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들에게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 저술가, 교육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 개혁의 사상을 주도한 인물로 현재 일본 지폐 최고액인 만 엔 권의 초상화 인물이다. 반면 한국의 역사학계나 다수의 한국인들은 후쿠자와가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고, 조선과 청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탈아론’의 주창자로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이에 후쿠자와의 사상과 생애를 살펴보고 그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평가를 하고자 한다.
후쿠자와는 나카쓰 번 하급 무사의 아들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본 근대의 사상가·저술가·교육자이다. 1860년대부터 일본의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고 자유주의, 공리주의적인 가치관을 확립했다. 특히 후쿠자와는 자연과학과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후쿠자와의 대표저작인 『서양 사정』, 『학문의 권장』,『문명론의 개략』은 당대를 대표하는 저술이며 사회적으로도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김홍집, 어윤중 등)에게도 많은 가르침과 후원을 했다. 후쿠자와는 청년 시절인 1853년부터 1858년까지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을 공부했고, 1858년에는 에도에 난학숙을 열었다. 후쿠자와가 난학에서 공부한 것은 의학과 물리학이었는데, 이때 경험은 그에게 서구의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자연과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일 수호조약에 따라 1860년 1월 비준 조약을 위해 막부 사절단이 미국 군함 포해튼호로 출발했고, 후쿠자와도 사절단을 호위하는 간린마루의 함장이자 사절단 부사인 기무라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막부 사절단에 합류한 후 한 달여 동안 미국을 견학했다. 이후 1862년 1월 30일에는 유럽 6개국 파견 사절의 수행원으로, 1867년에는 막부의 견외 사절로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후쿠자와가 1860년 미국에서 돌아올 때, 구해온 영어 서적을 자신의 학숙에서 가르치며 공부했고, 이때 일영사전을 최초로 발간했다. 1868년에는 후쿠자와 자신의 학숙을 게이오의숙으로 개칭했는데 오늘날 게이오대학의 전신이다.
후쿠자와는 1866년『서양 사정』을 발간한 후 1870년까지 외편 등을 추가 발간했다. 후쿠자와는 각종 저술과 학술단체(1873, 메이로쿠사) 활동으로 democracy(민주주의, 처음은 하극상으로 번역), nation(국민), society(사회), speech(연설), right(권리), civilizatio(문명), freedom(자유), liberty(자유), culture(문화), competetion(경쟁), insurance(보험) 등 수많은 영어 단어를 오늘날까지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통용되는 단어로 번역했다. 한편 후쿠자와 같은 학술단체(메이로쿠사) 회원으로 일본인 최초로 서양에 유학한, 니시 나마네(1829~1897)도 art(예술), reason(이성), philosophy(철학), science(과학), technology(기술)과 같은 영어 단어를 번역했다. 1869년 1월 메이지유신 후 일왕과 총리대신이 되는 이토우 히로부미가 후쿠자와에게 여러 번 입각을 제안했으나 거부하고 오로지 저술, 언론, 교육에만 전념했다. 후쿠자와는 1872년 『학문의 권장』을 발표했다. 이는 후쿠자와가 실천하던 계몽 프로젝트를 전 일본인을 대상으로 시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저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학문의 권장』은 당시 300여만 부가 팔린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학문의 권장』은 알기 쉬운 표현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담고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후쿠자와는『학문의 권장』에 이어 1875년『문명론의 개략』을 펴냈다. 『학문의 권장』이 일반인의 계몽과 교육에 중점을 둔 책이었다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문명론에 대해 저술한 책이었다. 후쿠자와는 이 책에서 서양의 문명과 일본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서양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이루어 자주적인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후쿠자와가 저술한 『문명론의 개략』은 ‘일본 독립 유지를 위한 방법론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논쟁(征韓論爭)’이 일어나면서 일본 정부 내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후쿠자와는 정한 반대의 논지를 펼쳤는데, 그 이유는 아직 개화가 완전하지 못한 일본이 섣불리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고, 만약 일본에 위기가 온다면 그것은 중국이나 조선이 아닌 서구 열강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 것이었다. 후쿠자와는 1882년 3월 1일 시사신보(현 산케이신문)를 발간하고, 이 신문의 정치평론과 사설 등으로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했다. 특히 후쿠자와는 정치 사설에서 1882년 7월에 일어난 조선의 임오군란에 대해 ‘완미고루(玩味固陋)’라던가 ‘문명의 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조선의 현상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나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후쿠자와는 정변에 필요한 폭약, 도검, 자객 등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의 조선에 대한 문명화 구상으로부터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조선에서 다시 청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자 후쿠자와는 조선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고 “이제 함께 문명으로 나아갈 나라가 아닌, 일본의 지도를 통해야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1885년 3월, 후쿠자와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차라리 그 대열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이웃 국가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결국 1894년 청일전쟁에 대한 노골적 지지로 이어졌다. 그에게 청일전쟁은 ‘근대 문명’과 ‘고루와 구폐’가 동아시아에서 맞서는 싸움이었고, 개화 노선을 걷는 일본과 유교 사상에 안주한 청나라의 대결이었다. 그러므로 청일전쟁의 승리는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간 일본의 승리이며, 그의 오랜 주장의 필연적 결말이었다. 후쿠자와는 청일전쟁 이후로도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행보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립을 중시하며 정부와 대립하는 후쿠자와의 자세는 마지막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 역시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정부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서 국가를 뛰어넘는 시민주의나 보편적인 이상주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후쿠자와는 일본 근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며, 실제 근대 일본의 행보를 보면 그가 제시한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독립이라는 문제에 얽매여 모순된 태도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결코 친정부, 군국주의에 찬성하는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후쿠자와는 당시 일본의 여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청일전쟁을 찬성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쿠자와의 모든 사고의 전제에는 ‘일본의 자주독립’이라는 문제가 포함된 까닭에, 다른 문제나 인식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치부하고 합리화시켜버리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측면에서 보면, 후쿠자와는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