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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06. 2024

남당 황제 이욱의 사(詞) '虞美人'

(망국 군주의 회한과 비참한 죽음)





            虞美人 


春花秋月何時了(춘화추월하시료)

봄꽃과 가을달도 언젠가는 지겠지


往事知多少 (왕사지다소)

지난 일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小樓昨夜又東風 (소루작야우동풍) 

작은 다락엔 어젯밤 동풍이 또 불었는데


故國不堪回首月明中(고국부감회수월명중)

밝은 달 아래 차마 고국을 돌아볼 수 없네


雕欄玉砌應猶在(조란옥체응유재)

붉은 난간 옥섬돌이야 여전하겠지만


只是朱顔改(지시주안개)

다만 붉은(젊은) 얼굴만 변해가네


問君都有幾多愁(문군능유기다수)

그대에게 묻노니 아직도 얼마나 더 슬픈 일이 있으려나


恰似一江春水向東流(흡사일강춘수향동류)

마치 한 줄기 봄의 강물이 동으로 흘러가는 것 같네




배경

위 사(詞)는 남당(南唐, 937~975년) 황제 이욱(937~978년)이 죽기 직전에 쓴 것이다. 이욱은 이 사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욱이 사를 쓴 날은 그의 생일인 칠월칠석날이었다. 이욱은 자신의 나라가 송 태조(조광윤)에게 망하자 송의 수도인 변경(카이펑)에 끌려와 유폐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욱은 자신의 생일날에 연회를 열고 사를 지어 곡을 붙인 후 가기(歌妓)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난데없이 애절한 곡조와 노래가 궁중에 울려 퍼지자 당시 송 황제인 태종(조광의)이 연유를 알아보고는, 그 내용이 불충하다며 트집을 잡아 이욱을 독살했다. 이욱은 이 사에서 항우가 적에게 포위(四面楚歌) 됐을 때, 애첩 우미인(虞美人)전투에 방해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우를 결사항전케 한 고사(故事)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즉 "얼마나 더 슬픈 일이 있으려나, 마치 한 줄기 봄의 강물이 동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네"라는 구절에서 보듯 이욱의 심경이 처절하고 애처롭다. 


남당의 멸망  

중국의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는 주전충이 건국한 후량에 의해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宋)이 혼란을 끝낸 979년까지이다. 971년 남쪽에 있던 남한(南漢)이 송에게 멸망하고, 드디어 송 태조 조광윤이 칼 끝을 남당으로 겨누자,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은 국호를 남당 제국에서 강남국(江南國)으로 격하하고, 왕호를 황제에서 국주(國主)로, 왕(王)의 작위를 공(公)으로, 중서성과 문하성을 좌내사부와 우내사부로 변경해 한껏 몸을 낮추었다. 또한 이욱은 송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조광윤의 무리한 호출에도 꾸준히 참석해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조광윤은 애초에 남당을 멸망시킬 생각이었기에, 이욱이 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당장 조정에 나올 것을 요구했다. 이욱이 병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자, 이를 빌미로 전쟁을 시작했다. 이욱은 남하하던 조광윤에게 사신을 보내 침공의 명분이 없음을 지적했다. 논쟁 도중 말이 궁색해진 조광윤이 칼을 뽑고는 "외간 남자가 코를 골며(他人鼾睡) 자는데 그냥 놔둘 수 있겠냐"며 회담을 끝내버렸다. 이후 전격적으로 침공한 송 군대에 의해 남당의 수도인 금릉이 포위되자, 이욱은 변경을 지키던 주력군 15만을 불렀으나 금릉에 오지도 못하고 환구에서 송 군대의 협공을 받아 전멸했다. 결국 이욱은 대신들을 데리고 궁 밖으로 나와 공격하던 송 군대의 대장인 조빈에게 항복했다. 


비참한 죽음 

남당이 망한 후 이욱은 북송의 수도인 변경에 끌려와 위명후(違命侯)로 책봉되고 망국의 군주로 살다가 태종 재위 기간 중, 망한 자신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사를 지었다가 이에 격분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 송 태종이 얼마나 극악한 독극물을 썼는지 이욱의 온몸이 우그러지면서 피를 토하고 어깨와 엉덩이가 붙어버렸다고 전해진다. 비록 이욱이 사를 짓는 취미를 즐겼으나, 백성을 핍박하기보다는 온화하게 대했기에, 그가 사망했다고 전해지자,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욱은 첫째 부인 소혜황후(주아황)와 결혼해서 10년을 살았는데, 황후가 병들자 이를 간호하러 온 동생 주여영과 정을 통하다가 부인이 죽은 후 주여영과 재혼했다. 그래서 흔히 언니를 "대주후"(大周后)라고 하고, 동생을 "소주후"(小周后)라고 한다. 소주후의 운명은 망국과 함께 비참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송 태종이 자주 소주후를 궁궐로 불러 유린했다고 한다. 이에 이욱이 분노하자, 이 때문에 송 태종이 이욱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욱과 재혼한 소주후는 그가 독살된 후, 곧 세상을 떠났다.


평가 

이욱은 황제로서 능력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즉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겸병을 완화했으며 무너져가는 황제의 권위를 재건하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도 한다. 그러나 재정확보 등을 위해 화폐와 토지개혁을 시도했다가 극심한 반발에 부딪히는 등 통치에 여러 오점을 남겼기에 대체로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욱이 지은 사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과 문학적 평가가 높은 점은 위안이 될 듯하다. 특히 예인(藝人)의 노래에 지나지 않았던 사를 지식인의 문학 장르로 높였다는 측면에서는 평가를 받는다. 즉 이욱은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중 '사(詞)'의 명인으로 유명하다.  



註: 사(詞)는 당대 중엽에 발생해서 송대에 유행하다가 송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음악 문학으로 대부분은  악곡에 맞춰 노래하기 위한 가사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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