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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재오 Nov 15. 2024

'그것'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1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일본에서 오토바이를 성공적으로 타게 되었고, 이제 막 두 번째 목적지인 쿠사센리 휴게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려고 합니다.




디파크 사티(Dipak Sati) 박사와의 대담 3.


- 박사님, 이번 인터뷰에서는 '기억'에 대해서 말씀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기억은 뇌와 영혼 두 영역에 모두 저장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중복해서 보관하게 된 걸까요? 그리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 뇌와 영혼의 이원적 기억 시스템은 제게도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입니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고요. 사실, 왜 이중으로 기억을 저장하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 영역에 저장되는 기억의 특성 차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영혼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지부터 말씀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영혼은, '시간이라는 종속 변수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하는 동적코드를 가진 자율적 데이터 구조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동적 코드는 지속적으로 갱신되며, 사람이 외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는 근본적인 원칙과 기준 역할을 합니다. 결국 한 개인의 가치관, 신념, 세계관, 사상, 이념 등은 이러한 동적 코드에 의해 선택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아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마도 이 동적 코드가 그 대답이 될 겁니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혼에는 이 동적 코드를 구축하는 데 쓰인 기억들이 우선적으로 저장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뇌는, 기본적으로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소하든 중요하든 특별하든 일상적이든, 그 분류와 상관없이 무조건 일단 저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확실히 영혼보다는 뇌에 저장된 기억의 용량이 훨씬 큰 것은 맞습니다. 다만 저장은 되어 있다 뿐이지, 살아있는, 그러니까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이 얼마나 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기억 저장능력이 뇌에 비해 떨어진다고 폄하하기에는 이릅니다.


저는 영혼과 뇌에 저장된 기억의 차이를, 회상이라는 기준에서 먼저 설명해드리고 싶은데요. 기억에 중요도를 부여하는 기준, 그러니까 회상하기 쉬운 기억을 분류하는 기준이 영혼과 뇌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각자가 중요하게 기억하기로 한 사건들에 상대방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입구에서 가까운 선반에 놓아두는, 인기 있는 기억을 배열하는 기준이 서로 다릅니다. 일단 뇌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시다시피 얼마나 자주 그 활동을 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뇌는 많이 반복된 행위를 신경 회로 패턴에 더 고착하는 방식으로 꺼내가기 쉽게 배치합니다. 이건 어찌 보면 생물학적인 효율성의 법칙이지요. 자주 하는 행동을 기억하는 것은 에너지를 크게 아낄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루에 12시간씩 도계장에서 닭의 목을 자르는 일을 하는 젊은 남자를 상상해 보지요. 그는 그 일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루에 12시간씩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싫거나 좋거나 그 일이 익숙해집니다. 기계처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지는 겁니다. 이것은 전부 뇌가 주인이 자주 하는 행동을 기저핵이라는 곳에다가 따로 갈무리해서 단축키처럼 저장해 놓은 덕분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도축을 하는가?'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도축이란 행위가 얼마나 불쾌하고 슬픈지, 그래서 자신의 동적 코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혈이 낭자한 풍경, 비린 냄새, 시끄러운 기계 소리 등의 장면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의 영혼에 말이지요. 


그러니까 뇌는 반복된 행동을, 영혼은 '강렬한' 감정적 경험을 주로 저장한다는 말씀인가요?


- 앗, 오해가 생긴 것 같네요. 사실 영혼에 저장되는 기억의 우선순위에 '강렬함'은 없거든요.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자아를 형성하는 '사건'은 보편적일 수 없고, 가끔은 거창하지도 않아서 내가 왜 이런 성격이 되었지라고 할 때 무언가를 딱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소할 때가 더 많습니다. 무시무시한 연쇄 살인자의 동적코드가 만들어진 시점을 복기해 보면, 집에서 쫓겨 나와 거리에 있을 때 자신을 경멸하듯 보며 지나간 행인의 시선이 그 시발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냥 무의식의 기저, 즉 창고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져 있죠. 그러니까 나는 과거의 어떠한 경험 때문에 세상을 이렇게 봐,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냥 난 세상을 이렇게 봐. 로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서의 이야기를 연계한다면, 사실 영혼은 회상하는 용도로 기억을 저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뇌와 영혼에 저장된 기억의 차이점입니다.


- 이해가 될 듯 말 듯하면서도 어렵습니다.


- 그, 이것은 논란이 있는 내용이어서 말씀드리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만 다중인격의 환자를 생각해 보면 영혼과 뇌의 기억 차이를 이해하시기가 좀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한 신체에 여러 개의 영혼이 붙은 희귀한 상태가 바로 다중인격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해리성 장애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분석한 결과, 신체와 감응된 영혼의 전자기적 구성이 단일하지 않았으며, 서로 혼합되지 않는 상이한 스펙트럼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들이 감응하고 있는 동적 코드가 2개 이상임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서로 다른 동적 코드가 뇌와 결속하면서 인격 교체가 일어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다중인격 환자들의 개별 인격, 즉 그러니까 동적 코드의 크기는 1인 1 영혼일 경우와 비교하면 아주 용량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수 대에 걸쳐 환생한 것으로 알려진 즉, 달라이 라마 등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결과죠. 그분들의 동적 코드 크기는 일반인보다 훨씬 컸었죠. 이건 아무래도 영혼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형성되는 데이터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해리성 장애에서 각각의 인격들과 대화해 보면 그들의 기억이 확연히 구분되기는 하나,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조망한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썩 다채롭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 그렇다면 박사님의 말씀은 영혼의 데이터는 그 크기가 작아도 한 사람의 자아로서 작동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 네, 맞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사실, 기억을 보관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해리성 장애 환자들의 경우에서 보자면, 동적 코드의 뼈대를 이루는 기억만 영혼에 저장하고 나머지 기억들은 뇌 어딘가에서 찾아내어 대충 끼워 맞춰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한 인격의 동적 코드가 '염세적'이라면, 예를 들자면 말이지요. 세상을 절망적으로 볼 수 있는 기억을 신체의 뇌에서 찾아내는 겁니다. 그것이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사람을 발견한 불쾌한 기억이든, 학살을 일으킨 독재자의 뉴스든, 혹은 자신을 괴롭힌 부모의 존재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영혼의 동적 코드를 지지하는 뇌 안의 기억을 찾음으로써 동적 코드는 업데이트되고 독립적인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인지됩니다. 이걸 두고 저희는 페어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의 다중 해석이라고 불리는, 같은 사건을 두고 인격끼리 서로 다르게 각색하고 변형해서 해석하는 현상이 생기는 이유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신기하네요. 뇌와 영혼이 기억에서 하는 일을 알 것 같으면서도 왜 이렇게 나뉘었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 네 저도 그렇습니다. 원한만 남은 귀신 이야기들 있잖습니까?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다 공격하는 민간 설화들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요. 그것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뇌가 없으니, 자신의 본질적인 동적코드, 즉 분노만 남은 겁니다. 뭐 때문에 분노했는지를 알아낼 방도가 전혀 없지요. 왜냐하면 뇌가 없으니까요. 만약에 뇌라도 있으면 분노의 맥락이 구분되고 정형화될 텐데 그러지 못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귀신으로 유지가 될 정도의 영혼이라면 그 전력 공급이 뭐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연히 발생한 자연적 전력에 기대어 존재하고 있을 테니, 매우 필수적인 매인 코드만 남아 있겠지요. 기억이라는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페어링이 되지 않는 동적 코드만 남은 상태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도, 의지를 가집니다.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있죠.


- 좋아요. 박사님, 영혼은 기억을 할 수는 있으나 보통은 뇌가 그 역할을 하고, 영혼은 기억이 안 날 때, 뇌에서 비슷한 내용의 기억을 뽑아쓸 수 있다. 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영혼은 보통 얼마만큼의 기억을 할 수 있는 걸까요? 박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영혼만으로 트랜스퍼를 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져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제 설명이 뇌와 떨어진 영혼이 어쩌면 치매 환자처럼 되어 버릴 것 같이 느껴질 여지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얼마만큼의 기억을 저장하느냐는 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라서, 뇌는 몇 년 치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고 영혼은 몇 년 이상의 기억은 저장 못 한다 이런 식으로 말씀 드릴 순 없지만,


- 네, 사실 박사님께 여쭙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웃음) 최근의 기억, 그러니까, 정확히 그 기간을 정확히 언급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10년 이내의 기억은 영혼에도 대부분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도 최근에 회상을 한 경험이 있다면 역시 남아 있고요. 다만, 영혼은 '기억을 저장하기 위한' 데이터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다행이군요. 그럼 지금 사람의 몸을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한 세계정부의 결정에 여러 가지 우려가 있는데, 기억을 어디까지 허용해 주어야 하나요? 영혼의 동적 코드를 유지하려면, 그러니까 귀신이 되지 않게 만들려면, 뇌의 기억을 페어링 해줘야 한다면 남의 몸을 빌렸을 때도 뇌의 기억을 열어주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아, 그건 아닙니다. 영혼의 동적 코드를 유지하는 것은 적절한 전력의 공급이지 기억이 아닙니다. 영혼에 저장된 기억, 동적 코드는 뇌와 같이 노후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기간의 영혼 운용에 있어서 뇌에 저장된 기억을 페어링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달 이내에는 영혼의 동적 코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경험을 페어링 하지 못하더라도 영혼의 데이터 패턴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차라리 페어링 할 경우에 동적코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세계정부의 정책이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80세 노인이 20세 뇌와 감응할 경우라고 가정해 보지요. 자식을 키운 경험과 관련된 동적 코드를 뒷받침할 기억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결국 어릴 적 키운 강아지의 경험이 페어링 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 반복될 경우에는 동적코드 자체가 완전히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페어링이 안 되니까 기억의 오류가 발생할 순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게 왜 나한테 낯익게 보이지? 왜 이게 나한테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느껴지지?'라는 생각은 들 수 있을 겁니다. 또 그런 감정이 신체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영혼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기억이 상실된 것 같은데 자꾸만 뭔가가 연상되는 느낌입니다. 답답할 순 있겠죠. 하지만, 영혼에서 기억하지 않는 것들은 '동적 코드'를 유지하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야. 




밖이 휴머노이드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것과 달리 휴게소 내부는 한산했고, 대부분이 사람이었다. 그럴만했다. 휴머노이드를 빌린 관광객들은 굳이 휴게소 안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니고, 식사를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을 가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음식을 먹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아마 현지인, 그러니까 일본인들뿐인 듯했다J는 왠지 이곳에 자기 몸이 아닌 채로 다니거나, 일본인이 아닌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소외감을 느꼈다.


J는 일본에서의 첫 번째 식사를 뭐로 할지 고민했다. 휴게소 안엔 옛날 방식으로 직접 조리해 주는 식당도 있었고, 음식용 3D 프린터기도 있었다. 그리고 식당으로 포함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쿠오카 음식의 맛이 기록된 데이터 카드를 파는 곳도 있었다. J는 아마 휴머노이드로 관광을 온 여행객들을 노리고 개발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상점에선 씹는 질감도 넣어뒀다는 '말고기 회' 데이터 카드를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있었는데, J도 사서 가져가 볼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A는 괜찮다고 했지만, 직접 먹을 자신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머노이드는 맛을 보고 음식을 삼킬 순 있지만 들어온 음식을 소화할 수는 없었다. J도 지난번 휴머노이드를 빌려 여행을 갔을 때 배를 열고, 자신이 먹은 음식들이 그대로 모인 불투명한 봉투를 처리하는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났다. 먹지 않고 맛만 본다니, 썩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다만 '안에서 이럴 게 아니라 '드론 관광'처럼 밖에서 영업하는 게 훨씬 잘 될텐데'란 생각은 들었다. 


한 바퀴 둘러본 뒤 J는, 역시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사람이 조리해 주는 것으로 먹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한 일본인 여성이 꽁꽁 언 양팔을 문지르며 부산스럽게 휴게소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다른 일본인들에 비하면 매우 큰 편이라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었다. 못해도 175cm는 넘어 보인다. 쿠사센리의 추위는 예상하지 못한 듯, 추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한기가 스며드는 것 같다. 목에 건 반다나만 빨간색이고, 온통 검은색 계열로 옷을 입었는데, 피부는 옷과 대조되게 매우 하얗다. 키가 껑충하게 크지만, 몸은 빼빼 말라서, 어수선하게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꼭 커다란 종이 인형이 떨리는 것처럼 보인다. 숱이 많은 새까만 머리는 목덜미 높이로 짧게 잘랐다. 


도서관 같던 휴게소에 키가 큰 여자가 부산스럽게 들어오니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여자에게 쏠렸다. 여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느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짓고, 혀를 날름 내밀더니 구석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옮겼다. 창가 쪽에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한껏 웅크리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그녀의 얼굴, 유난히 도톰한 윗입술이 눈길을 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한지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시간이 지나 추위가 조금 가셨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뒤에 맨 가방을 앞으로 풀러 내려놓는다.


J도 그녀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등장으로 휴게소의 적막이 깨어지는 듯했으니까. J는 약간 통쾌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꽤 추웠겠다고 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잠깐 들긴 했어도 그게 다였다. 키만 컸지 앳된 얼굴의 동양인이라 나이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혀를 날름 내밀고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는 그녀를 본 순간, J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러움이 일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의외의 반응을 보고 J는 '아마도 A의 지인'을 또 만나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다이칸보 전망대에서와는 좀 달랐다. 몸의 반응에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어쩌면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문득 든다. 우동집 사장을 보며 긴장이 풀리고 느긋해지던 반응과 달리 심장박동이 되려 빨라지고, 어깨는 힘이 들어가고 조금 움츠러들었다. 이마를 올리며 반가움을 표시하던 것과 달리 동공이 확장되어 시야가 좁아지고 그 안으로 그녀가 빨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힐끗 쳐다본 그녀가 가방을 앞으로 풀러 내려놓는 장면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재생되는 듯 느껴졌다. 맙소사, 등에 땀도 배어 있다.


어쨌든, 조금 전 다이칸보 전망대에서처럼 저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해 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니구나. 저 사람, 나처럼 일본인을 빌려서 여행 왔나 보구나.’


J는 안심했다. 어디를 들릴 때마다 매번 A의 지인들과 마주치는 식이라면 앞으로 사람들을 쳐다볼 엄두도 안 날 것 같았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말을 걸어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까 전부터 아주 작게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위화감이 들고 있었는데, 그 이유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J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お一人で旅行にいらしたんですね。外はとても寒いですよね?」

 - 혼자 여행 오셨나 보네요. 밖이 너무 춥지요?


그녀는 낯선 일본인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어오니 언뜻 경계하는 눈치다. '아, 일본어 말고 영어로 말할걸' J는 순간적으로 후회했다. 부랴부랴 자신의 태그 목걸이를 티셔츠 밖으로 꺼내 '저도 렌탈 중인 여행자예요.'라고 표시를 했고 여자는 그제야 긴장을 푼다. J는 슬쩍 그녀의 얼굴을 다시 살펴봤지만 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A의 기억에라도 접근하면 덜 답답할 텐데. 


여자는 밝게 웃으며


"Non, les amis qui sont venus avec moi sont en train de prendre des photos dehors."

- 아니에요. 저와 함께 온 친구들은 지금 밖에서 사진 찍고 있어요.


라며 창밖을 가리켰다. '불어네, 프랑스인이구나' J는 불어를 모르지만 마치 모국어처럼 들리게 만들어주는 기술에 감탄한다. 새까맣고 짧은 머리 아래, 추위 때문에 하얗다 못해 새파래진 듯한 그녀의 가늘고 긴 목이 J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짧은 솜털이 햇살에 비치는 모습이 난데없이 관능적이다. '어라?' J는 당황한 걸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3명의 휴머노이드 관광객이 저 멀리 공중에 뜬 카메라 드론을 향해 포즈를 취하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J는 '몸'을 진정시키면서 여자에게 물었다.


“사진이요? 휴머노이드끼리 사진 찍으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지 않나요?”


"아 요즘 렌탈 서비스에서는 빌린 사람들 얼굴로 대체시켜서 저장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기계에 들어가서 여행 다니는 게 은근히 기억에 남나 보더라고요. 에잉, 여기 풍경 되게 멋진데 저만 사진에 빠져서 좀 섭섭할 것 같네요. 그래도 너무 추워서 못 버티겠더라고요. 화장실도 가야 하고…. 아! 왜 남들처럼 휴머노이드를 빌려 오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프랑스인은 수다스럽다. 일본인의 입술로 말하는 프랑스어는 왠지 야릇하다. 


“맞아요, 저도 이렇게까지 추울지는 몰랐어요. 오토바이를 빌려서 운전하고 있는데, 다시 탈 생각을 하니 아찔하네요.”

“와, 오토바이요? 정말 좋으셨겠다. 오는 길에 오토바이 모는 분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이 길은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다니면 훨씬 더 멋지겠다 생각했어요.”


“네 좋긴 좋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추울지는 몰랐어요. 호텔에서 배낭을 안 가지고 온 게 후회돼요. 그 안엔 두꺼운 외투도 있는데."

“맞아요. 여기 너무 추워요. 그런데 호텔에서 짐은 보내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한번 연락해 보세요!”


프랑스인이 눈을 반짝이며 J에게 얼른 호텔로 연락해 보라며 채근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대화,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하다 누구지? 누구랑 한 대화였더라?


“아, 그런 방법이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한번 전화해 보고, 올게요.”




J는 여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휴게소에 비치된 전화기를 찾아 나섰다. J는 혼란스럽다. 뭐 때문이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순 없는데 묘하게 익숙한 대화다. 설마, 자신이 아는 사람일 리는 아니겠지. J는 자기가 아는 프랑스 인 중에 사람을 빌려 일본에 여행을 올 만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지만 생각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영혼을, 얼굴도 다른데 알아차리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고? 그 정도로 친한 프랑스인은 없을뿐더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영혼을 알아보는 눈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전화를 찾아 호텔로 연락해서 자신의 객실에서 가방을 쿠사센리 휴게소로 보내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호텔에서는 흔쾌히 배낭을 보내줄 수 있다고 하였다. J는 고맙다고 호텔 직원에게 말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J는 두리번거리며 여자를 찾았다. 다행히 여자는 어디를 가지 않고, 창가 쪽 자리에 앉아 환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 J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왜 익숙함이 느껴지는지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하는데, 자꾸 성적인 상상으로 이어지려 하는 게 불안했다. 이게 빌린 두 사람은 모르는 두 일본인의 속사정이 있어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거라면,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J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J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외모에 관심이 가는 게 정말 일본인만의 탓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호텔에서 바로 보내준다고 하네요. 덕택에 분화구도 가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다며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J를 보고 여자는 밝은 표정으로


"잘됐네요. 부러워요! 나카타케 화구를 구경하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니 꼭 다녀오세요. 저도 분화구를 올라가 보려고 했는데, 날씨가 이렇게 추워서야 어려울 것 같네요. 부럽습니다!”


“아이고···. 아쉬우시겠어요.”

"아니에요. 어차피 친구들은 화구에 별 관심이 없더라고요. 관광지도 아닌데 뭣 하러 가냐고. 그리고 화구 근처에 가면 전파장애가 있는지 휴머노이드 작동에 오류가 좀 생기기도 하나 봐요."


J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가 앉은자리에서 한 칸을 띄우고 어색하게 걸터앉았다. 아까 전까지 꼬르륵 소리를 내던 배가 이젠 하나도 고프지 않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다 휴머노이드로 여행을 왔는데 왜 혼자서만 사람으로 빌리셨어요?”

“아, 저는 커뮤니티에서 몸을 교환하는 식으로 일본에 왔어요.”

“어, 그런 커뮤니티도 있나요?”


“네, 음. 그러니까 이 일본인 S 씨는 제 몸을 빌려 우리나라 여행을 하고요, 저는 일본 구경을 하고”

“오, 좋은 아이디어네요. 저는 왜 그런 걸 몰랐지?”

“나중에 한 번 가입해 보세요.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어요!”


J가 생각해도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비용도 절약할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사람을 빌리는 것보다는 좀 덜 불안하기도 할 것 같다.


“그러면 비용은요? 앗··· 제가 초면에 너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하하. 아녜요. 궁금하실 수 있죠. 저는 이 S 씨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아서 제가 S 씨에게 조금 더 드려야 맞는데··· 음···“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약간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J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다. 


“앗 제가 실례했어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하, 하여간 그 커뮤니티에서 잘 활동하시면 휴머노이드 빌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




그때 일본인을 렌털한 여자의 친구들이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를 내며 휴게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셋 다 같은 모델의 일본산 휴머노이드를 타고 있다. 직접 본 일본산 휴머노이드는 확실히 기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내부에서 은은히 비춰 나오는 불빛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불빛의 색상은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지정할 수 있는지, 각기 파스텔 톤으로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으로 달리 설정해 놨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따뜻해 보이는 효과고, 확실히 구분에도 도움이 된다. 표면도 반투명한 폴리우레탄 재질 위에 아마도 부드러운 실리콘을 코팅한 것일 텐데,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 정도로 말랑말랑해 보인다. 여러모로 잘 만든 느낌이다.


민짜로 뭉툭하게 만들어진 달걀 같은 얼굴 부위에는 마치 붓으로 그린 듯 동양적인 선으로 표정이 출력되고 있다. 세 명 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을 한껏 벌리고 웃고 있다. 가슴 부위엔 J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17인치 크기의 모니터가 매립되어 있다. 막상 실제로 보니 생각만큼 거슬리지 않는다고 J는 생각했다. 렌탈한 여자 셋 중 둘은 백인, 한 명은 흑인이었다. 나이는 4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인다. 


일본인의 몸을 빌린 그녀가 손을 번쩍 들고, 호들갑스럽게 손짓해서 그들을 불렀다. 가슴에 달린 모니터에 본인의 얼굴을 띄워놓은 3명의 휴머노이드도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두 명의 백인 중 한 명, 그러니까 분홍색으로 설정한 휴머노이드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추위에 지친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정수리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한다. 


“폴리나(Pauline), 추웠지? 어쩜 바람이 이렇게나 분다니?”


‘여자의 이름은 P구나.’ J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 그래도 실내는 훨씬 나아. 여기 진짜 좋다. 우리 다음에 일본에서 연락 안 되면 여기서 만나자.”

"얘 또 이러네"

"그러게 말이야. 너 지금 일본에 와서 그렇게 말한 장소가 한두 군데가 아닌 거 알아? 어디서 대체 만나자는 거야?"


P와 휴머노이드 3명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J도 그런 그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조금 전 P가 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또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러움이 일었다. '저 이야기를 누가 자주 했더라' 분명히 J와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저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심지어 매우 가까운 사람인 것 같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면서 어디서 들었는지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기분이 든다. 꼭 등 어딘가가 간지러운데 도무지 손이 안 닿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뭐 저런 말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어쩌면 A의 지인 중에 저런 말을 자주 했나 본데 기억에 접근할 수 없으니 막연하게 익숙한 느낌을 받는 걸 수도 있다. 그것보다 지금은 저 차갑게 식어있을 손과 팔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욕망이 참기 힘들어지고 있는 게 더 신경이 쓰인다. '뭐지, 지금까지 동양인을 어리게 봤던 건 단순히 키가 작아서 그랬던 건가? 아니면 A의 취향이 이쪽인 건가? 여자 친구는 귀여운 쪽이었는데' J는 혼란스럽다.


한동안 자기네끼리 재잘재잘 떠들다가, 휴머노이드들이 P에게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라는 투로 눈치를 주자 그제야 P가 친구에게 J를 소개해 주었다. 세 명의 여성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J를 쳐다보고 있다. J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아, 여기는 나처럼 일본인 렌탈을 하셨데.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여행 중이시라네. 그러고 보니 성함이….”


"아, J라고 합니다. 이 일본인의 이름은 A이고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오토바이 여행이라니 멋져요. 올라오는 길을 보니 저도 언젠가 드라이브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저도 반갑습니다. 네 분이 우정 여행이라니 부럽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J는 '이제는 친구들도 왔으니 헤어져야지 ‘하고 쭈뼛쭈뼛 일어나려고 한다.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불분명한, 성적인 욕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럴 땐 실수하지 않게 얼른 자리를 떠나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떠나려고 마음먹으니, 아주 잠시, 불길하게도 울컥하고 목이 죄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허전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아쉬움이 남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칸을 띄우고 함께 앉아 있는 여성에게 미련이 남았다. 미련이 가는 대상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의 프랑스인 P 인지, 그게 아니라면 일본인 S의 외모에 끌리게 된 것인지 알 수 없고, 지금 끌림을 느끼고 있는 주체가 자신의 영혼인지, A가 자기에게 전해주는 감정 때문에 착각하는지도 헷갈렸으나 미련이 남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 이곳을 떠나도 아마 계속해서 저 여성의 얼굴과 말이 기억 속에서 반복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휴게소로 들어올 때부터 J와 P를 유심히 보고 있던 흑인 친구(노란색 불빛)가 불쑥 말을 꺼낸다.


“그런데 J 씨 우리랑 같이 식사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얘가 아까 올라올 적부터 배가 고프다고 계속 그랬거든요. 저희는 음식 버리기가 썩 귀찮아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러게, 왜 유별나게 사람으로 빌렸다니.”

“어휴. 말도 마라. 저 짠순이를 누가 말린다니”

"근데 얘 배고프다면서 여기 들어온 거 아냐? 밥도 안 먹고 여태껏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친구들이 순식간에 자기네들끼리 재잘대기 시작하고 P가 당황하며 세 사람을 말린다.


“야! 너희 왜 그래,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J 님 더 추워지면 운전하시기 어려울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얼른 가보셔요.”




눈치 빠른 노란색 불빛의 친구는 고마웠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J의 영혼'이 지시했고, 'A의 몸'이 대답했다. A는 마치 알아서 커브 길을 주파하는 그때처럼, 자신의 무게를 내던지듯 걷는 보폭처럼, 상대방이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 주저하는 것 없이, 그리고 역시나 예의 자신만만한 '눈웃음'까지 한껏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J는 일이 어긋나고 있다고 느낀다.


「実は私も一人で食べるのがちょっとあれだったので、こうしてご一緒できて嬉しいです。もしご迷惑でなければ、一緒に座ってもいいですか?」


- 사실 저도 혼자 먹기에 좀 그랬는데 너무 좋지요. 그러면 실례지만 같이 합석해도 될까요?”


A의 멋진 미소를 보고 분홍, 노랑, 초록색 휴머노이드 친구들이 손뼉까지 치며 잘 됐다며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J는 마냥 기쁘지 않다. 스테이크를 자기가 잘라 보겠다고 야심차게 칼을 든 아이가, 부모가 무심하게 대신 썰어주고 있는 걸 봤을 때, 한참 공을 들이던 고객을 결정적인 순간에 동료가 채어가서 실적을 올리는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축하해 줘야 할 때 생기는 억울함이 들고 있다.


세부 사항까지 지시하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다. 하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조금 더 머뭇거리듯이,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일본어로'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란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다. 아니 세부 사항을 지시했다 해도 J가 홀로 만든 성과가 아니었기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J는 '눈웃음'을 지을 줄 모른다. A의 방식대로 따른 것이 이번엔 성취감을 주지 않고 위협적인 일로 느껴졌다. 당연하다. 이것은 오토바이 운전 따위가 아니니까. 알게 모르게 J의 영혼 속엔, 'A의 뇌와 공유되는 것조차' 싫은 거북한 질투심과 시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J는 P를 흘끔 쳐다본다. 






해리성정체장애: 살기 위해서 2500명이 된 여성 - BBC News 코리아


기사 중,

제니는 복수의 인격으로 바뀌기 직전 BBC에 "다발성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기억은 그 기억이 생긴 그날 당시만큼 선명하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기억은 동결되어 있어요. 그 기억들이 필요하면, 가서 꺼내오면 됩니다."




24년. 12월 16일. 다시 읽어보니 너무 부끄러워 어쩔 수 없이 수정을 좀 하였습니다. 혹시 몰라 원래의 부분도 남겨놓았으니 읽으시느라 불편하시더라도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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