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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재오 Dec 13. 2024

Plain Gold Ring - 니나 시몬

[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2-5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의문의 프랑스 여인 P와 나카타케 화구 여행을 하였으나, 결국 씁쓸하게 헤어집니다.




2036년, 여름 어느 날


스미스가 쓰는 턴테이블은 영국 레가(REGA) 사에서 나온 P5 라는 턴테이블이다. 스미스는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이 턴테이블을 샀는데, 어쩌다 보니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쓰고 있다. P5는 최고급 모델은 아니지만, 설치하기가 쉽고 기본기도 탄탄해서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내구성도 탁월해서 그동안 드라이브 벨트만 한두 차례 교체했을 뿐 여전히 쌩쌩하다.


스미스의 기기들을 소개한다면 그는 20세기 후반에 나온 오디오 기기들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열대 정도의 앰프들을 섭렵한 끝에 현재는 아큐페이즈(Accuphase) C290V 프리앰프와 P7000 파워앰프로 탁트(Takt)사의 컬럼 스탠드 위에 올린 탄노이 3LZ 스피커를 운용하고 있다. 케이블은 모두 오디오퀘스트(Audioquest)사에서 나온 것들이다. 턴테이블에 끼운 카트리지는 오토폰(Ortofon)의 2M 브론즈 MM 카트리지인데, 재즈를 주로 듣는 스미스의 취향에는 합리적인 투자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썩 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지만 소리는 제법 근사하게 나온다.


이젠 AI 프로그램을 통하면 최신의 골드문트 스피커에서 JBL 하츠필드의 고루한 소리가 나오게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사람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이 청각'이라며 여전히 낭만주의적 오디오파일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오늘 스미스는 오랜만에 턴테이블을 써볼 생각이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재킷에서 레코드판을 꺼내고, 소더비의 경매사가 품평하듯 미간을 한 껏 찌푸리고 판 앞뒤를 살펴본 뒤 P5의 플래터 위에 살그머니 올린다. 턴테이블에 올려진 것은 베들래햄에서 나온 니나 시몬의 첫 번째 앨범 Little Girl Blue, B면이다. 초반(1st release)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터라 차마 구입하지 못했고, 이베이에서 500불을 내고 경매에서 낙찰받은 2번째 프레싱이다.


낡은 패브릭 소파에 앉은 J는 덩치가 큰 스미스가 좁은 오디오 사이를 위태롭게 왔다 갔다 하며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턴테이블을 작동시켜 보려는 모습을 한동안 구경했다. 그러다가 음악이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J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앨범 재킷을 들어서 살펴본다. 마분지로 만들어진 재킷 표지엔,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당돌한 표정의 흑인 여성이 그려져 있다.


“니나 시몬?”

“아, 오늘 러브 미 오어 리브 미 (Love Me or Leave Me) 들었거든. 퇴근하면 꼭 이걸 틀어야지 하고 있었어."


마침내 스미스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톤 암을 내려놓자, 이내 치직치직 하는 잡음과 함께 음악이 시작된다. 스미스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뒤뚱거리며 J 곁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자리에 앉는다. 그에게서 슬쩍 시큼한 체취가 풍긴다. J는 AI 프로그램에다 '니나 시몬, 첫 앨범'이라고 말만 하면 음악이 흘러나올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는(그 시스템 가격이 J의 작은 오디오 세트의 몇 배는 된다) 굳이 이 수고로움을 '지불'하고 음악을 들어 보겠다는 그가 완전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얼마나 다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 건지 은근히 기대는 되었다.



곧 단단한 타건으로 Good Bait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럴 듯한 분위기에 J는 압도된다. 번잡한 사전 의식 덕분인지 몰라도 마치 실제로 연주회장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와, 이거 피아노 누가 친 거야?”

"니나 시몬"

스미스가 거만한 말투로 말한다.


"와, 정말? 니나 시몬은 보컬리스트 아니었어?"

"아냐, 피아노를 먼저 공부했어. 그것도 클래식으로, 특히 바흐 스페셜리스트였어. 여기 앨범에서도 잘 들어보면 바흐 분위기가 이곳저곳에서 나와"

스미스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음, 그런 것도 같군."

"커티스 음악원이라고 피아노 교육으로 유명한 학교에 입학시험을 봤는데, 워낙 연주에 재능이 있으니 당연히 될 거로 생각했데. 그전 줄리아드에서는 그랬거든. 그런데 커티스에서 흑인이라고 떨어뜨려 버린 거야. 그 일 이후에 그녀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여전사가 되었지."

"음, 그렇군."

스미스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J는 이제 설명은 그쯤하고 음악을 좀 듣게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베이스와 드럼이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곡이 풍성해지려 하고 있었다.


"이 곡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앨범에서 니나 시몬이 유일하게 자기 뜻대로 연주한 곡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니나 시몬은 원래부터 재즈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거든, 먹고살기 막막하니 어쩔 수 없이 재즈 클럽에서 피아노를 쳐야 했고 팔자에도 없는 노래도 부르게 됐지. 이 앨범도 알고보니 꽤 불리한 조건인데도 돈이 궁하니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한거래. 그런 입장인데 앨범에 넣을 곡이나 맘대로 고를 수 있었겠어?"

"그렇겠네."

"게다가 초창기인 만큼 아직까지 자신의 정체성은 정통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라고 생각했을텐데, 동글동글한 재즈 곡들만 연주하고 불러야 하는 신세가 썩 처량하게도 느껴졌을 거란 말이지. 근데 니나 시몬은 너도 알다시피, 사실 그런 것, 참지 못하는 스타일이잖아. 분명히 속으론 불만이 많았을 거라고. 그 불만이 고스란히 나타난 곡이 바로 이 Good Bait 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말이야."

스미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의 연주가 왠지 악에 받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흠, 그런 거 같기도 하네"


"이제 좀 있으면 매번 들을 때마다 내가 울컥하는 부분이 나오거든, 이제 곧 나올 거야. 지금! 지금, 여기야. 베이스와 드럼을 맡은 지미 본드와 앨버트 히스가 완전히 악기에서 손을 놓고, 그녀의 피아노 솔로만 흐르는 이 부분, 왠지 나이 많은 두 노인이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찬 소녀의 연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 한번 들어봐"


잠시 후 니나 시몬의 피아노 솔로가 클라이맥스로 전개된다. 능수능란한 그녀의 피아노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전해져서 J는 소름이 돋았다. 앨버트 히스의 하이햇이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떠벌리던 스미스도 말을 잃고 두 사람 모두 스피커 사이에서 백 년 전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숨을 죽인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스미스는 벌떡 일어나 턴테이블에서 암을 들어 올려 재생을 멈추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자기 앞에 놓인 콜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J도 왠지 목이 메어서 자신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좋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그지? 재즈는 이렇게 녹음에서 드라마가, 스토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좋아. 다른 것은 기획과 편집이 연주가들의 감정을 깔끔하게 연마해 버려서 그때 그 현장의 공기를 느끼기가 힘든데, 재즈 녹음들은 게으름부터 분노까지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많거든."

"그러게"

J는 맞장구를 쳤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운을 음미하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J는 연주를 마치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덩치가 작은 흑인 피아니스트를 상상했다. 스미스가 정적을 깨트린다.


"아, 그나저나 아무래도 파워앰프를 P7000에서 A50으로 바꾸면 훨씬 소리가 잘 나올 것 같아. 턴도 P5 인 데다가 니나 시몬까지 거니까 피아노가 너무 경직되게 나와서 피곤하네. 배음도 말라서 안 들리고. 더블베이스도 올이 풀린 것 같고, 부밍이 나는 것 같아. 흠, 스피커를 JBL로 바꿔야 하나…"


다시 시작된 스미스의 오디오 이야기에 J는 피식 웃으며 스미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충분히 좋아. 이 친구야'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알겠어, 알겠어"

J의 표정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스미스는 일어나 턴테이블의 암을 내린다. 다음 곡으로 읊조리는 듯한 니나 시몬의 플레인 골드 링이 탄노이 스피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Plain gold ring on his finger he wore 그가 끼고 있는 손가락에 평범한 금반지

It was where everyone could see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있네
He belonged to someone, but not me 그는 누군가의 사람이지만, 내 사람은 아니네
On his hand was a plain gold band 그의 손에는 평범한 금반지가 있었어


Plain gold ring has a story to tell 평범한 금반지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
It was one that I knew too well 그 이야기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In my heart it will never be spring 내 마음속엔 결코 봄이 오지 않을 거야
Long as he wears a plain gold ring 그가 평범한 금반지를 끼고 있는 한

When nighttime comes a-callin' on me 밤이 오면 나를 부르는데
I know why I will never be free 나는 왜 내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지 알아

I can't stop these teardrops of mine 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I'm gonna love him 'til the end of time 나는 그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시간의 끝까지

Plain gold ring has but one thing to say 평범한 금반지에는 단 한 가지 말이 있어


I'll remember 'til my dying day 나는 죽는 날까지 그를 기억할 거야

In my heart it will never be spring 내 마음속엔 결코 봄이 오지 않을 거야
Long as he wears plain gold ring 그가 평범한 금반지를 끼고 있는 한

Plain gold ring on his finger he wore 그가 끼고 있는 손가락에 평범한 금반지
Plain gold ring on his finger he wore 그가 끼고 있는 손가락에 평범한 금반지
Plain gold ring... 평범한 금반지…




"J, 너 참 얼마 전에 인사과 쥬디랑 결국 헤어졌다면서"

"응, 그게…. 그렇게 됐어"

"왜 그런 거야 대체?"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돼버리더라"

J는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쥬디는 네가 아직도 엘리자베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이라면서 온갖 욕을 다 하고 다녀. 크크크"

하필 가사가 “Long as he wears a plain gold ring”인 부분에서 스미스가 킬킬대며 말한다.


"흐흐 그럴지도 모르지."

J는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하긴 근데, 나도 유리가 아직도 문득 문득 생각나긴 하니까 말이야."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스미스가 머리를 긁으며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나, 너한테 하나 고백할 게 있는데 말이야"

"응"

"그때 너, 그러니까…. 음 2025년도 우리 출장 있잖아. 나이키(Nike) 건으로 한국 가야 했던 거. 한국 못 간다고 버텼던 놈, 사실 나였어. 미안하다"

스미스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아, 나 알고 있어. 그때 나 한국 보내고 브라질 간 사람 너라는 거"

"아, 그래?"

스미스는 당황한 표정이다.


"그랬구나. 나 사실 그때, 네가 비행기 안에 있던 동안에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 듣고 정말 미안했었어. 나 때문에 네가 임종을 못 보게 된 거 같아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유리 고향이 한국이라서, 겨우 그 이유 때문에 한국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휴 괜찮아 벌써, 그게…그러니까…. 10년도 더 된 이야긴데 뭐,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 보니 너도 참 어지간하다."

스미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걸 보고 J는 괜찮다는 듯 스미스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는다.


스미스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다음 트랙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흐르기 시작한다.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J는 마음이 몹시 울렁인다. 스미스가 갑작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떠올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된 필름의 열화된 영상을 보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바래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마저 기억 속 어딘가에서 ’찾아‘내어야 할 일이 되었단 사실에 J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잊어서는 안 될 기억조차 희미하게 만든 세월 앞에서 J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더라면, 미신이라 비웃지 말고 내 예감을 믿고 돌아갔더라면…. 지금도 그녀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을까. J는 눈을 감고 상상하다가, 그날 한국에서의 죄책감과 당혹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온몸이 부끄러워진다.


'미안해, 엘리자베스. 난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어.'




그때, 스미스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J에게 말한다.

"근데, 지금 트랙이 훨씬 더 클래식 연주 같네. 이런 곡도 이 앨범에 있었나"


J는 스미스의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친구 아는 척은 그렇게 하더니만"


스미스는 세상 진지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오디오 시스템을 노려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테스트 음반 좀 들어야겠어. 아무래도 저음이 너무 부푸는 것 같아 네가 좀 들어봐 줘"


스미스는 J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 턴테이블에서 니나 시몬의 앨범을 거두더니 곱게 넣고 정리한 뒤 벽에다 대고 말한다.


"AI, 소스를 스포티파이로 바꾸고,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 (Fanfare for the Common Man) 틀어줘"

"오, 마이 갓! 스미스 또 그거야?"

"응! 그럼, 이건 오디오파일에겐 구약성서나 마찬가지라고, 아니, 아니 AI, 이거 말고 아이지 오(Eiji Oue) 걸로 틀어줘 레퍼런스 레코딩 걸로, 응 그래, 맞아 이거."


장엄함과 위대함을 노린 팀파니의 롤이 시작되며 익숙한 그 곡이 시작되었다. 탄노이 3LZ의 작은 우퍼는 대규모의 악기들을 뱉어내느라 고통스러운 듯 떨리기 시작했다. 스미스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10인치 듀얼콘센트릭 우퍼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홱 하고 뒤로 돌려 J에게 외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5인치 우퍼로 바꿔야 할까 봐!"




나카다케 분화구에서 J가 묵는 호텔까지는 20km가량의 거리로 4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아소산 곳곳엔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고, 어두워지면 운전하기가 힘들 것 같아 J는 마음이 급해졌다. P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J도 오토바이를 몰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헤드라이트 불빛을 따라 운전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J는 머릿속이 말끔하게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지런히 오토바이를 몬 덕분에 J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J는 아침에만 해도 두 발을 내린 채 엉금엉금 내려와야 했던 좁은 길을 능숙하게 올라올 수 있게 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도착한 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는 생각이 드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와 보니, 호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천탕에서는 저녁이 되어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어스름하게 불이 밝혀진 숙소에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무와 유리로 현대적으로 지어진 리셉션 건물은 낮보다 밤이 더 운치가 있었다. 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색 정장을 입은 남자 직원이 반갑게 J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십니까? J 님, 잘 다녀오셨는지요.”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옷을 보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목욕을 먼저 하고 식사를 해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식당에는 제가 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J는 방으로 올라가 남색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그물로 된 목욕 가방에 갈아입을 속옷과 칫솔을 넣어 온천으로 내려갔다. 다들 식사를 하러 갔는지 욕탕은 텅 비어 있었다. J는 화구에서의 일이 또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기미는 없었다. 우유와 식초를 섞은 것 같은 탁하고 뜨거운 물속에 일본인의 몸을 담그자, 혈액순환이 되고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 전해졌다.


한동안 눈을 감고 여유를 즐기던 J는 탕에 잠긴 A의 알몸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J는 자신이 봐도 일본인의 몸은 흠잡을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기분이 나빠졌다. 짐작했던 대로, A의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매끈했고,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아래 또렷하게 드러난 잔근육은 근사했다. 몸에 큰 상처나 흉터도 없었다. J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다 결국 단점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따뜻한 물을 손바닥에 모아 얼굴에 뒤집어썼다. A가 자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턱수염이 손끝에 닿았다.


‘함께 다니기는 좋은 외모라고? 인기가 좀 있는 타입이라고?’


P의 말이 떠올라, J는 지저분하게만 느껴지는 턱수염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J는 탕에서 나와 몸을 닦았다.




온천에서 나온 J는 옷을 챙겨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일본식 코스요리를 미리 주문해 두었는데 성게 마 등을 넣고 졸인 수프, 은행, 유자, 토란 등으로 구성된 전채요리 이후에 참치, 도미, 송어 등의 회가 줄줄이 나오는 꽤 긴 식사였다. 그런데 왠일로 J는 평범한 생선구이가 가장 입맛에 맞았다. 마지막엔 버섯 등 고명을 올린 밥에 녹차를 부어 먹는 식사가 나왔지만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사래를 쳤다. 후식도 남아있다고 하였지만 사양하고 J는 객실로 올라와 침대에 풀썩 누워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영혼을 신체에서 분리해서 다른 사람이나 기계에 옮겨 담는다는 위험천만한 아이디어에 세계 각국이 합의한 것은 날이 갈수록 지구 환경이 녹록지 않게 변화하는 데 그 배경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극단적으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않는 한 5년 내로 절멸할 것이라고 섬뜩하게 경고했다.


그러던 중 영혼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과학자들은 영혼을 분리하는 기술을 이용하자는 충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물리적인 신체 이동을 최소화하고 영혼만 이동시키는 기술을 활용하면 에너지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종교계와 근본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인간의 본질을 훼손한다며 격렬히 반발했지만, 세계 각국은 유례없이 신속한 속도로 이 급진적인 방안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선진국들은 거대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었고, 개발도상국들은 국민들에게 가상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이 현실을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가상현실이 현실보다 더 실제적인 일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영혼이 머물기에는 메타버스가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게다가 인류 종말이라는 추상적 공포가 이제는 피부로 와닿는 현실이 되자, 세계인은 다들 뭐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다. 화성 같은 곳에 이주를 하거나 커다란 공기청정기가 달린 지하벙커에서 살아야 하는 것보다는 몸은 놔두고 영혼만 다니자는 대안이 훨씬 매력적이고 재밌어 보이는 제안이었다. 어쨌든, 영혼 분리 기술은 지구의 위기를 상당히 지연시켰고, 우려와 달리 인간성의 황폐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육체는 유한하나 영혼은 영원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육체보다는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갔다. SNS에서 근육과 미모, 재력과 사치를 뽐내던 이들이 이제는 철학과 종교, 문화와 예술을 진지하게 논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격렬히 반대했던 종교단체들은 영혼 수련법을 전수해 주겠다며 신도들을 끌어모으기에 바빴다. 영혼 분리 기술이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여 진정한 영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파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은연중에 몸보다는 영혼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고 덩달아 영혼만으로 살아보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자는 정치가들도 생겨났다.


‘그런데 오늘 겪어보니 영혼은 주인이고 몸은 부하일 뿐이라는 식으로 돌아가진 않던데…. 정작 A의 몸에 내가 휘둘리는 일이 더 많았잖아.’


J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곰곰이 따져본다. 일본어로 능숙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자신을 오해한 호텔 직원과의 일, A의 머릿속에 저장된 오토바이 모는 법과 관련된 데이터를 전달받고 느꼈던 성취감, 오르막길을 능숙하게 오르는 그의 몸에서 얻은 신뢰,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괴리감, 그로 인한 당혹스러움을 떠올리니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마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상을 살아낸 것은 육체이므로 사람의 본질은 몸에 있는 것은 아니겠냔 생각도 들었다.


과연 53세의 몸을 벗어난 지금의 자신이, 예전과 완전히 똑같을까라고 자문해 보니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다고 느꼈다. 저녁 식사에서도 본인은 생선구이보다는 회를 훨씬 더 즐겼을 테고, 배가 터질지언정 후식을 마다하진 않았을 것이란 걸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취향이라는 것도 노출되는 환경에 대한 몸의 선택이니 어쩌면 어떠한 취향을 갖게 되는데 영혼의 역할은 썩 크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P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J로서 느낀 감정이 맞긴 할까?


J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리셉션 건물로 내려갔다. 왠지 스미스라면 알 것 같았다.




J는 단말기에 앉아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가 깬 스미스가 눈을 비비며 화면에 등장했다.


“J, 아침부터 웬 전화야, 일본은 잘 도착했지?”

“어, 난 잘 도착했어. 아침부터 연락해서 미안해. 그런데 스미스, 여행 준비할 때 네가 그랬잖아. 무의식 중에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이 난다고, 그게 혹시 빌려준 사람의 몸이 너한테 뭔가를 제시하는 느낌이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랬던가? 잘 모르겠는데 왜 무슨 일 있어?”


J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미스에게 털어놓았다.

“만약에 내가 이 몸에 들어와서 누군가가 좋아지면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이 몸이 좋아하는 걸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당연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네 맘이지. 아니 그런데 뭐야, 너 지금 일본에서 연애하는 거야? 겨우 12시간 만에?”

스미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깜짝 놀란 얼굴로 J를 쳐다보았다. 자다 일어나 머리가 뭉치니 정수리가 더 횅하다. 왠지 그 모습이 서글프게 보인다.


“아니야 그런 거, 이 나이에 무슨….”


“뭐야, 오토바이를 타려고 사람을 빌린 게 아니라 여자 만나려고 빌린 게 맞았네, 이 엉큼한 친구!”

"아니,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이 친구가 여기서 인기가 좀 있더라고"

스미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한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응?"

"인사과의 쥬디 있지, 너랑 잠시 사귀었던 그 여자"

"응"

"네가 일본인의 몸을 빌려서 일본에 놀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한테 슬쩍 귀띔하더라고. 너한테 몸을 빌려준 일본인 말이야. A인지 하는 친구, 며칠 전에 회사에 전화해서 네가 진짜 여기서 근무하는게 맞는지 물었나 봐."


"그거야 자기 몸을 내어주는 거다 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냐, 그거 말고도 이것저것 캐묻고 그랬데. 결혼을 했는지 등등. 하여간에 조심하라고. 괜히 이상한 일에 꼬이지 말고"

"알겠어.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근데, 쥬디 아직 너한테 미련이 남아있는 거 같더라?"


J는 스미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채 한다.

"그래, 그래, 오늘 고생하고"

"거참, 너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오늘 월차 내고 일본 가버린다."

"응 와, 나야 좋지. 근데 네가 와도 난 곯아떨어져 있을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오토바이 탔더니 엄청 피곤해."

"그래, 알았어. 쉬어"


J는 통화를 끊고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침대에 다시 눕자, J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나가서 호텔 주변이라도 산책하려 하였는데···A의 몸도 별수 없네···’라는 생각을 하며 J는 잠이 들었다.




꿈에서 J는 투명한 조약돌 모양의 캐빈 안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자기 몸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놔두고 온 몸과 자신 사이에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지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보려 해도 닿지 않고 소리를 질러보려 해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J는 실망했다. 흰색 유니폼 위에 남색 카디건을 입은 그때 그 간호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인을 잃어버린' '낡은 몸'곁을 지키고 있었다.


발 밑을 보니 놀랍게도 자신은 A의 몸과 연결된 것이 아니었는데, 일본인은 중앙에 가르마를 한 호텔 직원과 덧니가 나온 자신의 여자 친구를 양팔에 끼고 희희낙락한 얼굴로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J가 애타게 A를 불러 보려 애써봤지만 역시 들리지가 않는다. 낙심한 채 발 끝에서 나온 가느다란 실로 이어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방금 다녀왔던 화구에 자신이 완전히 잡혀버린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선가 중앙에 가르마를 한 호텔 직원이 하는 말이 들린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온천을 하지 말랬지 화구를 가지 말라는 이야긴 안 했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역시나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지금 J에겐 성대와 혀가 없으니 일본어도, 영어도, 그리고 프랑스어로도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때 주변에서 졸지에 유령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를 보고 엉엉 목 놓아 우는 사람이 있어 J는 돌아본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서러운 듯 울고 있는 모습을 본 J는 문득 그 '여자'가 P임을 확신한다. 안개에 휩싸인 듯 어른어른해서 제대로 윤곽이 보이지도 않는데 프랑스인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J는 이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등장하는 게 아니라 P가 나왔다는 게,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데도 P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게 몹시도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시끄러운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방의 전화가 한참을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데스크다.


“안녕하십니까? J 님, 밤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P라고 하시는 분이 전화를 주셨는데 꼭 통화를 하셔야 한다고 성화하셔서···”


시계를 봤더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P의 이름을 듣자마자 J의 정신은 말짱해진다.


“네, 바꿔주세요."

J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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