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 무엇을 위한 역사 왜곡인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령 스보보드니(Svobodny, 러시아어로 자유로운 뜻) 인근 수라젭카에서 러시아 극동공화국 군대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자유대대)가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사할린 부대)와 대한독립군단 일부 부대(허재욱의 총군부)를 참살한 사건으로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중국 지역) 참변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사건의 본질은 러시아령인 자유시에서 두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독립군 파벌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한쪽(이르쿠츠크 파)이 러시아 극동공화국 군대를 끌어들여 상대방(상하이 파, 200~500여 명 사망)과 대한독립군단 일부(36명 사망)를 참살한 사건이다.
(러시아 시베리아 마을)
2023년 8월 28일 대한민국 정부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자유시 참변이 독립군이 몰살된 사건이며,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에 연관됐다는 의혹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홍범도 장군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도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고, 이로 인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국방부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홍범도 장군은 최진동, 안무, 지청천 등 간도에서 온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부대원들과 함께 자유시 참변 현장에 없었다.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는 명백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국방부에서 이와 같은 엉터리 발표를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이고 왜곡에 불과하다. 또한 집권 여당의 고위 당직자도 자유시 참변 이후 발표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대한의용군에 대한 무력 진압이 정당했다는 내용)라는 문건을 홍범도가 발표했다며, "뼛속까지 붉은 공산당원이 아니면 우리 민족까지도 적으로 돌렸습니다. 볼셰비키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의 사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자유시 참변은 두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독립군 파벌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한쪽(이르쿠츠크 파)이 러시아 극동공화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상대방(상하이 파)을 참살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볼셰비키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홍범도가 발표했다는 성명서도 위조됐음이 러시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즉 1922년 2월, 코민테른의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로 간 홍범도, 최진동이 제출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에는 자유시 참변을 자행한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 파 간부들을 “4천 년 조선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했다. 아울러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 파와 슈미야츠키 측)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들의 이름을 넣었다”라고 서술했다. 이처럼 성명서에 들어간 홍범도를 비롯한 간도 독립군 지도자 5인의 서명이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측이 위조했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 흉상)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5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한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으로 분산됐던 간도 지역의 한인 독립군들은, 중국의 헤이룽장 성 밀산(密山)에 집결한 후,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했다(일부 학자들은 대한독립군단이 실체가 없다며 이를 부정한다). 이 무렵 레닌이 설립한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고, 이에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중국 밀산에서 겨울을 보내고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자유시로 향했다. 이때 북로군정서 김좌진은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원이 절실했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으로 계속 진군했다. 이어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한인 무장부대로 활동하던 문창범, 한창해의 도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러시아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에 집결했다. 이때 러시아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주둔지를 마련할 테니 그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했다. 이에 1921년 1월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부대를 살펴보면,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최진동, 허재욱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독립군, 서일의 서로군정서가 있었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들로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만군, 박일리야의 니항군, 오하묵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이처럼 한인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집결한 목적은, 분산됐던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 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개울)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부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처지이므로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독립군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눠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는 박일리야의 니항군으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 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 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자유시는 러시아 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 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돼야 했다. 이때 상하이 파 박일리야의 니항군이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 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 그리고리예프를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다. 박일리야의 니항군을 대한의용군으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자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이에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했다. 박일리야는 자유대대에 편입됐던 니항군과 다반군을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불응해 박일리야에 의해 장교들이 체포되고 무장해제 돼,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됐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하이 파의 박일리야가 장악하게 됐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부장, 슈미야츠키)에 가서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결국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극동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이하 고려혁명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군정위원으로 김하석, 채성룡을 임명했다.
1921년 6월 2일 칼란다리쉬빌리는 박일리야가 조직한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무장해제 요구에 박일리야를 비롯한 한인 독립군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들을 2중, 3중으로 포위해 무조건 수락을 강요했다. 이에 박일리야는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7일 자유시에 있는 전 부대를 소집해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면서 박일리야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야는 이를 거부했지만 대한독립군단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왔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대한의용군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까지 칼란다리쉬빌리에게 투항했다. 이에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키로 최종 결정했다. 대한의용군은 박일리아의 상하이 파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허재욱의 대한독립군단(총군부) 부대도 있었다.
(암울한 숲)
참변 발생 6월 28일 칼란다리쉬빌리가 동원한 극동공화국 러시아 군대(코자크 기병대 500명, 러시아 인민혁명군 1,000명 등)가 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무장해제에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 명령에 끝내 불응했고, 이에 같은 날 오후 4시경, 칼란다리쉬빌리의 극동공화국 군대와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에 불응한 대한의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공격했다. 대한의용군 뒤쪽에는 제논 강이 있어 탈출구가 막히는 바람에 피해를 더욱 키웠다. 당시 한인 독립군의 사상자 자료는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이 크게 차이가 났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은 사망 36명, 포로 864명, 질병 19명, 도망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사할린 부대)의 주장에 따르면, 현장에서 사망 72명, 익사 37명, 기병의 추격을 받다가 산에서 사망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으로 총 600여 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체포됐다고 했다. 그리고 간도지방 독립군단체 성토문(구춘선 등 주장)은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사망 추정 600여 명으로 주장했다. 당시 여러 자료와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가해자 측은 사건의 파장을 고려해 피해 규모를 많이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피해자 측과 간도지방 독립군 단체들이 주장한 피해 규모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학살의 장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한 가책으로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년 8월)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1922년 4월 코민테른이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 삼아서 지청천을 체포했으나, 같은 해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됐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간의 대립이 계속됐고, 이에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2월 극동공화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해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계열인 이르쿠츠크 파 및 상하이 파에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했다. 이와 같이 자유시 참변과 그 이후 일련의 사태들은 한인 독립운동이 내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먹구름과 일렁이는 파도)
글쓴이는 홍범도 장군과 같은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마저도 정체불명의 이념과 저급한 역사 인식으로, 폄훼하는 작금의 행태에 대해서는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이고 편향적이지 않아야 하며, 마땅히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에 바탕해야 한다. 혹자는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후 레닌으로부터 하사 받은 권총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한 독립운동지사 2명을 무고하게 사살했다고 주장한다. 실상은 자유시 참변의 생존자이자 사할린 부대 출신인 김창수, 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에게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는다며 불시에 공격하자 홍범도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사살한 것이다. 그 사할린 부대가 가담한 것이 니콜라옙스크(니항) 사건(註)이다. 이 니콜라옙스키 사건의 지휘자이자 자유시 참변의 최대 피해자 박일리야(註)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아무튼 자유시 참변에 대한 사실 왜곡과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폄훼가,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왜?)
(註)니콜라옙스크 또는 니항(尼港)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20년 3월~5월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다. 러시아 니항은 니콜라옙스크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며 아무르 강 하류 오츠크 해를 만나는 어귀에 있는 도시이다. 일본이 러시아 차르 정권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있는 시베리아를 점령키 위해 1918년 8월부터 침략해, 그곳에 일본 육군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일본 육군의 아무르 강 하구의 니항 점령은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1920년 2월 29일, 러시아 볼셰비키 트리피츤이 이끄는 파르티잔(빨치산) 부대가 포위 공격하자, 일본은 곧 항복하고 군인과 거류민이 철수할 것을 협정했다. 이 무렵 트리피츤이 한국독립을 위해 지원할 것을 약속하자, 박일리야가 이끄는 약 380명의 한인 부대도 이 전투에 가담했다. 그러나 일본은 3월 12일 항복 협정을 위반하고 기습 공격에 나섰지만 트리피츤 부대와 박일리야 부대에 의해 격파됐다. 이 기습이 실패하자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는 먼저 처자식을 죽인 후 영사관을 방화했고, 영사관에 머물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의 집단 자살을 감행했다. 이때 일본군과 거류민 700여 명이 살해됐다. 그런데 니항에 거주하던 일본인 거류민 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냉대받았다. 1920년 5월 25일 일본 구원부대가 보복 공격하자 트리피츤과 박일리야 부대는 후퇴하면서 시가에 불을 지른 뒤 수감자와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다수 살해했다. 일본의 기습 공격 실패와 일본의 보복 공격 때 러시아 파르티잔과 한인 부대가 후퇴하면서 살해한 수감자들과 반혁명파 러시아인 숫자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러시아 저술가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1889~1933)이 1924년 출간한 책 "니항의 죽음"에서는 "트리피츤 파르티잔 부대와 박일리야 한인 부대가 수감자 3천 명을 살해했고, 동시에 수천 명 백군파 러시아 민간인들을 포함해 1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라고 주장한다(국내외 일부가 맹신하는 구투만의 책 104쪽, 트리피츤 부대가 1920년 5월 감옥에 1,500여 명 수감, 이후 3,000여 명 살해). 그러나 이는 심하게 부풀려진 내용이다. 당시 니항 감옥은 몇백 명도 한 번에 수용할 수 없는 적은 규모였고, 생존자들 증언에 의하면, 수용된 인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구투만의 책을 토대로 하와이대 교수 존 J 스테판, 일제의 극우파 인사 이오키 료조, 한국의 일부 학자, 극우 논객들이 트리피츤과 박일리야 부대가 1만 명 이상의 일본인과 러시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군이 니항 사건 보복으로 1920년 4월 연해주(신한촌) 참변, 10월 훈춘, 간도 학살을 일으켜 수만 명의 한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친일 러시아 작가, 일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미국인 교수, 극우파 일본인 주장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일부 역사 학자와 극우 논객들이 실체가 불분명한 과장된 내용에 적극 동조하는 행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러시아 항구 도시)
(註) 박일리야(박윤천, 1891~1938년)는 일제침략기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다. 200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박일리야는 아무르 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 도시 니콜라옙스크(이하 니항) 일대의 고려인 소학교에 교사로 근무했다. 1918년 8월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이 니항을 점령한 이후, 박일리야는 고려인 소학교 학감이던 류소심 등과 협조해 니항 부대(이후 사할린 의용대)를 설립했고, 1920년 2월 29일 러시아 볼셰비키 트리피츤이 니항을 무력으로 해방시킬 때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항복 조약을 어기고 1920년 3월 12일 파르티잔을 기습 공격해 수백여 명을 살해했고, 이때 한국인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도 순국했다. 러시아 저술가 구트만과 일본인 이오키료조 등은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을 해방시킨 직후부터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해서 일본군이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일본 거류민과 함께 봉기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때 러시아트리피츤 부대, 박일리야 부대, 중국인 부대가 반격해, 일본군과 공모한 일본 거류민 700여 명을 처단했다. 이후 5월 25일, 일본 구원 부대가 보복 공격하자 러시아 파르티잔과 한인 독립군은 후퇴하면서 시가에 불을 지른 뒤, 수감자와 반혁명파(백군) 러시아인을 다수 살해했다. 2020년 3월~5월에 발생한 니항 사건에, 구트만과 이오키료조는 러시아 민간인 포함해서 최소 4,000명에서 최대 1만 3천 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항 사건 전후인 1920년도 주택, 인구조사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과장된 주장이다. 한편 박일리야 한인 부대는 2020년 5월 말 일본군이 다시 니항으로 침략해 오자, 1920년 10월 시베리아 자유시로 도피했다. 자유시에서 같은 공산주의 계열 한인 독립군 단체(이르쿠츠크 파)와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가, 이르쿠츠 파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행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때 무장해제에 저항하다가 부대원 수백 명이 참살당하고 박일리야는 간신히 탈출해 러시아령 이만으로 도피했다. 1921년 11월 이만에서 이동휘, ·이용, 김규면 등과 제3차 전한군사위원회를 결성하고 군사위원이 됐다. 1922년 8월 고려혁명군정위원회 결성에도 참여해 군정위원이 됐고, 이어 한인 독립군 부대 결성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져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나, 독립군 상당수도 전사했다. 1923. 3. 19일 조선일보에 의하면, 1923년 3월경에 김좌진, 박두희, 박기석, 박동규, 황현, 임표, 김룡수 등과 연합해 대한혁명통군서를 조직해 연해주와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하지만 1936년 1월 24일경 소련의 보안 기관(NKVD)에 의해 체포됐다. 냉전시대 소련에서,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한국계 무정부주의 강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해, 박일리야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대체로 짐작된다. 이후 박일리야는 1938년 5월 25일경 하바롭스크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955년 10월 24일 소련 정부에 의해 복권됐고, 1991년 12월 26일 소련 붕괴 후에는, 정치 테러의 피해자로 인정됐다. 대한민국 정부도 박일리야에게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으로, 그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 포상했다.
(고난의 항일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