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천하', 김옥균의 포부와 좌절)
김옥균(古筠, 1851~1894)은 조선 후기의 사상가이자 관료로, 나라의 부강과 자주독립을 위해 서구 문물수용과 근대적 개혁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설파한 급진개화파의 리더였다. 김옥균은 스물두 살 때인 1872년(고종 10),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요직(우부승지, 이조참의, 호조참판 등)을 거쳤다. 김옥균은 조선 후기 선각자인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로부터 개화사상을 수학했으며, 이후 동문수학(同門修學)한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김윤식 등의 신진 관료를 중심으로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사상 확산에 힘썼다.
1882년 7월 민씨 척족의 수장인 민겸호(선혜청 제조 겸 병조 판서) 등이 구식군대를 차별하고 13개월이나 밀린 급료를 모래, 겨 등이 섞인 불량미로 그것도 일부만 지급한 것이 발단이 돼, 군인들이 폭동(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때 민씨 척족(민겸호) 등이 피살되고 일대 혼란에 빠지자, 조선 조정은 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기화로 청군이 조선에 출병해 폭동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했다. 이후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고 온갖 행패를 부렸다. 이 과정을 지켜본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조선에서 청을 몰아내고, 자주부강과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일본과 서구를 모델로 하는 급진적인 개혁(급진개화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의 근대화 과정(양무운동)을 추종하면서 온건한 개혁(온건개화파)을 주장하는 민씨 척족을 비롯한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혔다. 이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민씨 척족을 비롯한 수구 세력을 제거한 후 개혁을 진행코자 1884년 12월 4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의 공관 병력(200여 명) 지원과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유학생(10여 명) 및 소수 병력(50여 명)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성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의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직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은 10여 년의 일본 망명 끝에 청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키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1894년 3월 28일 고종이 밀파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한국 근대사 초기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김옥균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평가야말로 갑신정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이에 김옥균이 일본 망명으로 가장 어렵고 절박한 시기에, 그를 애증(愛憎)한 사람들의 사례로 그의 식견과 도량을 살펴본다.
김옥균이 일본 망명 후 조선과 청의 압박으로, 일본 정부는 1886년 8월 오가사와라 섬에 김옥균을 강제 연금했고, 그는 이곳에서 2여 년 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김옥균은 절해고도의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해, 연금을 해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줄 것을 호소했다. 결국 1888년 7월 홋카이도로 이송됐다가, 1890년 10월 석방됐다. 김옥균은 오가사와라 섬에 있을 때 소일 삼아 아이들에게 한문과 바둑을 가르쳤는데, 이때 만난 와다 엔지로는 김옥균을 한국어인 아버지라 부르며 평생토록 따른다. 와다는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는 최후의 순간에도 그의 곁에 있었다. 와다는 후일 김옥균과 만남 과정을 회고했다. "내가 아직 철없는 아홉 살 때였습니다. 나는 부모님에 이끌려 오가사와라 섬에 있던 소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김옥균 선생은 유배의 몸이 되어 우리가 사는 고도(孤島)에서 한 많은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웅이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고나 할까, 그분은 세상 일을 잊은 것처럼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이런저런 물건을 주기도 하고, 장난치며 놀기도 하면서 그날그날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에게 이끌려 거의 매일 놀러 다니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수박을 아주 좋아하기에 내가 반리(半里)나 되는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갈 때 맛있는 수박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그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됐고, 결국에는 그분이 사는 곳에서 통학을 하게 됐습니다."
(울적하게 이세산(伊勢山)에 잡혀 있던 몸, 아무런 속박 없이 성문을 떠나네, 하늘도 푸르러라 동풍은 건듯 불고, 천리 밖 오가사와라 하루면 돌겠네. 註: 김옥균이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 갈 때 지은 시)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일본 게이샤 스기타니 다마(杉谷玉)의 사진이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코다테 도서관이 소장 중인 사진에는 "봉래정예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고 표기돼 있다. 스기타니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책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그분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그의 밥상을 따로 차려놓고, 무사 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부음을 전해 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김옥균의 장례식 이후에 소식이 단절됐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기도 하다. 마츠노는 김옥균의 후원자이자 사상가이던 후쿠자와 유키치 집의 하녀였다. 신분 차이가 있던 이들의 사랑은 은밀하게 이뤄졌고, 그래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옥균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마츠노는 김옥균의 일본 망명 직후 후쿠자와 유키치 집에서 만나 사랑을 나눴다. 이들의 관계는 김옥균 암살 직후 일본에서 결성된 김옥균을 추종하는 모임인 '고균기념회'가 1930년대에 벌인 '김옥균 혈육 찾기 운동'에서 자세히 밝혀졌다. 고균기념회가 발행하던 "고균지(誌)" 취재기자는 1935년 당시 77세였던 마츠노를 찾아내어 "고균지" 제3호에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마츠노는 긴 망설임 끝에 "그분이 살아 계셨으면 지금 여든다섯인데"라고 회고하며 김옥균과 자신 사이에 "사다라는 딸이 있는데, 사다는 그의 오가사와라 섬 유배 직후 태어났다"라고 털어놓았다. 스즈키 사다의 성은 마츠노가 김옥균과 헤어진 뒤 스즈키라는 일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스즈키 사다(당시 51세)는 1937년 3월 28일 신조지(眞淨寺)에서 열린 '고균선생 제44회 추도법회'에 유일한 유족으로 참석해 분향했다. 일설에는 "마츠노가 술집 게이샤이며, 김옥균이 방탕한 생활로 유흥가를 전전할 때 그녀를 만나 딸 사다를 얻었다"라고 한다. 당사자들(마츠노, 사다)의 증언과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전술한 내용(후쿠자와 유키치 집안의 하녀)이 사실에 부합해 보인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에 망명한 것은 1884년 12월이고, 일본 정부에 의해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된 것은 1886년 8월이다. 이 짧은 기간에 김옥균이 그간 일면식도 없던 일본 최대 바둑 가문인 본인방가의 수장인 슈에이(1852~1907)와 어떻게 그토록 속 깊은 친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슈에이가 오가사와라 섬까지 찾아가서 3개월이나 머무르면서, 유배 중인 김옥균과 수담(手談)과 환담(歡談)을 나누며 지낸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후 김옥균이 홋카이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도, 슈에이는 중간 기착지인 요코하마 항에서 마중하러 배에 올랐다가 차마 내리지 못하고 홋카이도까지 갔다. 이후 슈에이는 홋카이도에서도 6개월가량을 김옥균과 같이 지냈다. 이와 같은 이들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이 회자된다. 김옥균은 바둑도 잘 뒀다. 본인방 슈에이와 6점 접바둑 기보를 보면 지금 기력으로 아마 5단 정도 된다(한국인 기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 일본의 혼인보(本因坊)는 바둑 실력뿐만 아니라 인품도 갖춰야 하므로, 슈에이 혼인보가 존경한 김옥균의 인품과 도량을 대체로 짐작할 수가 있다.
(혼인보 슈에이는 나의 스승이요, 또한 나의 벗이다. 비단 기도(碁道)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의리에 있어서는 벗인 것이다. 내가 병술년(丙戌年) 가을에 남해 오가사와라 섬에 쫓겨나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더불어 벗하며 살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가 다음 해인 정해년(丁亥年) 봄에 홀연히 온 것은 내가 궁색한 섬에서 외롭게 사는 것을 염려해서다. 그 출입의 의기(義氣)가 어찌 나에게만 감흥이 있겠는가. 함께 보낸 3개월, 내가 사는 어지러운 산속엔 낮에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매일 흙을 나르고 잡초를 뽑아서 하나의 작은 정원을 만들며 그대와 내가 웃으며 소일하게 됐다. 초여름에 배가 와서 그대가 도쿄로 돌아가려 함에 글을 써서 주노니, 후일에 다시 만나 손을 잡을 때 웃음거리로 삼으려 한다.)
註: 이 글은 혼인보 슈에이가 오가사와라 섬을 3개월 머물다 떠날 때, 김옥균이 작별 인사로 써준 것으로, 1904년 안토 요지(安藤豊次)가 일본 바둑 역사와 혼인보 가계의 열전을 자세히 수록한 책인 "좌은담총(坐隱談叢)"에 실려있다.
김옥균이 일본을 1차 시찰할 때인 1881년 12월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저술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이때 후쿠자와는 김옥균이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문명개화론’을 강론하고 가이노우에 카오루, 이토 히로부미, 오오쿠마 시게노부, 시부자와 에이이치, 고토 쇼지로 등 일본 정부 및 민간의 유력인사를 그에게 소개했다. 이후부터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대부분은 외면했지만 후쿠자와만은 그를 진심으로 맞이했고, 일본 정부가 그를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 보낼 때도, 정부를 성토하고 언론에 그의 해금을 호소했다. 또한 김옥균이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후쿠자와는 자신의 집에 김옥균의 위패를 안치했으며, 청일전쟁 와중에도 일본군을 통해 그의 본처와 딸을 찾아 도와주기도 했다.
김옥균의 일본 내 무덤(의복, 머리카락, 신체 일부를 묻음)은 2개가 있다. 제1무덤은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고, 제2무덤은 신조지라는 사찰 안에 있다. 제2무덤은 도쿄대 정문에서 북쪽으로 1.5㎞ 지점에 있다. 사찰 뒤에 검은 화강암으로 된 비문이 세워진 무덤이다. 신조지의 제2무덤은 가이 군지라는 일본인이 사비(私費)로 만든 것이다. 가이는 19세기말 조선의 한성에서 사진사로 일했던 인물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진 김옥균 시신의 일부와 머리카락을 확보해 신조지에 묻었다고 한다. 가이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김옥균 묘 바로 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가이 묘는 김옥균 묘 오른쪽 1m 떨어진 곳에 있다. 비문 재료는 김옥균 비문처럼 검은 화강암이다. 크기로 볼 때 가이 비문이 김옥균 비문의 절반 정도에 그친다. 김옥균을 깊이 존경하는 일본인 사진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증거다.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집사 이규완은 “김옥균은 사람을 처음에는 소홀히 대하다가도 나중에 애지중지했으며, 박영효는 처음에는 친근하게 대하다가도 나중에 소원하게 대했다”라고 말한다. 즉 김옥균은 비교적 대범하나 박영효는 깐깐하게 간섭했다고 두 사람을 평가했다. 박영효의 심복마저도 김옥균을 더 높이 평가한 셈이다.
갑신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은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하게 바란 위인”이라고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다. 서재필은 '회고갑신정변(回顧甲申政變)'에서 김옥균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서광범의 소개로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당시 널리 이름을 떨치는 소위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제일 강한 인상을 끼친 사람은 김옥균이다. 그는 서(書)와 평문(評文)은 물론이고 음악(絲竹)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데가 없었고, 그 높은 재모(才貌)에 나는 한순간 사로잡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확고한 신념의 사나이였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로, 조선을 구하는 길은 민중을 교육시키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서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한 "조선이 청국의 종주권 하에서 꼼짝을 못 하는 굴욕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정예한 군대를 육성하여 국가 방비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무예 배울 것을 권유했다. 서재필은 13세 연상의 김옥균을 만나자마자 그의 뛰어난 재주와 확고한 신념에 매료됐다는 고백이었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향한 존경과 경외감으로 자신에게 권유하는 무예 즉 현대식 군사훈련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도야마 육군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사관생도 10여 명을 이끌고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조성된 김옥균 묘소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박영효가 글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썼다"라고 표기됐으나, 실제는 유길준이 글을 짓고 비문을 새겼다는 것이 통설이다. 개화파 동지 유길준은 김옥균의 죽음에 크게 통곡했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은 없고, 비상한 죽음만 있었네)
고종이 김옥균의 암살을 위해 파견한 자객 송병준은 김옥균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식과 포부에 압도당해 암살을 포기하고 스스로 귀국했다.
박영효는〈동광〉1931년 3월호의 춘원(이광수)과 대담에서 정변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리면서 “김옥균은 기획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계획대로 실행하지 않은 것이 실패 요인”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갑신정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시찰단으로 함께한 후 개화파 일원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하게 지낸 윤치호는 김옥균에 대해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러운 인물”이라고 폄하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그 시대가 속한 이념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편향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에 김옥균이 일본 망명시절 이념이나 정파적 이해에 따라 만난 일본 인사들(이누카이 쓰요시, 도야마 미쓰루, 미야자키 도텐 등)은 제외했다. 다만 일본의 사상가인 후키자와 유키치는 일본 정부의 입각 제의도 여러 번 거절하고 오로지 저술과 민권운동에 몰두한 지식인이라는 차원에서 참조했다.(註) 또한 일본 바둑계 수장인 본인방 슈에이가 조선인 망명객 김옥균에게 매료된 사실에 주목해 자세히 살폈다. 섬 소년 와다와 일본인 사진사 가이도 아무런 이념이나 이해관계없이 김옥균을 존경하고 추종했다. 연인 스기타니도 마찬가지다. 스기타니가 비록 게이샤 출신이지만, 그녀는 전재산을 처분하면서까지 김옥균을 후원했는데, 그야말로 헌신적인 사랑과 존경이 아닐 수없다. 김옥균은 망명으로 인생의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임에도 일본인 소년, 게이샤, 사진사, 사상가, 바둑계 수장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계층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에 김옥균의 식견, 인품, 도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註: 한국에서는 후키자와 유키치가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청일전쟁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청을 배척하자는 '탈아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있다.
김옥균은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시찰 후인 1882년 후반기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저술해 왕에게 바쳤다. 그 제목만 남아 있고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김옥균이 일본 시찰 후부터 종종 얘기했던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려 하므로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처럼 근대문화국가를 만들어 완전 독립을 성취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옥균은 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위험에 빠진 조선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문화국가를 만들어 조선의 완전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우국충정이 가득했다.
1886년 6월 일본 망명지에서 김옥균이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에서도 그의 속 마음이 잘 드러난다. "신들이 당시(갑신정변) 외세를 빌렸다고 평하는 자가 있사오나 이것은 당시 안팎의 사정으로 보아 만부득이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폐하께서도 깊이 아시는 바가 아니옵니까. 과거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가장 빼어났으나 지금은 모두 폐절(廢絶)되어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습니다. 우리 조선이 지금 이 상태로 계속된다면 가장 뒤떨어진 나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감옥균은 조선이 자주국이며 부강한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다음으로는 과학 입국(入國)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부동하게 가졌다. 아울러 김옥균은 상소문에 "청국과 일본은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나라로 조선은 결코 이들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며, 밖으로는 구미 제국과의 교제에 힘쓰면서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해 힘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임도 강조했다. 김옥균이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 내용은 그가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위 상소문은 1886년 5월 고종이 밀파한 자객 지운영이 김옥균에게 발각되어, 고종이 내린 왕명칙서(渡海捕賊使: 바다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를 확인한 김옥균이 분노해 고종에게 반박하는 성격이다. 아무튼 김옥균은 이 상소문을 고종에게 전달 여부에 상관없이, 곧바로 일본 "니치니 신문(日日新聞)"에 게재했다. 한편 고종은 갑신정변 며칠 전까지도 김옥균에게 자신의 신임을 표시하는 밀지("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를 써주며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하자, 고종 자신이 정변의 배후라고 제기되는 의혹을 덮고자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가담자들을 암살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 결론적으로 고종은 일국의 군주로서 자질과 품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암군에 불과하다. 더불어 왕비 민 씨도 사리사욕과 무속에 심취해(註) 나약하고 무능한 고종을 조종해 무속 등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민씨 척족과 무녀의 부정부패를 만연하게 함으로써, 결국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했다. 근래 왕비 민 씨를 미화한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소설, 드라마, 뮤지컬 등이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픽션에 불과하다. 역사는 왕비 민 씨를 가리켜 "사리사욕과 무속에 심취해,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했다"라고 냉혹하게 평가할 뿐이다.
註: 1882년 7월 임오군란 때 왕비 민 씨는 충주 장호원에 있는 척족인 민응식 집에 피신했다가 50여 일만에 환궁하면서 한 무녀를 데리고 왔다. 왕비의 주청으로 고종은 무녀에게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의 진령군이란 작호를 내렸다(군은 왕족에게 내리는 작호). 진령군이 이토록 파격적 출세를 한 계기는 왕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 빠졌을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피신생활을 갑갑해하자, 민응식이 불러온 무녀가 진령군인데, 이때 그녀는 왕비가 자신과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예언했다. 이후 우연인지 그녀가 예언한 날짜에 왕비가 환궁하게 되자, 왕비가 감탄하면서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 후 궁중의 무녀가 되어 왕실을 위한 산천 기도, 굿과 제사를 도 맡았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벼슬을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 할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굿을 하고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을 바쳤다고 한다. 진령군은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를 자주 찾아와 점을 치고 굿도 했다고 한다(매천야록 참조).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 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였다. 그러나 고종은 격분해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사양한 후 낙향했다. 이후로 강직한 선비들이 앞다퉈, 무령군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승지가 감히 고종에게 올리지 못하고 쌓아 두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친일 내각의 개화파 정부가 들어서자 그녀를 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그녀의 행적은 불명하다.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이념에 따라 극단으로 나뉜다. 과거 북한은 김옥균을 친일 주구로 악평하다가 1958년 3월 김일성이 노동당 연설에서 주체 역사를 강조하며, 김옥균을 조선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가로, 갑신정변을 조선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사회발전단계설을 이론적으로 포장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한국의 뉴라이트를 비롯한 식민사관 학자들은 갑신정변을 조선이 스스로 힘으로 근대화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이 몸을 일으켰다가 미완에 그친 아쉬운 사건이라고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 일부 민족사관 학자들은 갑신정변을 김옥균과 추종자들의 권력욕으로 비롯됐으며,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 쿠데타였을 뿐이라고 혹평한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중에 방탕한 생활로(註), 갑신정변 동지인 박영효에게 심한 비난을 받고 결별한다. 이후 박영효는 만나는 사람들(윤치호 등)마다 김옥균을 폄하하고 비난했지만, 김옥균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박영효를 험담하지 않았다. 결별한 박영효 마저도 김옥균을 가리켜 "교유에 능할 뿐만 아니라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 잘 쓰고,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김옥균이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김옥균은 매사를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과신할 뿐만 아니라 계획하는 일들도 모두 유리하게 해석하고, 그 결과마저 낙관적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김옥균의 지나친 자신감과 낙천성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즉 10여 년간 조선 정부에 쫓기는 망명객임에도, 청의 실권자 이홍장에게 "동양 삼국이 힘을 합해 서구 열강을 물리치자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설복할 자신이 있다"며 상하이로 갔다가 고종이 밀파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없다. 김옥균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누구보다도 조선의 근대화에 따른 자주부강과 자주독립을 위한 애국심이 충만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일부 민족사관 학자들이 제기하는, "갑신정변이 권력욕에 사로잡힌 김옥균과 그의 추종자들이 일본을 끌어들여 저지른 쿠데타"라고 혹평하는 것은 편향적인 시각이다. 아울러 당시의 객관적인 여러 사료와도 맞지 않는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김옥균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그리 쉽게 병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옥균은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팔아넘기기보다는, 그의 식견과 도량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단호히 투쟁했을 것이다.
註: 김옥균의 방탕한 생활이 일본인 친구 도야마 미쓰루로부터 '암살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조언에 따라 행한 고육책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김옥균을 지나치게 미화하기 위한 야담으로 보인다.