일 축하해'라고 쓰면 적당해 보이는 자리에 왠지 서먹서먹한 글씨체로 '꼼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떠 있다.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일본어로 그 메시지를 읽는다. 뒤이어서 왠지 풍만한 금발 아가씨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의 성우가 영어로 다시 한번 말한다. 곰이 내는 목소리라 하기엔 둘다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J는 생각했다.
'일본에 왔구나'
J는 일본인 A의 눈으로 ‘보고’, 귀를 통해 '듣고' 있다. 일본인의 뇌에서는 일본어를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일본인 A의 언어 중추에서 처리된 뒤 모종의 '개념'으로 치환된 메시지는 J의 영혼으로 전파된다. J는 일본어를 모르지만 어스름한 뉘앙스 정도는 '전달'받을 수 있다. 이어지는 영어 발음은 J의 영혼에게 익숙하다. 다만 일본인의 귀가 (J가 평소 듣던 영어의 수준만큼) 주의 깊게 들어내지는 못한다. 과장하자면 산에서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를 듣는 정도의 분별력이다. 조류학자의 그것은 물론 아니다. 울음소리가 달리 들리긴 하지만 어느 게 멧샌지 어느 게 박새인지는 모르는 일반인 수준 정도다. 하지만 J의 영혼이 '아직은' 기술적으로 보충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재로서는' 일본인의 귀로 영어를 듣는 것이 편한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진짜 딴 사람 몸에 들어왔네’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과 감응하는 과정은, 마치 에어브러시로 뿌려진 페인트가 되어 일본인 A의 피부 표면에 내려앉아 서서히 말라붙는 느낌에 가깝다. 분리된 것과 동일하게 정수리부터 시작하여 눈, 귀, 코 등으로 스며드는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도, 극히 이질적이다. 예를 들어 J의 영혼은 원래의 눈이 있던 위치가 아닌 곳에서 '빛과 상'이 들어오는 것에 어색함을 넘어 심한 공포를 느꼈다. 눈썹이 있던 자리가 아래위로 벌어지고 그곳으로 빛이 쏟아 들어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물론 그 어색함은 신비롭게도 순식간에 '조정'되어(그러니까 일본인의 눈과 J의 영혼이 서로 전자기적으로 결합하여)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영혼의 전자기장이 일본인의 혀끝에서부터 뿌리로 결합하며 단맛, 짠맛, 쓴맛이 차례대로 전달된다. 일본인 A가 로그아웃 전 담배를 태웠던 것인지 미뢰는 기존 J의 성능보다 감소해 있었고 입안에 텁텁한 느낌이 났다. 코의 후각세포가 비교적 늦게 연결되었는데 알고 보니 주변에서 나는 역한 유황 냄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J가 빌린 호텔은 온천으로 매우 유명하다) 손가락과 발가락 같은 사지의 끝단에서 중앙 부위로 결합이 일어난다. 서서히, 마치 페인트가 열을 받아 말려 들어가는 것처럼 서로 들러붙는다. 일본인의 피부에서 따끔거림, 간질거림, 자글거림, 까슬거림이 번개처럼 강렬하게 영혼으로 전해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라져야 한다 )
(* 위 링크는 광고가 아닙니다.)
그다음 단계로 일본인 A의 대뇌 피질과 J의 영혼이 서로 연결된다. 일본인이 로그아웃하기 직전 30분 간의 기억이 J에게 전해진다. 임차인의 영혼이 임대인의 머리 안에 든 사사로운 기억까지 엿보는 일은 세계정부가 '적절한 기술적인 패치'로 막아두었지만, 트랜스퍼가 일어나기 전 30분 간의 기억은 '안전'을 위해 '적당한 수준'으로 공유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다행히 호텔에 들어와 오토바이를 세우고 교환기에 누울 때까지의 일본인 A의 행동과 발언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호텔직원과의 대화는 제법 젠틀한 편이었다.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J의 영혼이 일본인 A의 몸 대부분에 가라앉고 깊숙이 담겼다. 새로운 몸이 생경하고 새삼스럽다. 일본인의 눈은 가까이 있는 작은 글자도 잘 보이고, 눈두덩을 짓누르던 피로도 없어져 훨씬 개운하다. 누워서도 옆으로 흘러내리던 뱃살이 없으니 허전하면서도 가벼워진 느낌이라 으쓱했다. 펑퍼짐해서 넓은 영역을 점유해야 했던 등과 엉덩이의 면적도 줄어들었다.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 본다. 원래 손에 비하면 작지만, 훨씬 경쾌하고 강인하다. 악력도 세다.
마취된 것처럼 먹먹하던 혀가 연결이 잘 되었는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J는 발음을 할 수, 그러니까 혀와 성대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어로 말을 해보았다. 하지만 A의 몸은 영어로 말하는 것도, 듣는 것만큼이나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J는, 뇌의 언어영역과 영혼을 연결하는 회로 사이에 설치된 '언어 패치'가 잘 작동한 덕에, 방금 전까지 전 흐릿하고 모호하게 전해지던 '일본어'가 실시간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명확하게 전달되기 시작한 터라, 여행 중엔 일본어로 말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검은 곰은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입은 헤 벌린 채 '일본에 입국한 것을 환영한다', '오늘 날짜는 4월 5일이고 현재 시각은 오전 10시 12분, 외부 온도는 24도, 날씨는 화창하다' 같은 정보를 내어놓고 있었다. J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곰은 구마몬이라고 불리는, 구마모토현의 캐릭터로 꽤 유명한 녀석이었다. 멀뚱멀뚱하게 그 곰을 바라보다가 J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크게 뒤척였더니 캐빈 어딘가에서 삐익- 하고 알람이 울린다. 검은 곰 캐릭터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직은 움직이지 마세요'라고 주의를 준다. 캐빈 밖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J는 약간 민망했다.
J는 저 곰이 어딘가 야구 포수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은 일본인이 평소에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한동안 씰룩대던 곰은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앞으로 24시간 동안은 나카다케 분화구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즐겁게 여행하세요!’라고 멘트를 남기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J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카다케 분화구는 아소산에서 현재 활동 중인 유일한 분화구인데, 워낙 화산활동이 잦아서 구경하기가 썩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카다케 분화구는 꼭 가야겠군.'
조용하게 알람이 울리면서 몸 위를 덮고 있던 투명한 캐빈 뚜껑이 위로 올라갔다. J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온몸을 돌고 있는 혈액 순환의 속도가 원래 몸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심장도 확실히 건강했다. 자세를 바꾸었음에도 머리로 피를 올려 보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15년 젊은 일본인의 신체는 J의 영혼에 활력을 불러 넣고 있었다. J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53세 몸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주의해 왔다는 걸 알게 됐다. 행여라도 몸이 고장 날까 봐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 반해 A의 몸은 아직까지 여력이 있었다. 20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눈치를 볼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 여력은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활발하게 분비되는 호르몬과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 밸런스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훨씬 빠른 속도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다.
J는 왜 다들 젊은 몸을 렌탈해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트랜스퍼가 끝날 때까지 방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캐빈으로 향한다. 바닥에 깔린 나일론 카펫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탓에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일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이후소 호텔입니다.”
J를 보고 직원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짙은 남색 투피스에 커피색 스타킹과 장식이 하나도 없는 록포트 검정 구두를 신었다. J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았더니 직원은 얼굴이 갸름하고 눈썹과 눈매가 가늘고 길며, 입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윤기 나는 머리는 정 중앙에 가르마를 두고 단정하게 뒤로 넘겨 머리망 안으로 정리했다. 분명히 초면일 텐데도 낯이 익게 느껴져 '아, 일본인 A가 몸에서 나갈 때도 안내를 해줬던 직원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부분은 없으신지요?"
자기와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 이상한 기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온 상황에 대해 매뉴얼엔 어떻게 응대하게 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외모는 그대로인데,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와 자기소개를 또다시 해야 하는 게 어색하진 않을까? 혹시 바뀐 척하고 자기한테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지는 않을까? ('그런데 난 왜 이런 걸 궁금해하고 있지?'라고 J는 생각했다) 라며 (아마도) J가 공상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쟁반 위에 놓인 차를 권한다. 얇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호박색의 차다.
"차 한잔 드시지요. 몸에 익숙해지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J가 잔을 받아 들고 '감사하다-'라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 때, J를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
A의 몸이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라고 '무의식적'으로 답을 해버린 것이다. 직원이 하는 말이 A의 귀를 통해 뇌로 들어오고 패치를 통해 영어로 해석된 뒤 J의 영혼에 전달되는 데 까지 기껏해야 50ms 정도 되는 시간인데, 그새를 못 참고 A의 몸이 '습관대로' 행동해 버린 것이다. 마치 학습에 의해 종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조건 반사가 일어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J는 당혹감을 느꼈다.
일상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일이다 보니 뇌 이하의 신경계에서 반사적으로 반응할 법한 행동이긴 하다. 그걸 두고 왜 영혼과 상의 없이 마음대로 처리했냐고 탓하기도 뭣한 일이다. 당연히 물건을 받으면 감사하다고 답을 하는 게 맞다. 그걸 영어로 해석한 뒤 영어로 사고한 뒤 다시 일본어로 뱉게 하겠다는 계획이 말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답이 미묘하게 늦어질 경우 얼마나 결례가 되는지에 대한 일본인의 적정 수준을 J로서는 알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봐야 할지도 모른다.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면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반응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너무 빠르다는 느낌은 들었다. 조급한 나머지 진중함이 없어지는 건 싫었다. 그러니까 J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J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읽었던 '사람을 빌리는 것'에 대한 소감 글들을 떠올렸다. 지금 들어온 몸은 J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그것도 38년이나, 살아왔다는 점을 곱씹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이 손님의 입장임'을 생각하고, '몸이 하려는 대로 잠자코 놔둬 버리는 것이 되려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던 조언을 떠올렸다. 약간의 불쾌함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빌린 몸인데!)
그런데, A의 몸이 보여준 사회적 작용에 차분하고 친절한 톤으로, 허나 사무적으로 대하던 직원이 동요하며 반응하는 것은 문제였다. 부드러운 말투로 호소력 있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A를 바라보는 직원의 눈빛은 흔들리고 볼도 조금 붉어지는 듯했다. J는 직감적으로, 호텔 직원이 일본인 A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고 다시 살펴보니 직원의 나이가 썩 어리다. 많아 봤자 25세 정도 될까 말까. 컨실러로 가린 여드름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아마도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이어서 A의 몸이 반응했다. 발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치골 상부에 찌릿하고 자극이 전해졌다. 조바심과 기대감이 들고 서로의 맥박이 동기화되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맴돌기 시작하려- 했지만, J의 영혼이 가까스로 관여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시 미지근한, 사무적이고 편안한 공기로 되돌아왔다.
'A 이 친구, 얼굴이 미남이더니 확실히 인기가 좀 있나 보네. 게다가 그걸 즐기는 쪽이네.'
J는 왠지 계면쩍고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호텔직원에게도 괜히 미안했다.
건네준 차를 마시니 따뜻한 온기가 입을 지나 식도를 거쳐, 위로 내려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며 일본인 A의 몸 더 깊은 곳까지 영혼이 담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